외국인보호소에서 자살시도 · 단식 중인 이주노동자 석방 촉구 기자회견:
“고용허가제의 피해자, 오먼 씨를 즉각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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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외국인'보호소'에 1년 넘게 구금돼 있는 우즈베키스탄 이주노동자 오먼 씨가 6개월 단식 후 지난 10월 25일 자살을 시도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보호소에 있던 다른 이주민이 빨리 발견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외국인보호소 측은 4시간 동안이나 정상적인 의식을 찾지 못하던 오먼 씨를 간단한 검진과 주사처방만 시행한 후 그대로 방치했다. 뇌나 다른 장기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외부병원으로 이송해 정밀진단을 하는 등 후속조처는 취하지 않았다. 오먼 씨는 자살 시도 이후에도 이대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느니 여기서 죽고 싶다는 말만 반복하며 단식을 지속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이에 경기이주공대위가 11월 1일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는 이주노조, 아시아의 친구들, 수원이주민센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자연대, 다산인권센터 등이 참가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오먼 씨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며, 오먼 씨의 요구를 묵살해 온 수원출입국사무소를 규탄했다. 또한 단속 추방과 미등록 체류자를 양산하는 고용허가제 등 정부의 잘못된 정책도 비판했다.
이주노동자를 노예로 만드는 고용허가제
끊임없는 산업연수제 폐지 요구 끝에 정부는 2003년 7월 고용허가제를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이듬해 시행했다. 그러나 동시에 산업연수제를 2007년까지 존속시켰다. 또한 미등록 체류자를 모두 합법화하기는커녕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면서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
고용허가제는 고용주에 대한 인신 종속이라는 산업연수제의 핵심 문제점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사업장 이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고용이 돼야만 체류 자격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정부의 단속추방은 이주노동자들이 이런 야만적인 고용허가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구실을 해 왔다. 오먼 씨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등록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며 고통받은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오먼 씨는 이주노동자를 일회용 기계부품 취급하며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정부 정책의 피해자인 것이다.
오먼 씨를 면담해 온 ‘아시아의 친구들’ 김대권 대표는 “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자의적으로 정해놓은 행정법규를 지키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제까지 합법이었던 사람이 오늘부터 불법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준 바가 없는데도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고 비판했다.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는 오먼 씨를 즉각 석방하고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정부는 이런 끔찍한 상황을 낳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추방을 중단하고 합법화해야 한다.
오먼 씨의 비극적 삶,
왜 미등록 체류자 합법화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2003년 산업연수제로 한국에 온 오먼 씨가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돼 자살 시도를 하기까지 13년의 세월은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겪는 고통을 압축적이고 생생하게 보여 준다.
오먼 씨는 기숙사 청소를 하며 식탁을 옮기던 중 유리가 깨져 눈에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한국에 온 지 한달 반 만이었다. 그 기숙사 청소는 매일 당번제로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로, 만약 하지 않으면 해고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사고 당시 기숙사에 한국인이 없어 그는 다음 날까지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됐고, 이후 두 차례 수술을 했지만 결국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눈 수술 후 오먼 씨는 원래 하던 금속가공업무를 하려 했으나 금속 파편이 자꾸 눈에 들어가는 문제 때문에 다른 업무로 옮겼다. 그런데 1년 반쯤 지나 사측은 오먼 씨를 다시 금속가공업무로 복귀시켰고, 이 문제로 갈등을 빚자 오먼 씨를 해고해 버렸다. 이 때문에 미등록 체류자가 된 오먼 씨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건설현장 등을 전전해야 했다.
2006년에 산재 보상 신청을 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업무 연관성’이 없다며 거부했다. 한국 법을 잘 몰랐던 오먼 씨는 소송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8년 단속돼 청주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됐다. 오먼 씨는 그동안 단속될까 봐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눈 수술을 하기 위해 보증금 5백만 원을 내고 일시보호해제 됐다. 그런데 눈 수술을 준비하던 중 고향에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6살 아들이 한국에 가자마자 한쪽 눈을 잃은데다가, 미등록으로 일하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졌고 결국 돌아가신 것이다. 오먼 씨는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눈 수술을 하려고 모아 둔 돈을 모두 고향으로 보내야 했고, 장례는 가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다 써버린 오먼 씨는 눈 치료와 장애보상 등을 요구하기 위해 회사를 몇 차례 찾아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회사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협박해 미등록 체류자인 그를 쫓아냈다. 오먼 씨는 가족 부양을 위해 다시 돈을 벌어야 했고, 2015년 8월 두 번째로 단속돼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됐다.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오먼 씨의 생활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작은 방에 10명가량이 함께 생활했고, 마음대로 방을 나갈 수도 없었다. 아침에는 빵만 주기 때문에 밥을 먹고 싶으면 전날 저녁을 남겨 아침에 찬 밥을 먹어야 했다고 한다. 아플 때 바로 병원에 갈 수도 없고 휴대폰을 사용할 수도 없다. 면회는 투명 벽으로 가로막힌 방에서 전화기로 짧게는 5분, 길어야 30분만 가능하다.
오먼 씨는 이런 상황으로는 억울해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우즈베키스탄보다 의료기술이 높은 한국에서 수술해서 회복하고 싶어한다. 수술이 어렵다면 고향에 돌아가서 장애인으로 살게 되더라도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보상금을 받고 싶어한다.
그는 눈 치료와 장애보상금문제 해결을 위해 일시보호해제를 네 차례나 신청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국가인권위, 국민권익위, 청와대 신문고 등에도 호소했지만 하나같이 법무부를 통해 해결하라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한다. 이런 시도들이 모두 좌절되자 지난 4월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으로 1백5킬로그램이 넘는 건장한 체구였던 그는 현재 60킬로그램으로 몸무게가 줄었고, 휠체어에 의지해야 이동할 수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오먼 씨에 따르면 화성외국인보호소 측은 자신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이주인권단체인 '아시아의 친구들'이 우연히 알게돼 정기적으로 면회를 했고, 경기이주공대위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화성외국인보호소 측은 권한이 없다며 책임을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로 떠넘겼고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는 이 문제를 방치했다. 그 사이 오먼 씨가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된 것이다.
오먼 씨는 고용주에 대한 인신 종속을 강요했던 산업연수제 때문에 미등록 체류자가 됐다. 당시 산업연수제는 ‘현대판 노예제’로 악명을 떨치며 이주노동자의 80퍼센트를 미등록 체류자로 전락시켰는데, 오먼 씨도 그 중 한 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