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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는 왜 큰 위기를 맞게 됐을까?

빈곤률 48퍼센트 세계경제 위기가 베네수엘라를 덮치자 민중의 삶이 파탄났다. ⓒ사진 출처 Julio Cesar Mesa (플리커)

우리 나라에서 우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이 크게 벌어지고 있는 이때, 베네수엘라에서는 좌파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우파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2015년 12월 총선에서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 우파들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소환하는 국민투표를 추진하고 있다. 마두로는 2013년에 작고한 우고 차베스의 후계자다.

2000년대 중후반에만 해도 전 세계 진보 염원 대중에게 큰 영감을 준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그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매일 아침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서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베네수엘라인들은 새벽 3~4시부터 상점 앞에 줄을 서기 시작한다. 물건을 사려면 적어도 4~5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무엇을 살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강낭콩의 일종인 블랙빈은 베네수엘라인들의 주식이다. 정부가 고시한 블랙빈의 ‘공정 가격’은 1킬로그램에 60볼리바르이지만 실제로는 4천 볼리바르에 판매된다.

공식 통계도 참담한 현실을 보여 준다. 국제통화기금 IMF 보고서를 보면, 베네수엘라의 물가인상률은 2015년에 88퍼센트였다. 올해는 1백80퍼센트를 기록할 듯하다. 생필품의 가격 인상률은 훨씬 높다. 예를 들어 올해 식료품 가격 인상률은 3백 퍼센트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만큼 대다수 베네수엘라인들의 섭취 열량이 떨어지고 있다.

전기, 운송, 병원, 학교가 말 그대로 황폐해져서 점점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수도가 일주일에 한 번씩만 배급된다. 전기 공급도 제한돼, 공공기관은 일주일에 사흘, 학교는 나흘만 공급된다.

마두로 정부는 민간 자본가들의 ‘경제 전쟁’을 탓한다. 고의로 생필품 품귀 현상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마두로 정부는 대중의 삶을 보호할 실질적 조처는 내놓지 않는다. 그저 말뿐이다. 오히려 경제특구 지정 등 민간 기업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우파와 자본가들이 좌파 정부를 흔드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차베스 정부 시절에도 쿠데타, 직장폐쇄, 대통령 불신임 투표 등이 벌어졌다.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큰 개혁을 이뤘다.

차베스와 마두로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현재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단지 지도자 개인의 차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려면 지난 10여 년간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가 밟아 온 궤적을 살펴봐야 한다.

쿠데타, 아래로부터 대중의 저항, ‘21세기 사회주의’ 선언

1998년 대선에서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했다. 그 전 40년 동안 이어진 정치적 안정이 깨졌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차베스의 집권은 그 전 10년에 걸친 베네수엘라 사회의 급진화 덕분이었다. 1989년 신자유주의에 반대해 일어난 대중 반란(일명 카라카소)이 그 시작이었다. 차베스는 카라카소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차베스는 헌법을 개정하며 ‘볼리바르 식 혁명’을 선언했지만, 사실 그의 정책은 처음에는 온건했다. 차베스는 대통령 취임 후 첫 연설에서 새 정부는 “국가 통제 정부도 신자유주의 정부도 아닐 것”이고 “국가가 절실히 필요하듯이 시장도 최대한 보장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소수 특권층은 차베스 정부의 온건한 개혁조차 마뜩잖게 여겼다. 특히 두 가지가 기존 지배자들을 분노케 했다. 첫째는 아주 제한적인 토지 개혁 법령이었다. 극소수 지주들이 소유한 광대한 유휴지 일부를 실제 경작자들에게 분배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석유공사 PDVSA를 규제하는 법령이었다. 1976년 국유화된 석유공사는 공기업이면서도 사기업 시절의 경영진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계속 소수 특권층의 치부 수단으로 기능했다. 막대한 석유 수출 수익은 정부 통제 바깥에 있었다. 새 법령은 석유공사의 거래를 공개 조사 대상으로 삼고 수익을 정부가 통제할 수 있게 했다.

지배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2002년 4월 12일 새벽 우익 군 장교들이 차베스를 감금하고, 기업주들의 단체인 상공회의소 회장이 대통령을 자임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이틀 만에 실패했다. 결정적으로는 카라카스 판자촌의 빈민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항의한 덕분이었다.

2002년 12월 차베스 전복 기도가 또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직장폐쇄로 베네수엘라 경제를 말려 죽이려는 시도였다. 베네수엘라 재정 수익의 80퍼센트를 차지하던 석유산업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장 중요했다. 또다시 차베스 정부를 구한 것은 대중운동이었다. 그것도 조직 노동계급이 대거 포함된 운동이었다. 노동자들은 기업주의 직장폐쇄에 맞서 스스로 산업을 통제하고 재가동시켰다. 세 달에 걸친 이 전투에서 지배자들은 또 패배했다.

베네수엘라 사회를 급진화시킨 진정한 동력은 계급 세력 관계를 뒤흔든 아래로부터의 투쟁이었다. ⓒ사진 출처 베네수엘라 정부

2003년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등의 여파로 유가가 치솟고 직장폐쇄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회복했다.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하지 못하게 된 것도 차베스 정부의 운신의 폭을 넓혔다.

석유 수출 수익이 급증하며 풍부해진 정부 재정은 ‘미션’이라는 이름의 야심 찬 사회복지 정책에 쓰였다. ‘미션’의 결과로, 시행 첫해에만 1백만 명이 교육 기회를 얻었다. 1천8백만 명이 의료 혜택을 받았다. 빈곤층을 위한 국영 소매점 1만 4천 곳이 문을 열었다.

2004년 세 번째 차베스 끌어내리기 기도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헌법이 보장한 절차를 이용한 것이었다. 유권자 20퍼센트의 서명으로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를 시행할 수 있는 조항이었다. 이 시도도 좌절됐다.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차베스를 지지했다.

세 차례의 반동과 아래로부터의 대중 저항을 거치며 베네수엘라 사회는 더 급진화했다. 노동자들은 차베스 끌어내리기에 동참하고 부패한 베네수엘라노총 CTV에서 나와 좌파적 노총인 전국노동자연합 UNT를 건설했다. 도시 빈민과 지역사회 활동가들은 전국에서 1만 6천여 개의 ‘주민자치평의회’를 구성했다. 이와 함께 차베스도 급진화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말하기 시작했다. 2005년 5월 전국노동자연합 주최의 메이데이 집회에서 차베스는 1백만 명의 군중 앞에서 “우리는 21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합니다” 하고 선언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평등과 정의가 있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2005년 5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광장에서 연설하는 차베스. ⓒ사진 출처 Bernardo Londoy(플리커)

내부 모순과 위기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는 내부 모순이 있었다. 첫째, 개혁을 위한 재원이 석유 수출 수익에 의존했다. 2000년대 내내 상승하던 유가는 2008년 배럴당 1백40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경제 구조를 다각화하려 했지만 베네수엘라 경제의 석유 수출 의존도는 날로 높아졌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닥치며 수면 아래 있던 문제가 드러났다. 유가가 폭락하며 경제가 큰 위기에 빠졌다. 석유 수출 수익에 의존해 조금씩 성장하던 생필품 제조업이 사실상 가동을 멈췄다. 물가인상으로 대중의 생활수준이 악화했다. 하락하던 빈곤율이 다시 치솟았다. 2008~13년 외채가 갑절로 늘었다.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외채를 석유로 상환하면서 석유 수출 수익이 더 줄었다. 복지 정책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쿠바 의료진을 초청해 대대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세계적 관심을 끈 ‘바리오 아덴트로’는 필수 의약품 부족으로 자문기구 이상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됐다.

둘째, 자본가들의 경제 권력이 건재했다. 부유층의 사유재산을 침해하지 않고 석유 수출 수익에 기대어 복지 정책을 폈기 때문에 자본가들의 경제적 지배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국유화 조처가 있었지만, 위기에 빠진 기업만을 대상으로 했고, 그조차 제값을 다 쳐주고 매입하는 방식이었다. 일부 기업의 노동자 관리가 관심을 끌었지만, 베네수엘라 경제의 핵심인 석유산업은 예외였다. 그조차 소규모였고 물자와 지원 부족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차베스는 2002년 공장폐쇄에 동참하지 않은 자본가들에게 혜택을 주며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해서 차베스를 지지한 자본가들을 일컫는 ‘볼리부르게스’는 옛 관행대로 사사로이 부를 축적했다.

셋째, 차베스는 기존 국가기구에 정면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베스 집권 전부터 존재한 관료들은 민중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종종 개혁을 방해했다. 국가 관료는 차베스 재임 기간에 네 배 가까이 늘었다. 관료들은 국유화된 기업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며 부패를 저질렀다. 차베스가 숨지기 직전 발표한 ‘플랜 드라 파트리아’(Plan de la Patria)는 국가를 변혁해 투명하고 사회 전체에 책임지는 기구로 만든다는 구상이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2002년과 2004년처럼 노동계급과 빈민의 자주적 활동이 더 전진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차베스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실질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파업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했다. 전국노동자연합의 임금 협상 제의를 거부하기도 했다.

차베스는 국가 관료를 우회하고자 2006년 통합사회주의당 PSUV를 창당했다. 몇 주 만에 6백만 명이 통합사회주의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통합사회주의당에는 기층의 노동자와 빈민뿐 아니라 차베스 정부 하에서 출세하려는 기회주의자, 국가 관료, 볼리부르게스도 포함됐다. 통합사회주의당은 점차 국가 관료의 정치적 표현체이자 기층의 운동을 억누르는 기구가 됐다. 그러는 사이 각종 개혁은 좌초했다. 기층 활동가들의 시름은 깊어졌다. 투사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차베스가 TV 프로그램에 나와 즉흥으로 정책을 발표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고 대중의 눈에는 소통하는 대통령으로 보였겠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많은 계획이 중도에 좌초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 가지 패턴이 생겨났다. 차베스 개인의 지지는 계속 유지되며 차베스는 각종 선거에서 계속 승리했다. 그러나 통합사회주의당의 지지는 하락했다. 차베스가 후계자로 지목한 마두로가 2013년 4월 대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하지만 2015년 12월 총선에서 우파가 대승을 거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무엇이 필요한가?

그래도 베네수엘라인들 사이에서 2002~04년 운동의 기억과 ‘21세기 사회주의’ 염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2015년 12월 총선에서 우파가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 것은 우파의 지지가 크게 늘어서는 아니었다. 통합사회주의당에 실망한 유권자 2백만 명이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등 통합사회주의당의 득표가 20퍼센트 가까이 줄어든 결과였다.

마두로는 대중을 더 실망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예컨대 얼마 전 마두로는 ‘아르코 미네로’(Arco Minero)라는 정책을 발표했다. 아마존 지역의 천연자원, 특히 금광을 개발하는 사업이다. 그런데 그 지역을 군부가 관리하는 경제특구로 지정하려 한다. 차베스의 개혁 정신(모호할지라도)이 담긴 볼리바르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그 지역 금광 개발이 불러올 환경 파괴와 원주민의 처지,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다국적기업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이 역시 ‘21세기 사회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다.

관건은 혹독한 생활조건에 고통받고 있는 대중이 자주적 투쟁으로 나서게 하는 것이다. 종파적이지 않고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좌파가 이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