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퇴진 대학생 시국선언 관련 온라인 논쟁:
가상과 현실을 구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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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계기로 대학가에서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부 대학에서는 박근혜 퇴진 요구를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좌파가 시국선언을 주도하는 데에 불만을 느낀 일부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논란이 된 바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는데, 이 논란은 매우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고려대학교에서는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이 총학생회 탄핵안까지 발의했지만 힘없이 부결됐다. 오히려 이후 총학생회가 발표한 시국선언문은 기존에 좌파들이 함께 준비하던 내용과 별 차이가 없었고, 이 기자회견에 무려 7백여 명이 참가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총학생회가 박근혜 퇴진 시국선언에 동참하기를 망설이는 동안 좌파적 학내 단체들과 일부 단과대 학생회들이 주도해 먼저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SNS 상에서 비난이 일었고 총학생회는 퇴진 요구가 빠진 시국선언을 따로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 뒤 총학생회는 퇴진 요구를 포함시킨 선언문을 새로 발표하는 등 앞서 시국선언을 발표한 학생들이 옳았음을 사실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시국선언 발표를 조직하고 주도한 좌파적 학생의 일부는 온라인 상의 근거 없는 비난에 주눅들어 불필요하게 수세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상대편의 기세만 높여 줬고 고려대학교에서는 쓸데없는 논란에 1주일이나 시간을 허비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시국선언 발표를 주도한 단체들 중 노동자연대 연세대모임을 제외한 단체들이 공동으로 사과문을 발표해 연서명에 동참한 7백여 명의 학생들을 무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온라인 가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종종 현실과 크게 동떨어질 수 있음을 알지 못한 것도 그중 하나였던 듯하다.
1990년대에 인터넷이 처음 대중적으로 보급될 당시 많은 사회운동가들과 소수자들이 이를 크게 반겼다. 소수라서, 혹은 다수지만 주류 언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소에는 알려지지 않던 목소리를 널리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회를 얻은 것은 천대받는 소수자들과 좌파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대중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던 우파들도 가상 공간이 제공하는 익명성 뒤에 숨어서 공공연히 차별과 편견을 조장할 기회를 얻었다.
익명성
페이스북 등 최근의 매체들은 사용자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제공하지만,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데다 이러저러한 조처에도 가상 공간의 익명성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라면 거의 만나기 어려운 불특정 다수와 너무 쉽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라인 상의 가상 매체는 현실에 비해 지극히 불완전하고 편협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특히 글자로만 표현되는 게시글이나 짤막한 댓글은 매우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최근 〈연합뉴스〉가 옛 통합진보당 출신 인사의 인터넷 게시글(‘결사대를 모집해 청와대로 진격하자’)을 선정적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그러자 진보정당의 한 인사가 〈연합뉴스〉의 보도와 통합진보당 출신 인사의 언사를 모두 비판하는 짤막한 글을 페이스북에 썼다. 그런데 누군가 이 페이스북 게시글에 “정신차려라! 너야말로 5열이구나” 하고 댓글을 달았다. 순간적으로 흥분을 일으키는 표현이기는 한데 과연 여기서 “너”는 누구였을까? 다행히 결말은 훈훈하게 끝났다.
심지어 이번에 논란의 발단이 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온라인 익명게시판인 ‘고파스’에서는 필자에 대한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다. 이게 무슨 문제를 낳을까?
문자로만 이뤄지는 가상 공간의 토론과 달리 현실에서 사람들은 ‘다중 채널’을 통해 의사소통한다. 눈빛·말투·몸짓 등 입체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소리’로 전달되는 정보를 명확히 하고 불필요한 오해와 과장을 걸러내는 작용을 한다.
신문이나 책처럼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이보다는 덜하지만 언론사나 출판사, 필자에 대해 알려진 평판 같은 것들이 주장의 진위나 의도를 이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컨대 최근 〈조선일보〉와 TV조선은 박근혜 게이트를 연일 폭로하고 있지만 이들이 진심으로 민주주의나 부패 척결을 위해 그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의사소통은 기본적으로 개인이든 대중이든 상대방을 전제로 한 것이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신뢰할 만한 상대방이나 매체라면 온라인 게시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필요한 불신이나 적대감을 피할 수 있다. 불필요한 권위와 전문성도 있지만, 토론의 발전에 꼭 필요한 권위와 전문성도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무척 광범해서 2000년대 중엽에는 인터넷 실명제가 법으로 도입된 적도 있다.(표현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점 때문에 2012년 위헌판결을 받고 폐지됐다.)
착각
가상 공간에서 강조되는 불필요한 정보가 커다란 착각을 낳는 경우도 많다. ‘고파스’에서 시국선언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보면 조회수가 2천~3천 회나 된다는 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불과 10명도 채 안 되는 학생들이 논란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들의 글에 댓글을 다는 등 동조한 학생들은 다 합쳐도 50~1백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 댓글이 달렸다면 최초 작성자는 자신이 쓴 글을 최소한 수백 번 조회했을 것이고 댓글을 단 학생들도 최소 수십 번은 들여다봤을 게 뻔하다. 댓글을 단 50명이 새로운 댓글이 달릴 때마다 조회했다고 가정하면 단순히 계산해도 1천2백75회는 글쓴이들이 들여다본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의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댓글이 늘어날 때마다 들여다봤을 테니 사실 조회수는 뜻하는 바가 별로 없다. 고려대학교 학생이 2만 명 가까이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게시판 논쟁은 현실의 의견 분포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
그런데 필요한 정보(필자가 누구인지, 누가 지지하는지)는 얻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정보(조회수)만 눈에 띄게 만든 게시판 구조 때문에 일부 학생들이 착각에 빠진 것이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주로 페이스북에서 논란이 벌어졌는데 상대적으로 학내 단체들과 활동가들에 대해 접할 기회가 적은 신입생들의 페이지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연세대학교는 신입생 전원을 1년 동안 인천 송도에 있는 기숙 캠퍼스에 분리시켜 놨다.) 그래봐야 수십~1백여 개의 댓글이 달렸을 뿐이지만 말이다.
박근혜 퇴진 시국선언을 발표한 단체들 일부가 고작 이런 온라인 댓글에 위축돼 사과한 것과 달리, 노동자연대 연세대모임은 이 시국선언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10월 27일)과 일부 단체들의 부적절한 사과를 비판하는 글(11월 2일)을 게시했다.
당연히 이 글들에도 댓글이 달렸는데 11월 11일 현재 전자의 경우 8천4백89명(조회수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지표다)이 읽었고(전문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3명이 글을 퍼날랐다. 모두 30여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지지하는 내용의 댓글이 2개, 집회 홍보하지 말라는 댓글이 1개, ‘총학생회도 아닌데 왜 시국선언 발표하냐?’ 하는 항의가 8개, 세월호 참사나 백남기 농민 사망 등으로 쟁점을 확대하지 말라는 비판이 1개, 게시판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1개, 왜곡하는 댓글이 2개, 아무 의미 없는 댓글 혹은 내용 없는 비난이 11개였다. 중립적인 글도 1개 있었다.
후자의 경우 3천4백66명이 읽었고 원래 글과 게시자가 퍼나른 글을 모두 합쳐 30여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이중 ‘총학생회도 아니면서 왜 시국선언을 발표하냐?’ 하는 항의가 1개, ‘왜 좌파가 연세대 이름을 쓰냐’는 항의가 1개, 내용을 왜곡하는 댓글이 2개였다. “ㅋㅋㅋㅋ”, “나는 슈크림” 같은 아무 의미 없는 댓글과 내용이 없는 비난이 29개로 가장 많았다. 나머지 3개는 쟁점과 관계없이 단체 자체를 비난하는 댓글이었다.
고려대학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체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반응인 데다, 토론이 이어지면서 잘못된 관점이지만 의미 있는 문제 제기는 줄었고 아무 의미 없는 댓글은 늘었다. 위축되기는커녕 자신감을 얻을 만한 상황인 것이다.
‘좋아요’를 누르며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착각하는 ‘손가락 혁명가’들과 달리 좌파는 실제 현실에서 대중 행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려면 가상 공간이 보여 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과학적 분석과 이론은 이를 위한 필수 요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