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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역사교과서 즉각 폐기하라:
국정 교과서의 역사 왜곡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11월 28일 교육부가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이하 검토본)을 공개했다. 강한 반대 여론에도 내년 1월 최종본을 발행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검토본은 2013년 사실상 0퍼센트의 채택률로 사장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이후 세금 수십억 원을 낭비하며 나온 또 하나의 ‘쓰레기’다. 엉터리 사실 관계와 베껴 쓰기뿐 아니라 내용 또한 교학사 교과서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은 ‘복면’ 집필자들이 공개되면서 더 분명해졌다.

집필자 중 이주영·김명섭·나종남은 한국현대사학회 회원이다. 한국현대사학회는 교학사 교과서 주요 집필진 권희영과 이명희가 주요 회원으로 있고 뉴라이트의 선봉대 구실을 해 온 단체다.

건국대 교수 이주영은 4·3 제주항쟁 때 민간인을 도륙한 ‘서북청년회’를 ‘건국운동가’들이라고 추켜세우는 책을 썼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 김명섭은 이승만을 ‘반제반공 지도자’라 칭하며 ‘이승만 미화’에 앞장섰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나종남은 박정희 찬양론자이고 영산대 교수 정경희는 유신을 ‘정치개혁’으로 미화했다.

중앙대 교수 김승욱은 검인정 교과서가 ‘청소년들에게 반기업·반시장 정서를 확산시킨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옹호한 자다. 낙성대연구소 소장 김낙년은 식민지근대화론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다. 서울대 교수 최대권은 ‘세월호특별법’이 ‘헌법 원리에 반한다’며 세월호 운동 공격에 앞장선 자다.

이런 자들이 쓴 역사교과서가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박근혜에게 즉각 퇴진이 답이듯 국정 역사교과서도 즉각 폐기가 답이다.

이승만 미화, 박정희 찬양, 노골적인 시장주의로 가득한 국정 역사교과서는 박근혜 적폐의 하나다. ⓒ이미진

대한민국 수립과 이승만

1948년 ‘대한민국 수립’(건국)은 검토본의 중심 주장 중 하나다. 이 주장의 본질을 알기 위해 해방 후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1948년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는 격렬한 계급투쟁을 거쳐 수립됐다. 이것이 지금의 이데올로기 투쟁(역사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해방 후 새 사회를 바라는 대중의 염원은 광범했다.(당시 조선인의 70퍼센트 이상이 바람직한 사회 체제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노동자들은 일제가 놔두고 간 공장을 스스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그동안 누적돼 온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특히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이 강력해서 농민과 천대받는 사람들을 이끌 능력이 있었다. 실제 1946년 9월 도시 노동자들의 투쟁이 10월 농촌으로 확산되는 항쟁을 이끌었다.

미군정과 그 후원을 받은 이승만·친일파들에게는 이런 조직과 운동을 분쇄하는 것이 사활적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며 친제국주의적이고 노동계급에 매우 적대적인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수립’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극도로 혐오하고 기업의 이윤 증대와 착취 강화를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박근혜 정부와 현 지배계급에게 딱 맞는 주장이다.

교육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인정했으므로 ‘대한민국 수립’ 주장이 문제가 없다고 강변한다. 이것은 상해임시정부를 자신들의 전통으로 삼는 민족주의 진영의 일부를 달래보려는 시도기도 하고 이승만이 한성정부(3·1운동의 영향으로 서울에 생겼고 후에 상해임시정부와 통합했다)에 참여했던 것을 근거로 이승만과 독립운동 사이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승만은 조선의 혁명가 김산의 말을 빌리면 “설득력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라 생각했던 자로, 독립운동에 명함 내밀기도 힘든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임시정부 인사들은 목숨을 내놓고 일제에 저항했다.(물론 주로 개인적인 저항으로 대중운동과 조직 건설에 보탬이 되지는 못했다.)

사실 1920년대 중반 이래 민족해방 운동의 주도권은 공산주의자와 항일무장투쟁 세력에게 있었다. 이들은 대중 운동과 조직을 건설하는 데 헌신했다. 그래서 한국 공산주의 운동 연구자 서대숙은 당시 “한국인 전체에게 공산주의자들의 희생은 민족주의자들이 이따금 행한 폭탄 투척보다 훨씬 더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고 평했다.

따라서 뉴라이트의 논리를 비판하는 민족주의 진영이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박정희의 유산

국정 역사교과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박정희 찬양이다. ‘박정희 위인전’이라 할 만큼 박정희 정부의 경제적 성과에 대한 설명이 많다. 노동자들의 가혹한 희생과 전태일 열사의 분신 등은 ‘고속 성장의 그늘’로 지나가듯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양의 문제가 아니다. 박정희의 ‘공과 과를 균형 있게 서술’한다고 해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경제개발(산업화)은 잘했지만 정치적 억압(민주주의)은 잘못했다는 주장은 박정희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이 시기 경제적 발전은 공공연히 자행된 독재와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에 기반한 것이다. 국가는 자금을 조달하고 공장 부지와 수출 경로를 마련해 주고 값싼 노동을 공급하고 일체의 권리를 박탈함으로서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노동자들은 세계 최장 시간 노동과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 없는 노동 강도 속에 ‘공순이, 공돌이’라는 천대까지 받으면서 일했다. 1976년 투쟁에 나선 해태제과 여공들이 노동부에 낸 탄원서에는 하루 12시간만 일하게 해 달라는 것과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해 달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였다.

실로 이 시기 자본 축적 과정은 마르크스가 ‘자본의 시초 축적’기를 묘사한,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들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난다”는 표현에 들어맞는다. 차이가 있다면 이 나라에서는 그 과정이 더 압축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강력한 결합을 통한 자본 축적 과정에서 국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아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인 지금의 재벌이 형성됐다. 최순실이 박근혜의 ‘오장육부’가 됐듯 부정부패는 남한 자본주의와 한몸이 됐다.

검토본의 또 다른 주장은 산업화로 임금이 상승해 중산층이 형성됐고 이것이 민주화의 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 상승과 민주적 권리의 확립은 노동자 투쟁의 결과로 이뤄졌다.

박정희 정권의 자본 축적 과정에서 형성된 노동계급은 양적·질적으로 발전해 왔다. 엄혹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속됐다. 특히 1979년 YH 노동자들의 투쟁은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도화선 구실을 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주춤하긴 했지만 노동자 투쟁은 계속됐고 1987년 6월항쟁에 뒤이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6월항쟁으로 성취한 성과를 공고히 하며 운동과 조직의 질적 비약을 이뤘다.

요컨대 박근혜와 검토본이 이어받고자 하는 착취와 억압의 박정희 유산은 박정희 시대의 진정한 유산인 강력한 노동계급에 의해 도전받아 왔고 그들이 현재 박근혜 퇴진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