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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박근혜 적폐의 정치적 공범

△황교안의 별명이 "미스터 국가보안법"임을 잊지 말자. ⓒ출처 청와대

최근의 행보가 보여 주듯 황교안은 단지 ‘관리자’ 노릇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권한대행이 되자마자 ‘안보’, ‘치안’을 강조하더니 〈조선일보〉 고문 김대중 등 우파 인사들만 불러 간담회를 열었다. 국회에는 ‘대통령 대접’을 요구하더니 교활하게도 야당들의 면담 요구에는 각각 따로 만나겠다고 받아쳤다. 이간질하려는 것이다. 5·16 쿠데타는 “혁명”이고 사상의 자유도 “제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소신을 바탕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강행하려 한다.

따라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이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에서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황 권한대행의 사퇴를 요구”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했다.

박근혜 탄핵 이전에도 황교안은 단지 ‘관리자’ 구실에 머무르지 않았다. 2016년 6~9월에 열린 국무회의의 절반 가까이를 황교안이 주재했다. 그사이에 열린 국가정책조정회의와 테러방지법 통과 이후 열린 첫 국가테러대책위원회도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황교안은 박근혜가 추진하던 국정과제들을 나름으로 매우 힘주어 강조했다. 민영화 추진을 위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공공기관 기능조정·규제개혁,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한 구조조정 강화·노동개악·성과연봉제, 사드 배치 강행, 산학협력 강화를 위한 공대 구조조정, 교육·금융 개혁 등.

박근혜의 임기 중반 구원투수로 임명된 총리답게 이 자는 특히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문제들 앞에서는 정치적 경호실장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야당 국회의원들을 대하는 태도부터 다른 총리들과 사뭇 달랐다. 심지어 국회 대정부질의에서도 특유의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해 ‘아직도 자기가 공안 검사인 줄 아나’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오만한 공안통

박근혜 정권 출범 당시 국가기관의 총체적 대선 개입 사건에서 황교안이 검찰 수사에 압력을 행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황교안은 ‘혼외자’ 논란을 부추기는 치졸한 수법으로 검찰총장 채동욱을 쫓아내는가 하면 당시 수사를 주도한 윤석렬(현 특검 수사팀장)을 좌천시켰다. 성완종 리스트와 정윤회 국정개입 사건에서도 자기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잇따른 이유다.

세월호 사고 직후에는 정부의 과실 책임을 은폐하려고 해경 123정장에 대한 기소를 방해했다. 당시 기소를 강행한 검사들을 모조리 좌천시켰다는 폭로도 나왔다. 세월호 특조위에 기소권과 수사권을 주는 데에도 단호히 반대했고 국무총리 취임 이튿날에는 ‘4·16연대’와 주요 활동가들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지기도 했다.

황교안은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폭로되던 10월 국회 대정부질의에서도 “최순실이 누군지 모른다. 의원님이 알면 좀 알려 달라” 하며 비아냥거렸다. ‘세월호 7시간’에 대해서도 “최순실 씨와 연관 없다. 그 시간 동안 세월호 사고에 대한 대처를 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지어냈다. 비서실장 김기춘도 모른다던 시간에 대해서 말이다.

이 자는 틈만 나면 자신의 검사 이력을 과시하며 법을 들먹였지만, 지배계급답게 실제로는 법도 제 입맛에 따라 이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도구로 여긴다.

백남기 농민 사망에 대해 법원이 경찰의 책임을 지적했을 때조차 황교안은 “그동안 우리가 해온 법이 있고 판례가 있고 … 1심 판결인 만큼 판결문을 분석해야 한다” 하며 사과를 거부했다. 반면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에 대해서는 고작 버스 파손 등이 “법질서와 공권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중형을 구형하라고 사실상 지시했다.

2005년 강정구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려 했을 때도, 황교안은 구속영장 발부 기준인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엄벌’, ‘강력한 처벌 의지 표명’ 등을 이유로 구속해야 한다고 버텼다. 삼성 엑스파일 사건에서도 이건희, 홍석현 등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오히려 이를 폭로한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 의원을 기소했다. ‘명예훼손’과 ‘유언비어’ 처벌 협박은 황교안이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반대자들을 입막음하는 데 즐겨 사용해 온 무기였다.

황교안 총리 취임 이튿날 경찰은 4·16연대를 압수수색했다. ⓒ조승진

확신범

이런 태도의 극단을 보여 준 것은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자는 “민주노동당이 2000년 창당했을 때 언젠가는 위헌 정당 심판이 있을 줄 알고 내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다”고 자랑했다. 저서인 《국가보안법》에서도 “어떤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는 구체적·객관적으로 명확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고 추상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는 개연성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증거도 없이 의심만으로 조사·처벌할 수 있다는 식이니 그 자신이 수호한다던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도 부정하는 것이다.

헌재는 이런 자의 편을 들어 통합진보당 해산을, 대법원은 이석기 의원을 포함한 7인에게 최대 징역 9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내란 음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내란 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중형을 선고했다. 명백한 정치적 판결이다. 황교안의 법무부는 몇 달 뒤 추가로 3인을 구속했고 2016년 6월 서울고등법원은 이들에게도 최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황교안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국가보안법 구속자들에 그치지 않는다. 황교안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해 역대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구속한 경력으로도 악명이 자자하다. 2002년에는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차봉천 초대 공무원노조 위원장을 구속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전교조를 법외 노조로 만들며 노동 운동 탄압을 대폭 강화하려 했다. 전교조 조합원들이 이런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자 보복성 징계와 기소를 일삼았다.

황교안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설 때마다 이유와 부문, 심지어 법원 결정도 무시하고 불법으로 몰아 탄압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자기 결정과 자주적 행동을 극렬히 혐오하는 자다. 스스로 자랑거리로 삼는 신앙생활에서조차 그는 보수 대형교회의 재산권을 노동자들의 권리보다 우선시했다. 《교회가 알아야 할 법이야기》에서 그는 “교회를 노동법상의 사용자로, 교회 직원을 노동법상의 근로자로 보는 것은 심히 부당한 결론이다” 하며 부패한 교회를 옹호했다.

박근혜의 적폐를 완수하려는 확신범이 이제 ‘권한’까지 대행하게 됐다. 이 자를 더는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정의당은 황교안 내각 인정 입장을 바꿔야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박근혜 탄핵 직전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황교안을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가당치 않다"고 일축했다. 심 대표는 탄핵 이후 황교안이 최소한의 권한만 행사해야 한다면서도 “국정 안정”을 강조하며 “안보 공백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일상적 위기관리에 전력을 다해줄 것을 당부” 했다. 민주당 추미애조차 ‘황교안 탄핵’을 말하던 상황에서 말이다.

심 대표가 이처럼 당찮게 온건한 견해를 밝힌 것은 그의 탄핵 이후 전망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심 대표는 탄핵 이후에도 박근혜 (즉각) 퇴진 요구는 계속돼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이제는 제도권(의회) 정치로 무대를 옮겨야 한다고 여긴 듯하다. “과감한 개혁을 국회가 주도해 나가야 합니다 … 촛불은 더 이상 광화문광장에만 머물러선 안 됩니다. 가정과 지역으로, 또 학교와 직장으로 들불처럼 번져야 합니다.”

그는 박근혜 퇴진 요구를 지지하면서도, (박근혜가 여전히 사퇴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가정’과 ‘직장’으로 촛불이 향해야 한다는 모순된 메시지를 동시에 내놓고 있다. 박근혜 탄핵을 앞두고 부르주아 야당들과 공동으로 철도 파업 중단을 종용하는 입장을 발표한 것에 비춰볼 때 직장 촛불이 파업 같은 노동자들의 행동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근혜는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억울하다며 헌재 재판 대응을 적극 준비하고 있다. 직무정지 직전 조대환을 민정수석에 임명한 까닭이다. 조대환은 세월호 특조위를 의도적으로 무력화시킨 당사자이자 헌재소장 박한철, 총리 황교안과 사법연수원 동기다.

그나마 박근혜를 탄핵한 동력은 거리 시위 등 오롯이 기층 민중의 행동에서 나왔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이미 수십만 명이 거리에서 ‘즉각 퇴진’을 요구한 11월 초까지도 ‘2선 후퇴’, ‘거국중립내각’ 따위를 운운하며 망설였다. 심지어 탄핵 방침을 세운 뒤에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새누리당과 막후협상에 골몰했다. 부패한 권력자를 쫓아내고 ‘적폐’를 청산하는 일보다 누가 권력을 물려받을지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4월 총선 이후 여소야대 국회에서도 부르주아 야당들은 세월호 특별법, 노동개악, 사드배치 등 문제에서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정부·여당뿐 아니라 기업주들의 권력, 심지어 제국주의 질서 자체에 도전해야 하는 쟁점에서 이들의 입장 자체가 어정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리 항의 운동을 국회 내 협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를 연장하는 효과만 낼 것이다.

사실 정의당은 초기부터 ‘즉각 퇴진’ 당론을 내걸고, 거리의 퇴진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박근혜 퇴진에 실질적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야당들과는 달랐다. 부르주아 야당들이 여섯 명의 의원밖에 갖지 못한 정의당을 따돌리지 못한 이유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의당의 입장 쪽으로 끌려온 측면도 있다. 이 점 때문에 정의당은 거리에서도 크게 환영받았다.

심상정 대표와 정의당은 박근혜 즉각 퇴진과 함께 황교안 퇴진과 그 장관들의 사퇴를 요구하며 항의 운동을 지속·확대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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