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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렇게 생각한다] 19대 대선 결과와 과제:
우파, 1987년 이래 최저 득표 최대 표차로 패배

개정판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진보 정부로 보는 것의 문제점을 보충했다.

우파의 10년 집권을 끝낸 촛불 운동

19대 대선과 함께 박근혜 정부가 완전 퇴진해 지긋지긋한 우파의 10년 집권이 막을 내렸다.

민주당 후보 문재인이 1천3백42만여 표(41.08퍼센트)를 득표해 당선했다. 자유한국당 후보 홍준표는 7백85만여 표(24.03퍼센트)를 득표했다. 우파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처음 도입된 이래 최저 득표에 최대 표차(5백57만여 표)로 패배했다.

이번 대선 투표율은 77.2퍼센트로, 1997년 대선(80.7퍼센트) 이래 20년 만에 가장 높았다. 1997년은 36년 만에 일당국가가 무너지고 정권 교체가 이뤄진 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 하에서 벌어진 부패 스캔들,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청년 실업률 등 경제 불황 심화, 노동조건 악화, 사드 배치 등 친미 외교 정책, 북한 제재 강화 등 강경 일변도의 대북 정책 등을 반대했다.

홍준표는 대중의 변화 염원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재벌 지원을 강화하고, 노동조합을 때려잡고, 힘으로 평화를 지키겠다고 했다. 우파 표를 결집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우익 유권자들은 홍준표의 막장 발언에 환호했지만, 이 자는 보수 세력들로부터도 온전히 지지를 받지 못했다. 유승민은 홍준표를 “보수의 수치”라며 후보 단일화를 거부했다. 자유한국당으로 원대 복귀한 바른정당 의원들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물론 유승민의 ‘개혁적 보수’는 홍준표의 ‘수구 보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승민은 확고한 신자유주의자이고 사드와 전술핵 배치를 찬성하는 강경 안보론자다.

한편, 이번 대선에서는 ‘색깔론’도 맥을 못 췄다. 사드 배치 논란, 북한 ‘주적’ 공방, 송민순 문건 등은 ‘안보 블랙홀’로 작용하지 못했다. 우파의 책략에 대한 불신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부 진보파들이 우파의 종북 몰이를 지나치게 두려워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미 지난해 총선 때 울산북구에서도 우파 후보의 종북 몰이를 노동자 유권자들이 가뿐하게 물리쳐 진보 후보가 당선했다.

결국 ‘나라를 팔아먹어도 35퍼센트 지지율은 지킨다’던 범우파 콘크리트 지지층은 깨지고 약화돼 우파는 선거에서 패배했다. 홍준표와 유승민의 지지율은 합해도 대략 30퍼센트였다.

우파의 선거 패배는 일찌감치 예견됐다. 촛불 운동의 타격을 받아 우파는 위축되고 자신감이 떨어져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이 만연했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범우파 후보들이 명멸했다. 반기문은 우파의 기대를 받으며 등판했다 한 달도 못 가 스스로 강판했다. 황교안은 막판까지 눈치 작전을 펴다 출마를 포기했다.

문재인 정부의 당선 요인과 직면할 모순들

“적폐 청산”의 문이냐 “통합”의 문이냐

문재인은 촛불 운동이 일으킨 탄핵 태풍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갤럽 조사에서 문재인의 지지율은 16퍼센트였다. 당시 1위는 반기문이었다(28퍼센트). 그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 퇴진 운동이 분출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반기문이 부패 추문 연루 의혹에 휩싸인 데다 정권 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년 여론 조사에서 국민의 80퍼센트가 정권 교체를 지지했다.

탄핵 찬성 정당 후보들의 대선 득표율 합계가 박근혜 탄핵 찬성률과 거의 일치한다. 탄핵 찬성률은 꾸준히 80퍼센트 가까이를 유지했다. 탄핵에 찬성한 네 정당 ― 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바른정당 ― 후보들의 득표율을 합하면 75.4퍼센트다. 그중 안철수와 유승민은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정권 교체 후보로 여겨지지 않았다. 안철수는 오락가락하다 날개 없이 추락했다.(안철수가 애초 자유한국당과 민주당 사이에 지지 기반을 놓으려 한 것 자체가 정치적 양극화 상황에 대한 몰이해를 반영한다.) 유승민은 박근혜 탄핵을 찬성했어도 적폐 세력의 일부였다.

정의당의 심상성 후보는 아직 당선 가능한 후보로 여겨지지 않았다.(그럼에도 2백만 명 이상이 심 후보에게 투표한 것은 대중의 변화 열망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정의당의 성적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은 정권 교체를 이룰 현실 가능한 후보로 문재인에 투표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느꼈다.

뒤늦게야

문재인은 촛불 운동의 정치적 수혜자였지만, 처음에는 박근혜 정권 퇴진을 지지하지 않았다. 대신에 박근혜 2선 후퇴와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했다.

11월 12일 민주노총이 주도해 1백만 명이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벌인 뒤인 11월 15일에야 비로소 문재인은 박근혜 퇴진을 처음 언급했다. 10월 29일 최초의 퇴진 운동이 일어난 지 무려 17일이 지난 뒤였다.

민주당이 국회에서 박근혜를 탄핵하기로 한 것은 12월 3일 무려 2백30만 명이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 시위에 나선 뒤인 12월 8일이었다. 더구나 철도 파업 종료를 전제로 한 결정이었다.

이때까지 아래로부터의 퇴진 운동에 주도권을 빼앗겼던 민주당은 탄핵안 통과라는 의회 절차로 옮겨가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됐다.

촛불 운동에 대한 문재인의 소심함이 문재인의 “적폐 청산” 범위와 수준을 규정한다. 그의 “적폐 청산”에는 촛불 운동의 요구들이 거의 반영돼 있지 않다. 사실 많은 사안들에서 문재인은 2012년 대선 때보다 후퇴했다. 문재인이 보수 표를 얻고자 안철수와 우경화 경쟁을 하느라 더 그랬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진보 정부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문재인 정부를 “진보 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눈이 삔 소치다. 어디를 봐서 문재인 정부가 노동자와 천대받는 다른 사람들의 변화 염원을 대변하는 정부라는 말인가.

1990년대 말에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노동조합과 연계돼 있는 서구 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가리켰다. 지금으로 치면 심상정 후보가 속한 정의당이 그에 해당한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진보적 미사여구를 구사하고 진보적 가치를 공유한다고 주장하는 부르주아 포퓰리스트 정부다.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은 중도다.

협치 또는 거버넌스

문재인이 집권에 성공했지만 그 정부 앞에는 심각한 구조적 모순들이 놓여 있다. 우선, 나쁜 경제 상황이 문재인 정부의 운신의 폭을 제약할 것이다. 가계 부채 급증, 높은 청년 실업, 실질임금 하락 등으로 인한 대중의 불만이 상당하다. 그러나 기업주들은 이윤을 지키기 위해 노동계급을 공격하도록 문재인 정부를 압박할 것이다. 그래서 친민주당 개혁 언론인 〈한겨레〉는 ‘통합 정부는 선택이고 협치는 필수’라고 주문한다.

문재인도 당선하자마자 국민의당에 손을 내밀었다. “뿌리는 같은 정당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협력을 바란다.” 박지원도 협조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박영선 통합정부추진위원장은 바른정당에도 손을 내밀려 한다. “바른정당에 소속된 의원이라도 개별적으로 개혁 아젠다에 동의하면 (내각에) 임명될 수 있다.”

이런 “협치”는 가뜩이나 볼품없는 “적폐 청산”을 더 볼품없게 만들 것이다. 결국 문재인은 ‘개혁 없는 개혁주의 정부’, ‘개혁을 도로 빼앗아가는 개혁주의 정부’가 될 것이다.(이 점은 〈노동자 연대〉 신문이 그동안 누차 경고해 왔다.)

동아시아 긴장 고조 상황도 문재인 정부를 압박할 것이다. 문재인은 북한 핵 프로그램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트럼프를 상대해야 하고, 사드 배치 문제로 냉랭해진 중국과의 관계도 풀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친미적 자주”라는 모순된 말을 하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결국 한국 지배계급의 전통적 외교 정책인 한미동맹 체제를 지지했다. 노무현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고, 한미FTA 협상을 시작했다.

심상정 후보, 최근 진보정당 역사상 최다 대선 득표

“진보정치의 지반을 확장”한 심상정 정의당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사표 논리에도 불구하고 무려 2백1만 7천4백58표(6.17퍼센트)를 득표했다. 진보 정당 최다 대선 득표다.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가 얻은 95만 7천1백48표(3.9퍼센트)보다 갑절 이상으로 는 것이다.

선거 막바지에 심 후보의 인기가 치솟아 자못 기대치를 높였던 일부 정의당 지지자들은 실망감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홍준표가 문재인을 “친북 좌파”(!)라고 비난할 정도로 한국의 공식 정치 지형은 우경화돼 있다. 게다가 민주당은 “정의당 지지는 다음 선거에 해도 된다”며 ‘사표론’을 자극했다. 그런데도 2백만 명이 정의당에 투표한 것은 대중의 진보 염원이 강력함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우리 정의당의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심 후보의 말이 더 현실에 부합해 보인다. 출구조사 결과가 10퍼센트에 미달하는 것으로 발표되자마자 3시간 30분 동안 4천 명이 1억 5천만 원이 넘는 후원금을 당에 보냈다.

민주노총이 평했듯이, 심 후보의 “약진”은 “진보정치의 지반을 크게 확장”했다.

촛불 운동이 매우 컸던 덕분에 정의당이 민주당 왼쪽에서 선거적 돌파구를 낼 수 있었다. 과거 대선들에서 진보·좌파 후보들은 악의적으로 무시당하거나 유력 후보들 보도 후에 “한편, 000 후보는 ~했다”는 식으로 지나가듯이 취급됐다. 그래서 “한편” 후보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언론들도 심 후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노동”을 앞세운 심 후보의 선거 성적은 진보·좌파 진영 내에서 유행하는 노동운동 고립론이나 진보 정치(정당) ‘위기론’이 기우이거나 착각임을 보여 준다.

정의당이 이번 대선에서 갑자기 부상한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하에서 노동자들이 조금씩 저항을 건설하면서 그 정치적 표현으로 정의당 지지가 늘었다. 그래서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정의당이 상당히 전진했다.

도약의 계기

퇴진 운동 과정에서도 정의당이 진보·좌파 가운데 가장 큰 득을 봤다. 그 탄력으로 심상정 후보가 “노동”을 강조하며 대선에 출마했다.

심상정 후보는 홍준표의 친시장 노동조합 적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와 동시에, 민주당의 어정쩡하고 소심한 중도 정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문재인의 증세 없는 복지를 폭로했다. 동성애 혐오감을 드러낸 문재인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심 후보의 인기를 치솟게 했다. 여론조사들에 따르면, 심 후보는 노동-20대-여성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심 후보의 마지막 유세 주제도 청년과 노동이었다. ‘청년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노동이 당당한 대한민국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가자.’

정의당은 민주당 정부에 참여하지 말아야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정의당사를 방문한 문재인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정의당 지도부는 협력의 매개 고리로 아마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 결선투표제 도입을 염두에 두는 듯하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에 다소 도움이 될 법들이다. 기성 정당들은 진보 정당의 원내 입성을 막으려고 이 법들의 도입에 미온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당과의 협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한 문제일까?

이와 비슷한 상황이 2004년에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총선에서 10석을 획득했다.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4대 개혁 입법’ 현실화를 위해 국회 내에서 열린우리당(민주당의 전신)과 동맹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열우당의 개혁 회피 시도에 침묵하거나 “열우당보다 딱 한 뼘 더 나가 있었을 뿐”(〈매일노동뉴스〉 2007년 1월 23일치)이었다.

그러다 보니 “열우당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투표 동기를 부여하지 못했다. 그 결과 열우당-한나라당의 양당 정치 체제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심상정 후보가 민주당 정부와 공동 정부 구성 의사를 밝힌 것은 걱정스럽다. 정의당이 공동정부에 참여한다면 민주당의 하위 파트너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민주당 정부는 머잖아 개혁 약속을 배신하고 노동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이때 정의당이 공동 정부에 참여하고 있다면 배신의 책임을 함께 지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정의당 지도부는 야권 공조에 스스로를 긴박해, 민주당·국민의당과 함께 철도 파업 종료를 종용한 바 있다. 정의당의 공동 정부 참여는 노동자 계급의 손발을 문재인 정부에 묶어 둬,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적폐 청산”과 개혁 입법 쟁취를 위한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은 문재인 정부에 환상을 갖지 않고 그에 철저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런 한결같은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이 진보화하면 정의당이 성장할 가능성도 커진다. 반대로, 투쟁이 저조해 대다수 노동자들이 사기 저하되고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면 정의당의 성장에도 부정적일 것이다.

정의당 좌파는 당 지도부의 공동정부 참여에 한사코 반대하며 당 밖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과 천대 받는 다른 사람들의 투쟁에 동참해야 한다.

공동전선을 이해하기

현대 자본주의의 상태가 개혁주의 노선의 핵심을 강타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개혁주의가 성과를 거두는 전략이 되려면 개혁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장기 호황 동안에는 이런 조건이 충족됐다. 그때만 해도 개혁을 제공하는 개혁주의였다.좌파는 개혁주의의 위기도 봐야 하지만 그 회복 능력에 대해 무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그렇지 못했다. 자본주의 국가를 인수해 사회를 개혁한다는 개혁주의 전략이 현실에서는 노동계급에게서 개혁을 회수해 갔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운동의 자발적 이데올로기로서 개혁주의가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흔히 노동조합의 협상이나 의회에 압박을 가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정치 운동으로서 개혁주의는 계속 존속할 수 있다.

경제 위기일지라도 개혁의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 것도 아니다. 유급휴일이 처음 입법화된 것은 대공황 때인 1936년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거대한 공장점거 파업들이 일어나 정부와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다.

동력

따라서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개혁을 위한 투쟁을 지지한다. 이 투쟁을 통해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데 필요한 동력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궁극으로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에 기반해 국가 권력에 도전하지 않고는 개혁을 지킬 수 없다. 1백여 년 전에 점진적 변화 전략을 제안한 베른슈타인에 맞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바다.

이 전략에 따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정당과 공동전선 전술들을 구사해야 한다. 개혁을 제공할 수 있는 체제의 ‘객관적’ 능력이 약화됐을 때조차 많은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전통적인 개혁주의 조직에 충실하고자 한다. 공동전선은 이런 개혁주의 정당 지지자들과 함께 공동 투쟁을 하고 대중적 입증을 위해 그 속에서 참을성 있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다.

노동자들이 개혁주의의 한계에 도전할 능력은 오직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성공할 때 생겨난다. 이런 성공이야말로 사회 변화의 동력이 노동자들의 자체 행동에 달려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투쟁이 성공했다 해서 투사들이 자동으로 사회주의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정당 지지자들과 공동 투쟁을 하면서도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 관한 시각도 함께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