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목소리》 서평:
핵발전소 사고가 집어 삼킨 사람들을 생생하게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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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3분 58초, “[도심 한가운데] ‘붉은 광장’에 세워도 좋을 만큼” 안전하다던 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당시 바람의 방향 때문에 인접한 벨라루스 지역에 방사능 피해가 가장 컸다. 이 책은 벨라루스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체르노빌 참사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저자는 체르노빌 발전소 폭발 이후, 체르노빌을 비롯하여 세계의 여러 핵발전소들을 돌아다니며 답사를 했다.
책 소개에 따르면, 검열 때문에 초판에서 인터뷰가 제외된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은 체르노빌 참사 피해자들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버림받은 자들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후 인근 주민들에게 소개령(주민이나 물자 등을 분산시키는 명령)이 떨어진다. 체르노빌을 떠난 사람들은 “체르노빌레츠(체르노빌 사람들)”라 불리며 경멸당한다. 연애도 결혼도 쉽지가 않다. 아이를 낳고 싶어도 죄인 취급받는다.
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나 앞서 타향에서 쫓겨나 체르노빌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떠나지 않았다. 남아도 괜찮다는 과학자들의 거짓말에 속아 남은 사람들도 많았다. 소련 정부는 남아서 수습을 할 인력을 확보하고, 이전까지 비옥했던 그 땅에서 농작물을 계속 생산하려고 거짓말을 했다.
이 책에는 핵발전소 폭발 직후 수습을 하러 갔던 소방대원들, 군인들, 헬기 조종사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들은 방사능의 유출을 최소화 하려고 투입됐고, 소련 정부의 호소에 따라 자원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끔찍한 피폭을 당하지만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정보나 안전 도구조차도 지급되지 않았다. 이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치사량의 몇 배에 달하는 방사선에 피폭된 후, 말 그대로 지옥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누군가의 사랑하는 남편이자 가족이었던 한 소방관은 이제 “그 무엇도 아닌 방사선 오염물”로 취급됐다. 그의 아내는 “임신한 몸을 생각”하라는 의사와 간호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과 키스하고는, 곧 유산하게 된다. 피부 세포가 더이상 재생되지 않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 한 소방관의 시신은 마치 방사능 폐기물처럼 납과 콘크리트로 밀봉돼 매장된다.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뒷수습을 하러 간 군인들은 자신들이 복무해 온 소련 국가와 그 지배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군인들은 “미국이 침략할 것에 대비해야”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기관총을 지급받았다. “서방의 음모”에 의해 전시상황에 놓여 있고, 핵전쟁의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체르노빌 발전소로 가서 한 일은 모든 걸 땅에 묻고, “핵을 삽으로” 푸는 일이었다.
자신이 방사능에 얼마나 노출됐냐고 묻자 폭행이 가해졌다. 군인들은 의료기록도 받을 수 없었고, 나중에 이를 요청하자 “서류가 방사선에 오염됐기에 파기했다”는 어이없는 답을 듣는다. 어떤 대령은 “그가 원자로 위에서 받은 방사선 수치가 기록된 카드에는 7렘[방사선 단위]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6백 렘”에 노출된 것이었고, 결국 죽었다. 체르노빌에 갔다 온 군인들은 제대하기 전, 소련 정보기관 KGB의 요원에게 소집돼, “본 것에 대해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다.
한 군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숨길 수가 없었다. 아마 3~4년이 지나 하나, 둘 아프기 시작하고, 누군가 죽고, 미치고, 자살했을 때, 그 때 의심하기 시작했다. … 부모님께는 체르노빌에 간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다. 형이 우연히 〈이즈베스티야〉 신문을 사서 내 사진을 발견하고는 어머니께 가져갔다. ‘보세요! 영웅이에요!’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셨다.”
소련 정부는 후발대로 공산당원들을 투입한다. 이들은 군인, 경찰, 연구원, 영화 감독 등 다양했다. 정보가 통제되고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체르노빌에 간다는 것이 자살행위라는 점은 명백해지고 있었다. “억압과 책임감 두 가지”가 사람들을 체르노빌로 향하게 했다. 체르노빌로 당장 가든지 아니면 공산당원증 반납하라는 협박이 뒤따랐다. 25일만 있다가 오면 된다는 등 거짓말도 부지기수였다. 고통을 호소하고 복귀를 요청해도, 당국은 새로운 인력을 쓰는 데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이유로 이를 묵살한다.
다른 곳보다 훨씬 큰 돈을 주겠다는 유혹에 체르노빌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 예정된 매우 위험한 일을 맡았다. 소련 정부는 이들에게 후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책임 방기와 거짓말
소련 정부는 안전한 핵발전을 말했다. 평화로운 핵과 군사적 핵을 구분해야 한다고도 했다. 각종 경고는 무시됐고 대비는 소홀했다. 체르노빌 참사 5년 전, 벨라루스 과학 아카데미의 “저준위 방사선과 내부피폭 전문가” 사무실이 폐쇄되고, 연구실이 축소되며 박사들은 은퇴해야 했다. 핵사고가 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핵발전소가 폭발하자 공산당 지역위원회 관료들은 구조의 책임을 방기했다. 갑상샘을 보호하기 위해 요오드액을 공급해야 했지만, 문제없다며 무시했다. 한 공산당 관계자는 뻔뻔하게 언론에 대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핵폭발, 핵 구름에 있다는 방사선이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그냥 뭐, 저녁에 포도주 한 병씩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자신들은 요오드를 복용했고 자녀들을 체르노빌에서 먼 곳으로 이주시켰다. 관료들을 위한 가축은 외곽 지역에서 특별히 사육됐다.
이런 자들을 비판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해고와 폭력 협박을 받는다.
소련 정부는 음모론을 뒤섞어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은 서방의 음모와 관련 있다는 식이었다. 방사선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당 지역 위원들이 “소비에트 인민의 영웅성, 군사적 용기의 상징, 서양 정보원의 음모”에 대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 방사선 전문가는 대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협박이 가해졌다. 핵발전소 관리자들은 체포됐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발전소에서 겨우 3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잔뜩 피폭된 낙농공장은 계속 가동됐고, 여기서 생산된 우유는 원산지를 알 수 없도록 스티커를 뗀 후 판매됐다. 국가가 나서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언론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참사 이후 며칠 동안 TV에 모습을 안 보이던 당시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이내 “다 괜찮고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방사능 측정기가 어떤 수치를 보여 주면, 신문에는 완벽히 다른 이야기가 실렸다”. 체르노빌에 대한 사건일자는 모조리 지워졌고 카메라 촬영이 엄격히 통제됐다. “KGB가 필름을 가져가”서는, “빛을 쏘여 못 쓰게 된 필름을 돌려줬다”. “비극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됐고, 영웅만 촬영하도록 허락”됐다.
과학자들은 주민들에게도, 군인들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의사들은 온몸이 아프다며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심기증”(병이 없는데 병이 있다고 착각하는 심리)이라고 일축했다.
심지어 소련 정부는 “파라스크라는 유명한 마법사”를 불러 방사선을 낮추고 피폭된 사람들을 치유하려는 우스꽝스런 시도도 했다. 결과가 형편없자 그 마법사는 곧 어딘가로 수감됐다.
당시 유행한 ‘블랙 유머’는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보여 준다.
“누가 ‘7 곱하기 7은 얼마예요?’라고 물으니까, ‘그건 체르노빌 사람이 손가락 펴서 보여 줄 거야’라고 하네. 하하하.”
체르노빌은 소련 공산당의 지배가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했다. 정부가 그토록 안전하다고 떠벌려 온 핵발전소가 폭발하고 정부는 사람들을 방사능 피폭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다.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경외는 더 이상 없었다.
참사 3주기가 되던 날, 사람들 사이에서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와 벨라루스에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오버랩
이 책은 다양한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체르노빌 참사를 재구성해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소방대원인 남편을 피폭으로 잃고 아기도 잃은 여성, 스탈린 시절도 스타하노프 운동에서도 우수노동자로 살아남았다는 자부심으로 피폭 지역에 잔류하며 방사능의 공포를 견디는 노인, 사람들이 키우던 동물들을 하나하나 사살하고 묻으면서 죄책감을 느낀 사냥꾼들, 주민 소개령을 수행하고 와서는 2급 장애인이 된 군인, “심장이 1.5배, 신장이 1.5배, 간이 1.5배 커진” 아이를 낳아야 하는 핵발전소 해체작업자의 아내, 자신을 살해해 줄 것을 부모에게 부탁하는 어린 아이, 무턱대고 스탈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체제 수호자, 혼란스럽게 변명하는 공산당 지역위원회 일등서기관 등…
책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의 경험담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와도 오버랩된다. 세월호 참사는 대학생인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과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이 체제의 민낯을 보여 주었고, 전개 양상이 꼭 닮았기 때문이다. 체르노빌 참사도 소련 사회의 민낯을 보여 줬고 거기 어디에도 '노동자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는 없었다.
체르노빌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사람들은 자신이 겪었거나 알고 있는 가장 끔찍한 사건들에 견줘 체르노빌을 이해했다. 대부분 그것은 소련이 치른 전쟁과 학살의 경험이었다. 독일과의 총력전, 스탈린의 대숙청,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지금도 핵발전소로 돈을 벌고 핵발전소를 짓는 자들은 말한다.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한국만 해도 핵발전소를 더 짓고 있고 오래된 핵발전소조차 폐기하기를 극도로 꺼린다. 이미 인류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비롯해 핵발전소 사고를 여러 차례 겪었는데 그 때마다 사고에는 전혀 책임이 없는 노동계급과 평범한 민중이 피해자가 됐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2005년 벨라루스 신문에 실린 한 기사를 보여 준다. 이른바 “핵 관광”이라 불리는, 체르노빌 관광상품을 ‘쿨하게’ 묘사하는 기사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그 자손들을 지옥 같은 고통 속에 빠뜨린 체르노빌 참사는 어느새 “가격도 매우 매력적”인 관광상품이 돼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도 곧 상품이 된다.
작가는 묻는다. 천문학적인 수의 인간 목숨을 담보로 짓는 핵발전을 어떻게 감히 ‘가장 값싼’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절규는 가장 강력한 반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