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은 ‘자주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자리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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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 문재인이 트럼프를 만나러 미국에 간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자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확고히 협력한다는 약속을 문재인한테서 받아 내려 할 것이다.
집권 두 달도 안 된 시점에서 문재인은 대외 문제에서 큰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장기화하는 세계경제 침체 속에 단지 기업 간 경쟁만 치열해지는 게 아니다. 미국·중국·러시아 등 자본주의 강대국 간 경쟁도 점증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 와중에 대통령이 됐다. 그는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려면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해 미국 자본, 특히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환율과 무역장벽 등을 놓고 중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독일 같은 서방 동맹국과도 이익 충돌을 불사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 경제 정책은 군국주의 강화와 쌍을 이룬다.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그는 핵무기 현대화를 비롯한 군비 증강 계획을 내놓으라고 국방부에 지시했고, 국방예산 증액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트럼프의 등장은 동아시아에서도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그는 보호무역 강화를 위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했다. 그러자 중국은 이 상황을 이용해 역내 경제 질서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려 한다. 그러나 중국이 동아시아 경제 질서를 주도하도록 미국이 방치할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정부의 군국주의가 중국의 군사력 강화를 겨냥한다.
트럼프 집권 이후 동아시아에서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 더욱 점증할 것이다. 그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트럼프는 문재인이 협력하기를 바라고, 한반도의 여러 문제도 (미국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아시아·태평양 패권을 유지·강화하는 문제와 연계해서 생각한다.
북한 압박
6월 3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에서 미국 국방장관 매티스는 북한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라고 불렀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새 대북정책 타이틀은 “최대한의 압박과 관여”인데, 지금 방점은 “압박”에 찍혀 있다.(이것이 최근 북한이 잇달아 미사일을 발사하는 배경이다.) 계속 북한 ‘위협’을 과장해 중국을 견제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나중에 북한과 협상을 하더라도 매우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겠다는 심산인 듯하다. 물론 협상이 시작돼도 온갖 부침을 겪을 공산이 크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정부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대북 정책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추라고 요구한다. 이게 5월에 미국 정부 대표단이 문재인을 만나러 온 주된 목적이었다. 특히, 미국 국무부는 “[북한 관광은] 북한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의 자금원이 될 수 있다”며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을 모색하는 문재인 정부에 견제구를 날렸다.
이미 문재인은 대북 정책에서 미국에 타협하기 시작했다. 5월 30일 일본 총리 아베와 통화하며 북핵 문제를 ‘선先 대북 제재, 후後 협상’으로 풀어가겠다고 밝혔다. “지금은 북한과 대화할 시기가 아니라 제재와 압박을 높여야 할 시기[다.]”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방송 〈미국의 소리〉는 이를 두고 “트럼프의 대북정책 기조와 큰 틀에서 일치한다”며 반색했다.
6월 2일 유엔 안보리는 처음으로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새 대북 결의에는 기존 제재를 더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문재인 정부는 결의안 채택 직후 이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6월 3일 한·미·일 국방장관회의에서 한·미·일 3국은 북한한테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방식(CVID)”으로 포기하라고 촉구했다. 이른바 ‘CVID’는 부시 정부 때부터 미국이 북한에 굴복을 강요하며 들이미는 카드다.
이렇게 문재인이 집권 초부터 계속 트럼프의 대북 정책 보조 맞추기에 급급하면, 북한의 반발만 부르며 남북 관계 개선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중국 견제
문재인 정부는 ‘동북아책임공동체 구축’을 공약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를 많이 의식한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대중국 견제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한·미·일 국방장관회의에서 한·미·일 3국은 “항행과 상공 비행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가 동의해 준 이 문구는 미국이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서 중국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한·미·일 국방장관들은 “정보공유 증진, 활발한 3자 연습 시행, 상호운용성 발전” 등 3국 군사 협력을 강화한다고도 했다. 이것은 특히, 사드를 비롯한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구축에 한국이 협력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물론 이런 문구들은 대체로 기존 합의를 재확인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회의들을 거치면서 문재인 정부가 한·미·일의 기존 안보 합의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미·일 국방장관회의의 논의 결과는 6월 말 한미 정상회담에 고스란히 반영될 것이다.
지금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사드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드 배치는 어느새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문재인은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딕 더빈에게 “전임 정부의 결정이지만 … 결코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말해, 사드 배치 결정을 뒤집을 의향이 없음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는 이렇게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 스스로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너무 강하게 갇혀 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핵 문제, 한미동맹 강화, 무역(한미FTA 재협상!)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진다고 알려졌다. 당선 후 한 달 가까이 문재인 정부가 보인 행보를 보건대, 진보 진영 일각에서 기대하는 ‘자주 외교’를 이번 정상회담에서 보기 힘들 것 같다. 오히려 문재인이 트럼프의 동아시아 정책에 큰 틀에서 협력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공산이 크다. “사진 찍으러 미국 가지 않겠다”던 노무현은 2003년 첫 방미 때 “미국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 모른다”고 해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던 일이 있었다.
지금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자주국가인 대한민국의 권리를 본때 있게 주장하라”고 당부할 일이 아니다. 연목구어인 것이다. 오히려 트럼프 정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협력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해야 한다.
문재인, 슬금슬금 사드 배치 기정사실화
문재인이 “충격적”이라고 말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사드 발사대 4기 보고 누락’ 사태는 용두사미에 그칠 듯하다. 청와대가 스스로 사태를 봉합하려 한다. 미국 눈치를 보느라 서둘러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청와대는 사드 배치를 재검토하고 환경영향평가도 제대로 하겠다고 했다. 이를 두고 주류 언론들은 사드 신속 배치에 “제동”이 걸렸다고 보도한다. 그러나 환경영향평가 진행과 관계없이, 앞서 배치된 레이더 등은 정상 가동될 것이다! 청와대는 환경영향평가 중에 사드 장비의 가동을 중단할 계획이 없다고 못 박았다.
문재인 정부는 중국을 의식해 시간을 벌려고 애쓴다. 하지만 사드 배치 자체를 취소할 생각은 애당초 없는 것이다. 청와대가 사드 문제는 이미 안보 당국자들끼리 얘기된 사안이니 정상회담 의제에서 빼자고 미국에 요청했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정상회담 ‘성과’ 홍보가 퇴색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듯하다.
앞으로 사드 운용 비용에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이 사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드 비용을 사실상 한국 정부가 부담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 일에 정부가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와대 안보실장 정의용은 사드 배치를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재검토가 “한미동맹의 기본 정신에 입각해 진행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한·미 당국은 사드 배치가 “한미동맹 차원의 결정”이라고 했다. “한미동맹 차원의 결정”을 “한미동맹의 기본 정신”에 따라 재검토하면 어떤 결론에 이르겠는가.
노무현은 갈수록 친미로 기우는 자신의 외교 노선을 “친미적 자주”라고 포장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는 무슨 재치 있는 궤변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성주에서 사드가 가동되면서 인근 주민들은 벌써 “온 마을이 보일러실 된 기분”이라며 소음 피해 등을 호소한다. 앞으로 사드 문제에 관한 배신은 단지 성주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훨씬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