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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중간파와 김구의 길’이 대안이었을까?

[편집자 주] 올해는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동안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해석은 미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 남한 정권 지지인가 북한 정권 지지인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나뉘어 왔다. 이것은 서로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이런 역사관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분노, 저항이 부차적이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입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다함께〉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이 그 다섯번째다.

해방 공간에서는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열망이 강력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압도 다수가 대안 체제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했음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국여론협회의 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 7천7백9명 중 50퍼센트가 좌우합작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대체로 분단만은 피해야 한다는 열망의 결과다.

또한 격변의 시기에도 개량주의 의식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중간파는 이런 이데올로기 지형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모순 때문이기도 해서, 중간파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질적이지 않았다. 다만,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민족통합을 위해서 좌파와 우파가 타협해야 한다는 생각 정도로 모아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중도우파로 분류되는 김규식은 1947년 신년사에서 일부 세력이 “친미반소 또는 친소반미에 의한 독점 정권을 망상하고 있는데, 이 두 노선은 자주적 입장을 망각한 것이고, 민족적 통일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재홍의 ‘중앙당’ 논리도 비슷했다.

문제는 미·소 양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저항하겠다는 것을 뜻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중도좌파인 여운형은 이것을 ‘평화적 투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조선 문제에 관한 미·소의 일치를 촉진”하자는 것이고, 이를 위해 좌파와 우파가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계급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운형은 당시 영국의 애틀리 노동당 정부를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인민당은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는 못했다. 그리고 당시 영국 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제2차세계대전 직후 노동자들의 급진화 때문이었다는 점도 잊은 듯하다.

안재홍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선에서는 혁명이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일제시대 자본가·지주는 노동자·빈농 들과 똑같이 수탈당했기 때문에 “계급대립이 없다”는 것이다.

중간파의 생각은 현실에서 벌어진 두 가지 차원의 양극화 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다.

먼저, 이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제국주의 열강의 협상에 의존했다. 중간파는 다른 정치세력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시작되기 전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삼상회의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곧 입장을 바꾼다.

이른바 ‘현실론’인데, 일단은 어쩔 수 없지만 받아들이고, 미·소의 협상 속에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되면 그 후에도 신탁통치를 거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과 소련은 서로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미·소 양국군 모두에 저항하지 않고 그들의 협상을 촉구한다는 생각은 공상이었다.

두번째로 중간파의 계급협조 노선은 첨예하게 양극화하던 계급투쟁의 현실을 무시했다.

이 점은 해방된 지 며칠 만에 드러난 문제였다. 패망한 일본이 안전판으로 내세운 여운형의 건국준비원회(건준)는 초계급적 민족통합체를 표방했다. 그리고 민중에게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급진적 분출을 완충하려 했다.

그러나 우파는 건준이 지나치게 좌익적이라며 참여하지 않았고, 건준에 참여한 송진우 등의 우파도 미군이 진주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재빨리 탈퇴해 버렸다.

한민당 등의 지주세력은 토지개혁에 극렬하게 반대하며 조그마한 개혁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우익은 좌우합작위원회가 제시한 ‘합작 7원칙’의 온건한 토지개혁 조치조차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미소공위 국면에서 미국은 취약한 지배 기반을 넓히고 공산당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간파를 중심으로한 좌우합작을 지원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통해 단독정부를 뜻하는 과도입법기구를 설치하려 했다.

미국의 중간파 지원 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중간파는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공격받았다.

소련과 북한은 남한의 좌우합작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고, 미국의 과도입법기구 수립에 맞서기 위해 인민위원회로의 정권이양을 내걸 것을 공산당에 지시했다.

게다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봉기는 중간파가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매우 협소함을 보여 줬다.

중간파는 이런 두 가지 차원의 양극화 때문에 꾸준히 세력을 잃어갔다. 특히 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분단이 최종적으로 확정될 때에는 거의 의미 없는 세력으로 전락했다.

동시에, 이것은 미국의 지배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 준 것이기도 했다. 극우파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었고, 종종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중간파를 이용해 지배 기반의 외연을 확장하려 했지만 이조차도 실패했다. 1948년 들어 미국의 위기의식은 극에 달했다.

이들 중간파들과 달리 김구는 철저한 극우파 정치인이었다. 다만, 이승만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이후 북한과 뒷북치는 협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만, 중간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가 전투적인 항일투사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사상은 근대적이거나 민중적이기보다는 근왕주의적 위정척사 사상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좌파의 국제주의를 “사대주의”라고 비난하며 어떠한 연대도 거부해 왔지만, 1920년대 이승만이 미국에게 조선을 통치해 달라는 청원 사건(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귀국한 그가 처음 한 일은 이승만­한민당 세력과 연대해 우파 블럭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 청산 문제도 회피했다.

“우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전후가 동일[하다.]”

그리고 친일 자본가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를 자신의 한국독립당 재정부장에 앉혔다.

그가 친일파 처단을 본격적으로 외친 것은 1945년이 아닌, 1948년 이승만-한민당 세력과 결별한 이후였다.

그는 반탁운동을 자신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정권을 획득하는 것에 이용하려 했다. 예를 들어 ‘신탁관리 배격 각정당 대표자대회’의 첫번째 요구는 ‘반탁’이 아니라 “연합국에 임시정부 즉시 승인을 요구함“이었다.

그가 반탁운동을 제국주의 점령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급진화시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김구의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30일 포고문을 발표해 “미 군정청 산하의 모든 한인 직원들은 임정의 지휘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미군정에 대한 이런 쿠데타 시도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는데, 미군정의 하지는 “김구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여 야단을 쳤”고 김구는 국민들에게 “신탁통치에 반대할 뿐 군정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뒤로 물러섰다.

그가 일관되게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함으로써 사실상 단독정부 수립의 길로 나아갔는데도, 김구는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가 “38선을 베고 죽겠다”며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운동에 나선 것은 이승만과 미군정으로부터 버림받은 후였다.

그의 극우파적인 본질은 노동자·민중 운동과의 관계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항일운동 시기 동안에도 대중적 민중 운동에 의지한 적은 없었다. 이승만조차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을 정도로 테러야말로 그의 주된 무기였다.

해방 후 그의 테러는 1946년 김일성을 살해하려는 시도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주로 좌파 활동가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집중됐다. 그가 비호했던 우익테러 조직은 전평의 9월 파업과 대구의 10월 인민항쟁에서 그 잔혹성을 널리 떨치기도 했다.

한편, 김구에게는 좌익적 액세서리가 하나 있었는데, 독립노농당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그것이다. 해방 공간에서 이들의 행동은 하나의 희극적 비극이라 할 만하다.

이들은 올바르게도 미군과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본을 대신한 점령군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천에서는 김구의 임시정부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다. 그들은 김구의 임시정부가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 이라며 김구의 노선을 칭송했다.

게다가 아래로부터 급진화하는 대중 운동에도 적대적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노동자자치연맹은 말로는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를 내세웠지만, 동시에 “[개인의]공장 소유권”을 인정하는 이율배반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우익 깡패집단으로 구성된 대한노총과 통합해, 전평을 분쇄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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