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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박근혜 퇴진 촛불 1년: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우파 정권을 쫓아내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가장 크고 중요한 거리 운동의 하나였다. 다섯 달간 이어진 주말 촛불 집회에 연인원 1700만 명이 참가했다.

무엇보다 대중 스스로 투쟁해 (물론 헌법재판소의 탄핵 절차를 거쳐) 박근혜를 권좌에서 쫓아냈다. 1960년 4월혁명 이후 56년 만에 대통령이 민중의 힘에 밀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내려왔고 곧 구속됐다. 주요 정권 실세들과 삼성 이재용 등도 구속됐다.

운동은 이런 가시적 성과뿐 아니라 대중의 의식과 조직에도 퇴적물을 남겼다. 촛불 참가자들이 “광장에서 함께 느낀 벅찬 감정은 ‘승리’의 경험과 합쳐”져 “가능성, 자신감 등의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회 등 집단적 힘이 필요하다는 응답자 비율이 59.5퍼센트였다.

노동자들이 퇴진 촛불의 초기 견인차 구실을 했다. 덕분에 민주노총 조합원 수가 증가했다. 지난 1년 동안 10만여 명 늘었고 그중 비정규직 조합원이 3만여 명에 이른다.

퇴진 운동의 건설을 좌파 진영이 발의하고 주동성을 발휘한 것을 감안하면, 우파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던 이 운동이 승리를 거둔 것의 의미는 남다르다.

퇴진 촛불은 허공에서 타오른 게 아니다

지난해 10월 29일 첫 박근혜 ‘퇴진’ 촛불 집회를 주최한 것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였다. 이른바 최순실의 태블릿PC가 보도된 지 일주일도 채 안 돼서였다.

좌파 진영이 박근혜 퇴진 요구를 채택해 대중의 분노를 대변하며 촛불 집회를 개최했다. ‘노동자연대’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에 제안해 시작된 촛불 집회는 즉시 거리 운동으로 발전해 박근혜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이는 이명박·박근혜 우파 정부의 반노동·반민중적 반동에 맞서 노동단체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분노와 저항의 초점 구실을 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퇴진 촛불 초기에 온건진보파들은 박근혜 퇴진을 내걸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노동단체와 좌파진영의 신속한 초기 노력 덕분에 박근혜 퇴진 촛불은 첫날 청계천광장에서 3만여 명으로 시작한 지 겨우 2주 만에 경복궁부터 남대문까지를 뒤덮는 130만 촛불 집회로 성장했다. 특히, 11월 12일 민주노총 주도의 민중총궐기 시위가 대중 운동 분출의 기점이 됐다.

이런 비약적 성장은 박근혜 퇴진 촛불이 경제 위기와 불평등, 세월호 참사, 전방위적인 노동개악 시도 등에 대한 불만과 저항으로 터져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2016년에도 퇴진 촛불 직전까지 “노동계 파업으로 인한 근로손실일수가 9월 현재 지난해보다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10년간 최대 수치”(〈매일노동뉴스〉)였다.

이런 투쟁들 속에서 정치 의식의 진보화가 이뤄졌고 마침내 박근혜가 총선에서 참패했다. 이런 변화 덕분에 한편에서는 분노가, 한편에서는 싸워 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빠르게 자라났다.

이 운동이 ‘정치적 지도’(실제로는 노동운동과 좌파의 주도력을 가리키는 용도로 쓰인다)와 대립됐던 것인 양하는 주장은 상황에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촛불 참가자들은 민주노총 노동자들과 좌파단체들에 거부감을 보이기는커녕 처음부터 큰 신뢰를 보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했고, 총파업 호소에 연호했다. 이 점이 2008년 촛불과 매우 다른 점이었다.

박근혜 퇴진 촛불의 점화는 박근혜 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온 세력들의 의식적인 계획과 대중의 불만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퇴진 요구 채택과 첫 집회 개최, 그리고 박근혜정권퇴진국민행동의 결성과 활동까지 박근혜 퇴진 운동 과정은 여러 정치 경향들이 협력 속에서 벌인 치열한 정치적 논쟁과 의식적 선택의 연속이었다.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적했듯이 “운동을 안에서 보면 거기에는 운동을 이끌려는 수많은 단체(개인)들의 시도가 들어 있[었다.]”

변화의 진정한 동력이 대중 투쟁에 있음을 보여 준 박근혜 퇴진 촛불 ⓒ사진공동취재단

2008년 촛불과 달랐다

퇴진 운동의 초기 주도 세력뿐 아니라 운동 참가자들의 사회적 구성도 2008년과 달랐다. 이 점이 다른 운동 발전 과정과 다른 결말을 만들어 낸 운동의 핵심 특징들이기도 하다.

참가자의 압도 다수가 노동계급 성원들이었다. 물론 “이번 촛불시위에 가장 많이 참여한 계층이 전문가+상위소득층”이며 월 소득 5백만 원 이상의 “교양 시민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1백만 시위가 벌어진 날 참가자들의 사회적 구성을 보면, 노동자 58.5퍼센트, 대학생·청년 24.5퍼센트, 자영업 16.2퍼센트였다.(〈오마이뉴스〉, ‘100만 집회 참가자 66% “11월 26일에도 간다”’) 청년도 미조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집회 참가자의 다수는 노동계급 소속이었다.

노동자들의 퇴진 운동 대거 참가는 여러모로 고무적이었다. 이는 우파 정권 9년간 추구한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노동계급 다수가 행동으로 거부 의사를 표출한 것이다. 이는 또한 고통 전가에 앞장서 싸워 온 조직 노동운동의 위상과 대표성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부분적으로 이 운동은 박근혜의 부패뿐 아니라 한국 사회 곳곳의 불평등을 광장으로 끄집어냈다.

노동계급이 다수 참가했다고 대중운동의 커다란 장점인 다양성이 훼손되거나 위협받지도 않았다. 자신의 힘에 고무된 노동계급 대중이야말로 진정한 개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또한 광장의 촛불은 민주노총의 총파업 호소에 환호했다. 파업 철도노동자들은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퇴진 운동이 성장하는 상황을 이용해 투쟁을 벌인 노동자들(창원GM비정규직, 이화여대 경비노동자)이 승리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성기업 기업주가 구속됐다. 퇴진 운동 안에서는 최저임금 1만 원 같은 요구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12월 초순 국회 탄핵 직전에 민주노총의 조직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노동계급 고유의 경제적 힘을 발휘하는 수단인) 파업을 벌였다면 폭넓은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랬다면 운동에 새로 참가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자극하며 좀 더 급진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못하고, 그러기는커녕 퇴진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철도 파업이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직전에 철도노조 지도부 등 개혁주의자들의 파업 중단 노력으로 종료됐다.

개혁주의

이는 노동자 파업 투쟁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 파업이 더 강력해지고 확산될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에 민주당과 정의당 등이 파업 종료를 종용하고, 결국 많은 노조 지도자들도 파업 중단을 지지한 결과인 듯하다.

결국 12월 9일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서서히 민주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퇴진운동 안에서도 온건개혁파들이 강화됐다.

그들은 좌파와 노동운동의 초기 주도력을 가져가려는 노력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그들의 온건화 노력은 친박 세력의 반동적 저항과 그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 거듭되는 상황 전개 때문에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가령, 12월 10일 촛불 집회에서 나온 한상균 위원장 석방 발언을 문제 삼아 그들은 집회 연단에 노동 관련 발언이 너무 많아 순수 시민 참여가 축소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온건개혁파들은 퇴진행동이 노동개악 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강화하면 우파 측으로부터 역풍이 불고 이는 문재인 후보의 대선 득표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여긴 듯하다. 그래서 운동이 아래로부터, 특히 계급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어느 수준 이하에서 제한하려고 했다.

노동자연대는 온건개혁파들이 민주당과의 공조에 집착하는 것에 반대하며 노동계급의 행동이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실질적인 적폐 청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이 과제는 지금도 가장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수감 중인 한상균 위원장 자신이 “한상균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멈춰 달라”고 요청해 이 논쟁은 마무리됐다.

공공운수노조는 철도 파업 마무리 후에는 광장에서 ‘아무 깃발 대잔치’를 개최했다. 노동자들이 조직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자발적 시민”으로 참가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촛불 초기에 위세를 보여 준 노조가 그런 방식으로 운동 참가자들을 이끌려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운동 초기에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내걸고 광장에서 외치는 것이야말로 광장의 민주주의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제한적 태도들이 운동이 참가 대중의 정치의식에 미치는 효과를 제한했다. 운동이 넓어진 만큼 깊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운동이 남긴 퇴적물과 혁명적 좌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온건개혁파들은 투쟁의 표적을 “우리 안의 적폐 청산”에 맞추자고 한다. 인권엔지오 지도자인 박진은 “반상회를 찾아가고 노조를 만들고,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이야기를 나누자. 시민단체 한 곳 이상을 후원하고 독서모임과 영화 모임을 만들자”며 “이제 주어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도덕주의적이고 개체론적인 발상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때로 그 정부에 맞서 집단적 투쟁을 회피하는 논리로도 이용될 수 있는 주장들이다.

혁명적 좌파는 퇴진운동의 효과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이고, 노동자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실질적 힘을 보여줄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혁명적 좌파가 일터와 대학 캠퍼스에 더 크고 넓게 뿌리내리고 있다면 그 운동의 효과가 계급투쟁을 촉진하는 데에 일부가 될 것이다.

기여한 것도 별로 없으면서 지금 촛불의 수혜자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그 지지율을 유지하려고 스스로 촛불정부라고 칭한다. 하지만 지난 반 년 동안 문재인은 적폐 청산의 과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사드 배치처럼 적폐를 늘리고 있다.

박근혜를 쫓아낸 촛불은 현 정부와 그 정부의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행보보다는 더 폭넓고 깊은 변화를 바라고 누릴 자격이 있다. 노동계급 대중이 거대하고 완강하게 행동으로 나설 때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대중 행동을 위해 좌파는 개혁주의 세력과 함께 행동하면서도 이들이 행동하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할 때 때로 독자적으로 운동을 구축하고 전진시켜야 한다.

ⓒ조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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