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민주 항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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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 미국이 두려워하는 중동의 민주주의
3월 말부터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과 권력 세습 반대를 요구하는 대중 시위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무바라크는 1981년 당시 대통령 사다트가 급진 무슬림에게 암살된 뒤 24년 동안 계엄 통치를 해 왔다. 24년 동안 이집트 국가는 무려 2만 명을 살해했다.
최근에 조지 W 부시는 ‘중동 민주화’를 떠들면서 이집트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2월 중순에 무바라크는 대통령 선거에 한 명 이상의 후보가 출마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친미적인 무바라크 정권이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통제력을 잃게 될 경우, 아랍 세계에서 자신의 이익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사실, 부시 정부의 ‘민주화론’은 미국의 중동 지배 전략의 일부일 뿐이다.
미 국무부 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친서방 정당인 알가드[내일]당의 총수 아이만 누아가 체포됐을 때 즉각 항의했지만, 지난 수개월간 진행돼 온 노동자·농민의 생존권 투쟁에 대한 탄압 그리고 좌파와 무슬림 단체에 대한 정치적 억압에는 침묵을 지켰다.
미국은 친서방 야당이 사회운동의 갑작스러운 폭발을 통제하는 구실을 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보호하려 한다.
하지만 이집트 민주화의 진정한 동력은 부시나 친서방 야당이 아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무바라크는 ‘이집트 개혁을 위한 운동’, 일명 ‘키파야(이제 그만)’ 운동의 압력을 받아 왔다.
이 운동은 2000년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연대 투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 등 반제국주의 운동 속에서 탄생했다.
키파야에 참가한 대다수 사람들은 처음부터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았다. 이 점에서 레바논 ‘백향목 혁명’의 중간계급 시위대와 지향이 완전히 다르다.
한 시위자는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에 “진정으로 민주적인 이집트 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중동 정책, 특히 팔레스타인 정책에 반대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키 파야는 다양한 경향의 반정부 활동가들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다. 〈알아흐람 위클리〉는 “[키파야가] 비합법 정치 세력들, 특히 무슬림형제단이 30년 간의 온건 노선을 버리고 반정부 시위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대중적 저항의 탄생 이면에는 무바라크의 권위주의 정치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고통이 있다.
최근에 발표된 유엔 보고서를 보면, 7천7백만 인구 중 약 1천1백만 명이 기초적인 식료품을 구입하지 못한다. 실업자 수는 1천만 명이 넘는다.
이집트 노동자 운동은 1980년대 초반 사다트 암살 이후 정국에서 극심한 탄압을 겪은 후 오랫동안 동면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지난 6개월 동안 이전 5년 간 벌어진 파업보다 세 배나 많은 파업이 벌어졌다.
같은 시기에, 일부 농촌 지역에서는 대지주들이 국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1952년 토지 개혁으로 잃은 토지를 농민들에게서 강제로 빼앗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이에 맞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이집트 좌파들은 무바라크 퇴진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 계엄통치, 노동조합 통제 폐지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온건 야당들은 거리 투쟁보다는 집권당과의 협상에 의지하고 있다. 그들은 선거 제도 개혁에 머무르려 하고 있다.
물론 이집트 대중은 단순한 선거 제도 개혁일지라도 환영할 것이다. 오랜 권위주의적 통치를 떠올려 보면 이런 정서는 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투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이집트 국내 투쟁의 성장은 중동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커다란 힘을 실어 줄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이집트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의도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줄 수도 있다.
김용욱
카이로 반전·반세계화 회의 -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되다
3월 24일부터 27일까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저항과 함께 / 세계화, 제국주의 그리고 시온주의 반대”라는 이름으로 제3차 카이로회의가 열렸다.
이번 카이로회의의 핵심 주제는 이라크 점령과 이집트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었다. 이번 회의에는 모두 1천6백여 명이 참가했다. 2003년 회의 때보다 두배 이상 늘었다.
25 년째 독재가 계속되고 있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라크 점령에 반대하고 이집트의 진정한 민주주의 변화를 위한 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집트가 변화의 폭풍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아랍 지역에서 온 활동가들도 말로만 이라크 점령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학살을 비난하는 자국 정부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동안 서방 언론들은 이라크 저항세력이 분열돼 있다고 왜곡했다. 그러나 이번 카이로회의에서 시아파 지도자 하산 알 잘카니와 수니파 지도자 마지드 알 가우드는 한 목소리로 “시아파와 수니파는 하나다”라고 선언했다.
이번 회의를 성공적으로 만든 또 하나의 변화는 지난 회의 때만 해도 수동적으로 참가했던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이 회의에 적극 참여하고 토론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대거 참가했다.
이집트 반세계화 운동 활동가는 강제 폐간됐다가 최근에 다시 발행을 시작한 진보적 주간지 1면 하단에 실린 광고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3월 30일 이집트의 세 개 도시에서 열릴 키파야 운동 시위 광고였다. 그는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다며 자기가 난생 처음 보는 일이라고 했다.
‘세계화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농민’이란 제목의 워크숍에서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키파야 운동을 부양하는 이집트 노동자와 농민 들의 투쟁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 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모든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여러분의 투쟁을 전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남한의 민중들도 여러분처럼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탄압과 고문과 국가 폭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부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싸워 나가자.”
카이로회의 참가자들은 무슬림형제단이 조직한 반무바라크 시위에서 경찰이 거의 모든 참가자들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규탄 집회를 열고 “부시 타도, 블레어 타도, 무바라크 타도”를 외쳤다.
영국 전쟁저지연합 중앙위원이자 카이로회의 조직위원인 존 리즈는 세계 반전 활동가들에게 이집트 대사관에 항의하는 편지와 시위를 조직해 이집트 민주화 운동 활동가들과 연대 해 줄 것을 호소했다.
박준규
바레인 - 알려지지 않은 저항
최근 중동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조지 W 부시나 토니 블레어가 그것을 지지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일은 없었다.
3월 25일 수만 명의 시위대가 민주 개혁을 요구하며 바레인의 거리를 점거했다.
바 레인은 걸프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다. 그 나라에는 미 제5함대가 주둔하고 있다. 지배 가문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고 있고, 국왕 셰이크 하마드 알 칼리파는 아랍 지배자들 중 부시의 재선을 맨 먼저 축하한 자이다.
바레인 인구[73만 9천 명] 10명당 1명꼴인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3월 25일에 시위금지령을 어겼다. 시아파 저항 운동인 이슬람민족단결연합이 항의 시위를 호소했고, 좌파인 민족민주행동연합과 아랍 민족주의 단체들이 그 시위를 지지했다.
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아파 무슬림은 수니파 정권의 광범한 차별에 맞서고 있다. 시아파의 공민권 요구는 사회 변화와 미국과의 동맹 종식 요구들과 결합됐다.
바레인 인권운동가이자 작가인 압둘 나비 알레크리는 “그 시위는 헌정 개혁을 위한 저항 운동의 일부”라고 말했다. 헌정은 1975년 정권을 위협한 대중 시위가 있은 다음에 중단됐다.
25년 동안 계엄령이 지속됐다. 반체제 인사들과 야당 활동가들은 끌려가 고문받기 일쑤였다. 1999년 국왕이 죽자 그의 아들은 정치수 석방과 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나 변한 것은 거의 없다.
2002 년 4월에 미국 대사가 학생들에게 자살폭탄 공격으로 죽은 이스라엘인들을 위한 묵념 시간을 갖자고 요구하자 항의 운동이 폭발했고 미국 대사관이 불탔다. 한 시위대는 고무총탄에 맞아 죽었다. 학생들이 벌인 비슷한 항의 시위에서는 최루탄이 발사됐고, 50명이 넘게 부상당했다.
이나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