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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위안부’ 합의 2년:
제국주의가 저지르고 은폐한 ‘위안부’ 문제

12월 28일은 한·일 ‘위안부’ 합의가 나온 지 2년이 되는 날이다. 이 합의는 박근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등에 칼을 꽂는 배신이었다.

앞으로 서너 차례에 걸쳐 ‘위안부’ 문제의 쟁점들을 다룰 예정이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 ‘상호 비판 자제’ 등을 담은 ‘위안부’ 합의를 내놓자, ‘위안부’ 피해자들은 “우리를 두 번 세 번 죽이는 짓”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반면 그 합의 덕분에 일본 아베 정부는 고작 10억 엔(약 100억 원)만 들이고도 ‘위안부’ 문제가 "최종" 해결됐다고 우길 수 있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항의하는 수요시위 ⓒ이미진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피해 사실을 증언한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은 줄기차게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등을 요구해 왔다. ‘위안부’ 문제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끔찍한 전쟁범죄의 하나다.

제2차세계대전을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전쟁으로 보는 흔한 관점과는 달리, 이 전쟁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세력권 재분할을 놓고 격돌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이 전 세계에 들이닥쳤다. 전례 없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보호무역주의를 시행하고, 폐쇄적 무역 장벽을 쌓았다.

영국·프랑스·미국처럼 이미 방대한 지역을 지배한 국가의 지배자들은 대공황 속에서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처럼 식민지를 많이 확보하지 못한 국가들은 처지가 달랐다. 경제 위기에서 빠져나오려고 군비 증강에 개별 자본의 필요를 종속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세력권을 넓히려 했다. 1931년 만주 지방 점령(만주사변)은 그 시작이었다.

일단 발동된 영토 확장의 논리는 중국 본토로,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퍼졌다. 이는 중국의 영국·프랑스 조차지, 인도차이나 반도의 프랑스 식민지, 말레이 반도의 영국, 동인도제도(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필리핀의 미국 등 서방 제국들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37년 중일전쟁에서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금세 확산된 까닭이다.

전쟁은 노동계급과 서민의 일상을 파괴하고 참혹한 고통(가난, 굶주림, 죽음, 부상)을 겪게 한다. 여성을 강제로 성노예로 전락시킨 ‘위안부’ 제도는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면모다.

여성을 성노예로 만든 일본 국가

전쟁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면서, 일본 군부는 군대 내 위계 질서를 유지하려고 군인들의 불만을 달랠 수단이 필요했다. 전선이 확장돼 광활한 점령지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병들의 불만이 상관을 향해 폭발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역겹게도 그 조처의 하나가 식민지 여성을 군인들에게 ‘성(性)적 위안’으로 제공한다는 발상이었다. 군 지휘부는 ‘위안부’ 제도로 성병과 병력 약화도 예방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 군대(즉, 일본 국가)가 적극 나서서 ‘위안부’ 제도를 체계화했다. 일본군은 공식 지휘명령 계통을 통해 군 구성원 전용 ‘위안소’ 설치를 지시하고 여성의 징모를 명령했다.

일각에서는 납치·속임수·회유 등으로 여성들을 강제 동원한 주체는 민간 징모 업자들이라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시에 조선과 대만 식민지 등지에서 여성들을 대규모로 모아 국경을 넘어 동원한 것은 일본군의 적극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업자들을 선정하고 관리한 것도 일본군과 정부였다. 일본군은 ‘위안소’ 운영과 관리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위안부’ 전체의 절반 이상은 조선인으로 추정된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규모를 8만~2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위안부’ 여성들은 ‘위안소’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처음 성병검사를 당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어린 나이에 생전 처음 보는 군의관에게 성기를 보여야 했던 불쾌감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다음 벌어진 일은 더 끔찍했다. 폭행은 다반사였고, 군인을 상대하기 싫다고 반항하는 ‘위안부’들은 손가락이 잘리거나 전기 고문을 당하거나 담뱃불로 지짐을 당했다. 많은 여성들이 성병·결핵 등 질병에 걸리거나 아편 중독·임신·출산·낙태 등을 겪은 뒤 죽었다. 일본군은 낙태 시술을 하면서 아예 ‘위안부’의 자궁까지 제거하기도 했다. ‘위안소’가 없던 부대에는 ‘위안부’들이 이동해서 군인들을 상대해야 하기도 했다.

‘위안부’가 하루에 상대한 군인의 숫자는 최대 40~50명에 이른다. 사용한 콘돔을 버릴 시간도 없어 방안에 쌓였고 때로 부족하면 세탁해 재사용까지 했다고 한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지금도 ‘위안부’ 피해자들은 당시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일본군이 ‘위안부’의 목숨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는 패전의 기색이 짙었을 때 벌인 ‘위안부’ 학살이 보여 준다. 한 ‘위안부’ 피해자는 일본 병사들이 ‘위안부’ 여성 150여 명을 두 줄로 세운 다음에 목을 벤 끔찍한 상황을 증언했다. 전쟁이 끝난 후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해 증거(즉, 사람!)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명백히 일본 국가의 책임이다.


전쟁 이후, 미국이 일본 전범들을 구원하다

1945년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동아시아에 구축한 새 질서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의 범죄를 온전히 청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는 당시 미국의 전략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자국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재편하는 데 있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일본을 자유시장 자본주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러려면 일본 자본주의의 안정이 필요했다. 미국은 ‘천황’의 지위를 유지시켰고, 전범들을 정부 안으로 받아들였다. 종전 직후에 폭발한 일본 노동자 저항에 맞서 일본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일본이 식민지 민중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진실을 밝히는 데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일부 개인을 제외한 전범 대부분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미군 당국은 ‘위안부’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조사했지만, 이 문제는 일본 전쟁범죄를 다룬 도쿄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냉전이 본격화하자, 미국은 일본을 소련 견제를 위한 동맹국으로 키우기를 원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서둘러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다시 국제 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 조약을 맺을 때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당연히 ‘위안부’ 문제는 언급도 없이 넘어갔다. 대부분의 일본 전범들은 권력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한·일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도 미국의 개입이 있었다. 미국은 자국 패권을 위해 일본 중심의 동맹 체제를 구축하기를 원했고, 한국과 일본에 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경제 성장에 필요한 자금 확보가 절실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에 적극 호응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박정희 정권은 무상 지원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를 받는 대신, 식민지배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일본한테 약속했다. 민중의 고통을 헐값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는 제국주의 국가가 저지른 범죄다. 그리고 제국주의적·자본주의적 이해관계 때문에 진실은 오랫동안 은폐된 채 해결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는 한·미·일 동맹을 구축하려는 미국 제국주의가 관장해 나온 것이다. 오늘날에도 ‘위안부’ 문제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얽히고설켜 있고, 문재인 정부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눈물이 그치길 원하는 사람들이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대안을 찾아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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