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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과 중증외상센터 지원 청원:
공공외상센터와 공공병원 대폭 늘리고 의사 수도 대폭 늘려야 한다

‘권역외상센터에 추가적, 제도적, 환경적, 인력 지원’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12월 11일 현재 추천이 26만 6038건 달렸다. 최근 이국종 교수가 총상을 입은 탈북 병사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권역외상센터 지원을 호소한 것을 보며 한 시민이 제출한 청원이다.

한국에 처음 권역외상센터가 설치된 것은 2012년이다. 말만 많고 지지부진하던 외상센터 설립 계획은 2011년 이국종 교수가 석해균 선장을 치료해 살려낸 사건이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탄력을 받았다. 당시 그는 자신의 실력이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을 치료하면서 쌓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들을 살리려면 외상센터가 꼭 필요하다며 정부의 지원을 호소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지난 5년 사이 대부분의 권역외상센터는 적자와 인력난, 부실 운영으로 필요한 구실을 수행하지 못했다. 역설이게도 2016년에 권역외상센터 지원을 위해 책정된 예산 중 101억 원이 남았다. 정부 지원을 받아도 적자가 날 것이 뻔해 신청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문재인 정부는 이를 이유로 예산을 40억 원이나 삭감하려 했다.

외상센터 같은 필수 의료시설이 부족한 것은 근본에서 정부의 투자 부족 때문이다. 외상센터는 응급실과 달리 심각한 부상을 당한 환자들만을 대상으로 운영되는데, 일분일초가 생사를 가르다 보니 더 많은 의료진과 시설이 필요하다. 예측할 수 없는 환자에 언제든 신속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외상센터를 운영하려면 많은 대기 인력에게, 그것도 불규칙한 고강도 노동을 감수할만큼 충분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건강보험에는 민간 병원의 과잉 진료를 규제하려고 만든 장치들이 있다 보니 단순히 건강보험 적용만으로는 충분한 재원을 확보할 수 없다. 정말이지 ‘착한 적자’를 아낌없이 지출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런 시설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은 국가뿐이다.(사실 환자들 입장에서 보나 병원 노동자들 입장에서 보나 다른 모든 의료시설도 이렇게 되면 무척 좋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권역외상센터가 대부분 민간 병원들에 맡겨져 있다. 재정 지출을 최소화하려다 보니 정부가 새로운 시설을 만들기보다 기존의 민간 의료기관을 활용하려 한 것이다. 물론 이들 권역외상센터를 제대로 가동하려면 예산 삭감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청원은 무조건 지지할 만하다. 이번 논란이 불거지자 여당은 40억 원이나 삭감하려던 관련 예산을 오히려 212억 증액해 국회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정도의 지원으로는 사정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이국종 교수는 이번 예산 증액에 대해 “늘어난 예산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

먼저 정부의 지원이 여전히 불충분하다. 또 정부의 지원이 온전히 외상센터 운영에 활용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외상센터를 운영하는 민간 의료기관들이 의료진의 '대기' 상태를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외상센터에서 대기중인 전담 전문의를 다른 진료에 투입한 사실이 발견됐다.

정부가 직접 책임지고 운영하면 될 것을 애당초 수익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민간 병원에 맡겨두고는 규제를 어길 경우 예산을 삭감하는 '징벌'을 택하다 보니 생기는 모순이다. 거꾸로 외상센터 활성화를 위해 민간 병원에 충분한 수익을 보장하려면 정부는 필요 이상의 지출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민자고속도로처럼 말이다.

권역외상센터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외상 전문 의사의 부족이다.

한국은 애당초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OECD 꼴찌). 공공병원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민간 병원이 대부분이라 수익이 많이 나는 쪽으로 돈과 인력이 쏠린다. 서울 강남에는 피부과·성형외과 의사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지방에는 출산을 도울 산부인과 의사도 없고, 외상 환자를 치료할 외과병원도 없다. 정부는 권역외상센터 전담의사들에게 연간 1억 2000만 원씩 지원하지만 이런 상황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다른 과목을 전공해도 그 정도 수입을 얻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데다, 힘들고 의료 사고가 나기 쉬워 외과에 지원하는 전공의는 좀체 늘지 않는다. 권역외상센터 중 전담 전문의 인력 기준인 20명을 채운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외상센터가 제 구실을 하려면 지금처럼 재정을 찔끔찔끔 투자해선 안 되고 훨씬 많이 투자해야 한다. 더 나아가 정부가 공공병원을 대폭 늘리는 등 공공 의료 체계 중심으로 재편하고 의사·간호사를 포함해 의료 인력도 대폭 확충해야 한다.

키리졸브 훈련의 일환인 미군 전시 대량 사상자 후송훈련에 참가한 이국종 권역외상센터장과 외상외과팀 ⓒ출처 주한미군

전쟁과 외상센터, 산업재해

외상센터 문제를 다루는 주류 언론과 정부의 태도는 이 체제의 우선 순위를 잘 보여 준다. 이 나라의 산업재해 사망율은 수십 년째 세계 최고를 기록해 왔다. 그러나 주류 언론이 외상센터 문제를 주목해서 다룬 것은 석해균 선장과 탈북 군인처럼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을 때뿐이다. 이국종 교수가 근무하는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아주대병원)는 주한미군의 전시 거점 의료기관으로 지정돼 부족한 인력에도 불구하고 키리졸브 훈련 등 한미군사훈련에 참가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외상센터를 운영하는 미국에서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첫 외상센터가 만들어졌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부상이 곧장 사망으로 이어질 경우 전력이 약화되는 것은 물론 병사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총상이나 폭발로 인한 중증외상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다 보니 산재나 교통사고 같은 평상시의 중증외상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후자의 경우 지속적으로 많은 재정 지출이 불가피하다 보니 외상센터 재정 지원을 둘러싼 정부와 지역민들 사이의 공방은 끊이질 않는다. 최근에도 뉴욕 주 정부는 뉴욕 시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브롱스의 소아 외상센터를 폐쇄하려 해 논란이 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