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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는 누구였는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사는 유령” ― 헬렌 켈러가 여덟 살 때까지의 자기 삶을 묘사했던 말이다. 헬렌은 1880년에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에서 태어났다. 생후 19개월이 됐을 때 열병을 앓고 나서 눈과 귀가 멀었고 말도 못하게 됐다. 의사들은 그녀가 침묵과 어둠 속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헬렌의 집안과 친하게 지냈던 전화 발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헬렌의 부모에게 가정교사를 들여서 헬렌을 ‘감옥’에서 꺼내 주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헬렌의 부모는 젊은 노동계급 여성인 앤 설리번을 가정교사로 고용했다. 설리번 자신도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앤은 헬렌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수돗가로 데려가서 물 펌프 아래 손을 대보라고 했다. 헬렌의 손에 차가운 물이 쏟아지자 앤은 헬렌의 다른 쪽 손바닥에 ‘물’이라고 써 주었다. 헬렌은 난생 처음으로 자기 주변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동작을 멈춘 그녀는 땅바닥에 손을 대고 그 글자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다.

그 날 저녁 무렵 헬렌은 30개의 낱말을 배웠다. 헬렌이 점자를 터득하는 속도는 빨랐고, 열 살이 되자 목구멍의 진동과 글자를 서로 연결시켜서 말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그녀가 처음으로 했던 말은 “나는 벙어리가 아니다.”는 말이었다. 스무 살 때는 대학에 들어갔다.

이 모든 기간 내내 앤 설리번이 헬렌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책이든 강연이든 헬렌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 주는 힘든 일을 끝없이 반복했다. 헬렌의 자서전 《나의 생애》(The Story of My Life)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녀는 국제적인 유명 인사가 됐다.

이 무렵 헬렌은 장애가 단순히 개인적 불행의 문제가 아니라 대개는 빈곤이나 노동 조건과 관련된 문제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시력 상실의 원인이 되는 질병이나 사고를 연구하는 것, 그런 질병이나 사고를 방지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질병과 사고를 일으키는 조건들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의사들은 눈의 염증으로 고통받는 많은 맹인들을 진찰하지만, 그런 염증이 어둡고 비좁은 방에서 비롯한다거나 비위생적인 조건에서 사람과 함께 사는 더러운 동물들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노동자가 톱니바퀴가 부서지면서 시력을 상실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진정한 원인은 그 고용주가 이윤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기계에 안전 장치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가 되다

헬렌 켈러는 1909년에 미국 사회당에 가입했다. 그녀는 곧 사회주의 운동에서 지도적인 인물이 됐고 여러 좌파 신문에 글을 썼다. 그녀는 여성의 평등을 위해 투쟁했고 인종 차별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고무적인 저작과 연설은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것들이었다. 매번 그녀는 당시 노동자들이 처한 험악한 조건들을 폭로했다. 옷에 달린 레이스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파업 집회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이스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눈이 침침해지면, 우리가 입는 옷의 하얀 레이스도 침침해진다.”

헬렌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학살에 반대해 가장 목청을 높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 미국에서 흑인들이 학살되고 그들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의 지배자들은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에는 그녀를 극찬했던 언론은 이제 적대적 태도를 나타냈다. 〈브루클린 이글〉에 실린 한 사설이 그런 태도의 전형이었다. “그녀의 잘못은 성장 과정상의 분명한 한계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그러나 헬렌은 이에 맞서 싸웠다. 그녀는 자기의 장애에 대한 그 신문의 태도를 통렬하게 공격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를 열정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그녀의 응답은 여러 신문에 실렸다.

“내가 사회 봉사나 맹인들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는 한, 신문들은 나를 일컬어 ‘시각장애인들의 성녀’라거나 ‘기적의 여인’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우리 주변의 빈곤과 산업 체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면 언론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장애인을 도와 주는 것은 갸륵한 일이지만 모든 인간이 안락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황한 꿈이며 그 실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절에 헬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 가운데 하나는 1912년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서 있었던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어떤 의사는 로렌스 섬유 공장의 끔찍한 노동 조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성인 남녀 1백 명당 36명이 25살의 나이에 죽었다.” 노동자들은 그나마 형편없는 임금마저 깎이자 파업을 포기하고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에 접근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와블리스(Wobblies)라고 불리게 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1905년에 일단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급진적 노조 활동가 들이 결성한 조직이었다. 그 목표는 미국의 노동자들을 조직해 거대 단일 노조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IWW는 대중 집회와 행진 시위들을 조직했다. 파업을 벌이고 있던 5만 명이 참여했고 전국에서 지지와 성원이 쇄도했다.

헬렌은 북부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모금했다. 와블리스는 감옥에 갇히고 구사대가 피켓 라인을 공격해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섬유회사 사장들은 굴복했고 노동자들은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1913년에 미국 사회당은 IWW의 지도자 빌 헤이우드를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집행위원회에서 쫓아냈다. 헬렌은 빌의 복귀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이끌었다. 1915년에 IWW의 주요 조직가 조 힐이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헬렌은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캠페인에 참여했다. 대규모 국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조 힐은 총살 처형됐다.

처형되기 바로 며칠 전에 조는 “초상 치르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힘을 쏟으시오.” 하고 썼다. IWW의 투쟁 정신과 노동 대중에 헌신하는 모습은 헬렌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녀는 1916년에 IWW에 가입했음을 선언하는 글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함으로써 미국의 기성 사회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사회당이 너무 미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IWW에 가입했다. 사회당은 정치적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진정한 과제는 경제적 기초 위에서 모든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조직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그녀가 주는 영감

〈뉴욕 타임스〉는 헬렌에게 교육과 혁명, 둘 중 어느 것에 전념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혁명”이었다. “우리는 1900년 동안 교육에 힘을 써 왔지만 실패했다. 혁명을 해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낡은 질서를 쓸어버렸다. 잠시 몇 년 동안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 사회를 향해 나아갔다. 헬렌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다. 그녀의 사무실에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적기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 혁명을 옹호하는 수많은 글을 썼고,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경제 봉쇄 중단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이끌기도 했다. 그 경제 봉쇄는 갓 태어난 노동자 국가를 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9년에 헬렌은 “레닌의 정신”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IWW의 붕괴와 스탈린에 의한 러시아 혁명의 파괴는 헬렌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헬렌은 점차 정치에서 물러나 시각 장애인들과 청각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정신은 아직도 그녀의 영혼 속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몇 편 썼고, 2차 대전 후에는 뉴욕에 있는 사회주의 교육 센터의 기금 마련 사업을 도와 주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들을 탄압했다.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수백 명이 감옥에 갇혔다. 투옥된 사람 가운데는 IWW의 옛 멤버이자 미국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도 있었다.

플린이 수감돼 있던 3년 동안 헬렌은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규칙적으로 면회를 가고 편지도 써 보냈다. 그녀는 플린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엄혹했던 그 시절에 이렇게 공산주의자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용감하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1919년에 클리블랜드의 어떤 기자가 말했듯이, 헬렌 켈러의 삶은 누구에게나 영감을 주었다. 당시 헬렌은 파업 중인 인쇄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그 기자는 그녀를 “빨갱이”, “말썽꾼’으로 묘사하는 짧은 기사를 쓸 작정이었다.

그러나 헬렌의 연설에 오히려 감명을 받은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헬렌 켈러는 귀와 눈이 먼데다 ‘말도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는데도 억압을 보고 들리지 않는데도 분노한 인류의 외침을 들으며 연설할 때는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장애를 극복하려는 헬렌 켈러의 투쟁은 수많은 대중이 그녀의 삶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전 세계 학교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헬렌 켈러가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마틴 스미스는 영국 사회주의자동맹의 정치 연설가이자 산업 조직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