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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다

이건희 저지 시위를 건설한 고려대 학생들이 3주 간의 투쟁 끝에 삼성과 대학 당국 모두에게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다윗이 골리앗에 맞서 이긴 셈이다.

5월 24일 고려대 총장 어윤대는 총학생회장과의 면담에서 이건희가 한발 물러선 이후에도 거둬들이지 않던 징계 계획을 완전히 철회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뒤 학교당국은 학생들이 반성해 징계를 철회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언론에 흘리고 있지만, 징계 당사자들은 반성도 사과도 한 바 없다. 총학생회장도 면담중 사과한 바 없다고 한다.

학교 당국은 징계의 날을 서슬퍼렇게 세웠다가 무도 자르지 못하고 슬그머니 집어넣는 게 자존심 상해, 백기 항복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수를 부리는 것뿐이다.

이번 투쟁은 고려대 학생들만 외롭게 싸웠다면 승리하지 못했을 수 있다. 민주노총·민주노동당·인권단체들·교수들, 저명한 진보 인사들이 신속하게 이건희 학위 수여 항의 시위 참가자들을 방어하고 나섰던 것이 커다란 힘이 됐다.

이번 시위와 이를 둘러싼 논란은 대중의 반기업 정서가 광범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건희가 철학에 아무런 학문적 기여를 한 바 없으면서 오직 막강한 재력 덕에 학위를 받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건희가 학생 시위대에 의해 봉변을 당하자, 고려대 총장이 나서서 “머리 숙여 사죄 드린다”며 납작 엎드리고 부총장 이하 보직 교수들이 사퇴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삼성에 대한 고려대 당국의 과잉충성’을 비웃었다.

사람들은 이건희에게 과잉 충성하는 대학 당국을 보면서, 심지어 청와대와 장관까지 나서서 이건희에 아첨하는 꼴을 보면서 이 사회의 진정한 권력자가 누구인지 실감했다. 현실의 임기 5년짜리 대통령은 ‘비정규직 대통령’이고 이건희와 같은 기업 총수야말로 ‘정규직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삼성이 저질렀던 갖은 악행들 ― 노동 탄압, 부패 등 ― 에 대한 관심과 반감은 더 커졌다. 한 예로 5월 11일 인터넷 포탈 사이트 네이버에 올라온 ‘삼성이 욕먹어야 하는 이유’라는 글은 게시 일주일만에 무려 2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검색할 만큼 폭발적 관심을 끌었다.

이번 시위는 또한 기업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전에도 삼성 및 대기업들에 대한 반감이 존재했지만, 사람들은 ‘제왕적 권력’에 저항하는 데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가 이건희 박사 학위 수여식을 망치고, 이건희가 도망치듯 고려대를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게 된 많은 사람들은 이건희가 무적의 권력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람들은 저항의 가능성을 보았다.

특히 이건희와 싸우고 있는 삼성 계열의 신세계 이마트 수지점 해고자들, 삼성일반노조 활동가들이 이번 투쟁을 통해 가장 큰 힘을 얻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던 이 노동자들은 갖은 탄압에 시달리며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심지어 신세계 이마트 노동자들은 삼성이 ‘무노조 경영’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만 해도 1회당 50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에서 투쟁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시위 학생들은 이 노동자들의 대변인이 돼 준 셈이었다. 시위 학생들의 팻말에는 “이건희는 노동탄압 박사다”, “이건희의 경영 철학, 납치·감금·폭행·협박” 등 그 동안 삼성 노동자들이 더 널리 알리고 싶었던 진실이 담겨 있었다.

이제 이 진실이 한층 더 광범하게 알려졌고, 18년 전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정주영의 ‘무노조 경영’ 원칙에 도전했던 것처럼, 삼성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삼성의 ‘무노조 경영’ 간판을 내릴 날을 위해 더욱 투지를 불사르고 있다.

이번 시위는 학생운동 내에서 여전히 노학연대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학생운동은 주되게 학생들의 고유한 쟁점을 다뤄야 한다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는 듯했다. 많은 학생운동 단체들이 대학 밖의 쟁점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점점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이번 시위는 학생운동이 대학 밖의 쟁점에 발언하는 것이 여전히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주었다. 특히 학생운동이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고 사기를 북돋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도 배울 수 있었다.

정치 투쟁이 경제 투쟁에 자양분을 제공한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 원리가 이번 고려대 학생들의 투쟁에서도 중요한 교훈이었다.

실제로 이건희 저지 시위는 5월 1일 메이데이 노동자 시위에 연대했던 학생들이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희 저지 시위 방어 활동을 굳건히 건설해 온 고려대 학생들은 징계 철회 투쟁중에도 울산건설플랜트 투쟁 등에 앞장서 연대하려 노력했다.

이번 시위를 계기로 ‘기업의 대학 지배’ 문제도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1990년대부터 주요 대학들에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대학에 투자하는 대가로, 산학협동을 맺어 자신들의 이윤 추구 목적에 맞게 대학 교육을 변형시켜 왔다.

대학 교육이 기업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학문 탐구라는 대학 교육의 이상은 상실되기 시작했다. 많은 대학생들이 지적 탐구라는 기대와 현실의 대학 교육 사이의 모순 때문에 방황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불만이 이번 시위를 통해 표출했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기업의 대학 지배에 대한 비판 여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이번 투쟁 과정에서 다함께 고려대 회원들은 지배계급 전체와 대학 당국, 그리고 고려대 내 우파 학생들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승리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다.

이들은 지배자들의 마녀사냥에 맞서 단호하고 용기 있게 방어 활동을 건설했다. 그리고 방어 활동을 고려대 내의 문제로 협소하게 접근하지 않고, 전 사회적 계급 투쟁 의제로 접근했다. 그래서 진보 진영의 신속한 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학내에서는 우파 학생들의 위선을 정면으로 폭로한 결과, 우파 학생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리하여 지난 5월 19일 열린 전학대회에서 총학생회 탄핵 총투표안이 13 대 39로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총투표안에 찬성한 대의원들도 1∼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탄핵 자체에 반대했다. 통쾌한 승리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학 당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번 고려대 학생들의 이건희 저지 시위는 기업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비판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기업 권력에 맞선 반자본주의 투쟁을 고무할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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