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 피해 보상안 발표:
10년 투쟁의 결실, 액수와 산업 안전 대책은 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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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보상 방안과 삼성전자의 공개 사과 등의 내용을 담은 중재안이 발표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원회)는 최종 중재판정과 권고 내용을 발표했다. 이번 중재안은 올해 7월 반올림과 삼성전자가 중재안에 무조건적으로 합의하기로 한 것에 따른 것으로 이번 달 안에 추인식이 있을 예정이다.
조정위원회는 “피해자 구제를 최우선”으로 삼았다면서 “인과관계의 불확실성을 감안하여 개별 지원보상액은 [산재 보상액 대비] 다소 낮추되, 지원보상 대상의 범위를 폭넓게 설정”했다고 밝혔다. 중재안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원보상 대상자는 삼성전자 최초의 반도체 양산라인인 기흥사업장의 제1라인이 준공된 1984.5.17.(기흥 1라인 준공시점)이후 반도체나 LCD 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한 삼성전자 현직자 및 퇴직자 전원과 사내협력업체 현직자 및 퇴직자다. 지원보상 질병 범위는 백혈병, 비호지킨림프종, 다발성골수종을 비롯한 희귀암과 다발성경화증을 포함한 희귀 질환, 유산 등 생식질환, 자녀질환이다.
지원보상액은 백혈병은 최대 1억 5000만 원, 비호킨림프종, 뇌종양, 다발성골수종은 1억 3500만 원 등이며 지원보상은 삼성으로부터 독립적인 제3의 기관에 위탁한다.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반올림 피해자와 가족을 초청해 기자회견 등의 방식으로 공개 사과문을 낭독하고 개별적으로 이를 전달해야 하며, 삼성전자가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으로 500억 원을 출연한다.
진작에 이뤄졌어야 할 사과와 보상이다. 반도체 덕분에 삼성전자는 매년 200조 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이면서도 정작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산업재해에는 책임을 회피해 왔다. 이제라도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번 합의를 바탕으로 앞으로 삼성반도체 관련 계열사 노동자들에 대한 추가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반올림 대표 황상기 씨는 중재안 발표 직후에 한 인터뷰에서 보상대상이 상당히 넓어졌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공익법인을 통해 반도체 노동자들의 질병 문제 연구가 확대돼야 한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다만, 반도체 직업병 치료비로 고통받는 현실이나 상당수가 이미 사망한 점을 생각하면 보상 액수가 턱없이 적다고 아쉬워했다.
‘골리앗’ 삼성에 맞서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는 2007년 3월 기흥공장 노동자 고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뒤,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녀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삼성전자가 딸의 죽음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서 돈으로 무마하려는 태도에 분노했다. 이듬해 황상기 씨, 이종란 노무사 등이 힘을 모아 ‘삼성 반도체 노동자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을 결성했다.
이후 반올림은 지난 11년 동안 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과 삼성의 책임을 묻기 위해 분투해 왔다. 암, 희귀 난치성 질병뿐 아니라 피부병, 유산 등 생식성 독성 피해 등 노동자들의 제보가 줄을 이었다. 그간 반올림에 제보한 노동자 수만 200명을 훌쩍 넘는다. 이 중 79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러 피해자와 가족들은 삼성 측이 회유와 협박으로 어떻게든 진상 규명을 막으려 했다고 증언한다. 삼성전자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백혈병과 반도체 공장 업무가 관련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이용했다. 그런데 이 연구를 맡은 인바이런 연구소는 담배 회사들과 손 잡고 흡연과 폐암의 관계를 부정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곳이다.
근로복지공단도 노동자들의 편이 아니었다. 황상기 씨는 황유미 씨에 대한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삼성은 보조 참관인으로 이 소송에도 개입했다. (이 과정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생생히 그렸다.)
그러나 진실이 마냥 묻힌 것은 아니었다. 2011년 황유미 씨를 비롯한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산재가 인정된 데에 이어 백혈병, 뇌종양, 다발성경화증, 불임 등에 대한 산재가 인정됐다. 이 질병들은 이번 중재안이 정한 보상 대상 질병들이기도 하다. 이 판결은 2014년 고등법원에서 확정됐고, 지난해에는 대법원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뇌종양을 산재로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내려졌다. 노동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노동자들이 직접 입증해야 하는 불합리와 삼성 측이 영업기밀을 내세워 제대로 된 정보 공개를 하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소중한 승리들을 얻은 것이다. 동시에 삼성전자는 잡아떼기로 일관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삼성전자 측은 반올림 측에 대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삼성은 반올림과 피해자 가족들을 분리시키려 거듭 시도했다. 2015년 조정위원회가 삼성전자로부터 독립적인 ‘공익법인’을 통한 보상과 예상대책 수행을 권고하는 안을 내놓았지만 삼성은 이를 거부하고 자체 개별보상위원회를 만들어 버렸다. 결국 반올림은 배제 없는 보상과 사과 등을 요구하면서 삼성 본관 앞에서 1000일 넘게 농성을 벌였다.
이후 벌어진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은 반올림 피해자들에 대한 지지를 모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속에서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은 뇌물 혐의로 구속됐다. 직업병 피해자에게 돈 몇 푼 주고 무마하려던 삼성이 최고 권력자에게는 수백억 원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대중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퇴진 집회에서도 삼섬 노동자들과 직업병 피해자들은 큰 지지를 받았다. 결국 이재용은 퇴진 운동의 힘으로 구속됐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이재용은 풀려났지만 적폐 세력에 대한 여전한 분노에 눈치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 직고용 약속과 반올림과의 중재안 무조건적 합의 얘기가 이 시기에 나왔다.
과제
한편,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중재안은 “재발방지 노력” 조항을 포함했지만 스스로 인정하듯이 상세한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중재안이라는 본연의 한계 탓일텐데, 삼성전자가 안전보건에 관한 알권리 충족과 안전한 작업환경을 위한 안전기준 마련 등에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마저도 “기업의 영업비밀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공개’해야 한다고 했다. “영업 비밀”은 삼성전자와 지배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즐겨 쓰던 무기다.
앞으로의 피해를 막으려면 훨씬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반올림 상임 활동가 임자운 변호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반도체 산업의 특징과 노동자 안전 문제가 연관돼 있음을 지적했다.
우선 반도체 산업에 화학물질과 방사선 등 유해 요인들이 많다. 업체 간 기술경쟁이 치열해 안전성이 제대로 똑바로 검증되지 않은 물질과 기술들이 무분별하게 도입됐다. 그 위험성은 “영업 기밀”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감춰진다.
또한 설비투자 비율이 높아 생산성이 강조되면서 실적 경쟁과 속도 경쟁이 강요되고 이 과정에서 사고가 벌어지거나 안전장치 해제 등의 문제가 나타난다. 그래서 삼성반도체만이 아니라 LG와 SK하이닉스에서도 산재와 직업병 문제가 문제된다.
뿐만 아니라 2013년 삼성반도체 화성공장에서 벌어진 불산 누출 사고나 올해 9월 기흥공장 이산화탄소 누출 사고 역시 이 과정에서 벌어진 참사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최근 중앙행정심판위는 ‘삼성 작업환경보고서’의 측정대상공정, 화학물질명 등이 영업 비밀이라며 비공개대상정보라고 발표했다. 법원이 이 정보들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는데도 이를 무시했다. 기업의 비용 절감과 이를 위한 진실 은폐 시도에서 국가 기구도 한 편이다. 2013년에도 고용노동부는 불산 누출 사고 이후 이뤄진 삼성반도체 특별 감독과 안전보건 진단 결과를 은폐하려고 시도했다.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위험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산재사망률은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했다. 문재인 정부가 주장하는 규제 혁신(완화)은 노동자들의 안전과 생명을 더욱 위협할 것이다.
더 많은 희생을 막으려면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이윤 지상주의에 대한 도전도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