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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북한의 자본 축적과 권력 투쟁

1956년 2월 소련에서는 제20차 공산당 대회가 열렸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시초프는 이 자리에서 스탈린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이 사건은 여러 나라의 공산당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크리스 하먼이 말하듯이 “지구상의 모든 공산당은 당내 규율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소련 블록 지배계급의 동요는 헝가리와 폴란드의 민중 봉기를 낳기도 했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은 김일성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연안계와 소련계를 중심으로 한 당내 반대파는 1956년 8월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계기로 김일성에 대한 도전을 시도했다.

1956년 북한에서 벌어진 8월 사건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었다. 8월 전원위원회의 사건은 북한이 처해 있던 구조적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당시 북한은 심각한 자본 축적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급속한 중공업화 성장 전략에 따른 고유한 모순들 위에 대외원조의 축소라는 이중적 위기가 겹쳤다.

마치 남한이 미국의 원조 삭감으로 인한 축적 위기를 겪고 이에 따른 이승만 일당독재 체제의 붕괴, 그리고 박정희 독재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북한의 급속한 중공업화 전략은 대다수 노동자, 농민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축적 원인은 남한과의 군사적 경쟁압력 때문이었다.

“기계를 수입하는 나라에서 기계를 생산하는 나라로” 전환하는 것은 “국가의 자주 독립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를 재촉했다. 1958년의 연설에서 그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세 차례의 5개년 계획으로 이룩한 수준을 우리는 두 차례의 5개년 계획으로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경제는 이 시기 외형적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한국전쟁 이후 10년 동안 거의 평균 15퍼센트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였다.

1954년에서 1960년에 이르는 기간 내내 공업 투자액에서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80퍼센트를 차지했다.

경쟁적 자본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작동 방식이 북한에도 적용됐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초착취의 대상이 됐다.

북한은 한국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가혹한 노동법률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유지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시노동체제’는 계속된 것이다. 임의로 직장을 이탈하는 노동자는 강력한 처벌의 대상이 됐다.

노동자의 생산 통제는 원천적으로 봉쇄돼 작업장 유일관리체제가 도입됐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쟁을 부추기기 위해 ‘도급제’를 도입했다.

북한 정부는 노동자들의 명목임금이 급속하게 인상됐다고 선전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1953년에 비해 1956년에는 1백58퍼센트가 인상됐다.

그러나 이것은 명목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중공업 우선 노선에 희생돼 소비재 생산은 형편 없이 축소됐기 때문이다. 임금으로 살 상품이 없는 것이다. 김연철은 “많은 노동자 지구의 상품유통 규모는 해당 기업소의 노동자, 사무원들 임금의 50퍼센트도 흡수할 수 없게끔 ‘계획’되었다” 하고 말했다.

농업에서는 강제적인 집산화가 이뤄졌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에 농업협동화 방침이 결정됐다. 농업 집산화는 공업 확장에 필요한 원료와 노동력의 확보를 쉽게 만들 것이었다.

애초에는 농민이 협동조합에서 “탈퇴 또는 제명당하였을 때에는 그가 조합에 통합한 토지를 반환받는다”며 사적 소유권을 형식적으로나마 인정했지만, 1959년 전국농업협동조합대회에서는 소유권 문제에서 토지의 사적 소유 원칙이 폐기됐다.

토지의 집산화 과정에서 농민들의 저항이 발생했다. 집산화 초기 농민들의 협동조합 가입률은 매우 낮았다. 농민들은 주요 생산수단인 역축을 도살했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니게 될 텐데, 잡아먹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협동조합을 집단적으로 탈퇴하고 “봉기하는 유형”에까지 이르렀다.

이 결과 곡물 생산량은 1950년 대 중반까지도 전쟁기간인 1953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라고 선전해 왔지만, 소련의 원조는 전후 북한 경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북한 정부 재정에서 원조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남한과 거의 비슷한 30퍼센트에 육박했다. 미국이 원조를 통해 남한 경제의 밑바탕을 그려 준 것처럼, 소련 역시 그러했다. “소련을 향하여 배우자”는 하나의 구호가 돼 있었다.

그러나 1956년 들어 소련의 원조액이 삭감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취약한 북한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벌어진 이른바 ‘종파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졌다. 축적의 속도와 방향을 둘러싼 이견이 표출됐고, 노동자와 농민 들을 지배하는 방식을 둘러싼 갈등들이 표출됐다.

예를 들어 부수상인 최창익은 “중공업 우선 정책이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김일성을 비판했다. 직업총동맹 위원장인 서휘는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노동자에 대한 양보 조치를 주장했다. 한국전쟁과 강화된 통제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직장이탈과 태업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파는 실패했다. 김일성의 당내 지위는 확고했다. 이미 그는 한국전쟁 기간에 박헌영 등의 남로당 계열을 숙청하고 이 자리를 자신의 지지자로 대체한 바 있다.

소련파였던 박영빈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윤공흠이…개인우상숭배 문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자 방청석에서 ‘물러가라’, ‘개새끼’ 등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대파 중 윤공흠, 서휘 등은 신변의 불안을 느껴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일성은 반대파의 당적을 박탈하고 직위에서 쫓아냈다.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이 결정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중국과 소련은 필요하다면 김일성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을 대신할 대안은 없었다. 게다가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벌어진 민중 봉기는 체제 단속의 압력을 다시 강화시켰다. 소련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 직접 대치하고 있는 북한 지도부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김일성은 8∼9월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자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반대파는 거의 모두 숙청당했고 1인 독재체제가 만들어졌다.

이런 정치·경제적 위기가 김일성으로 하여금 탈소련과 ‘주체’를 강조하게 만든 압력이었다. 1957년부터 본격화한 중국과 소련의 갈등은 김일성에게 상대적 자율성을 부여해 줬다.

소련의 원조 축소에 대한 대응은 “자력갱생”과 ‘의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 공급과 불안정한 경제 상황은 유일관리체제와 같은 통제 기제와 도급제와 같은 물질적 이니셔티브가 정착하는 것조차 방해했다.

1958년부터 시작된 대중동원 운동인 ‘천리마 운동’과 수령의 현장 직접 지도 체제는 북한이 처한 이런 모순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급속한 성장은 오늘날의 경제파탄의 씨앗을 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