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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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세계 경제와 한국 노동운동

이 글은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국제연락간사 몫)이 소속 단체 대의원협의회에서 한 발제이다.

〈노동자 연대〉 신문은 올해 경제 상황이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을 거듭 내놓았다(필자 자신의 글, ‘2019년 세계 상황과 한국 노동운동의 전망’과 강동훈·정선영 기자의 글들). 친자본주의 애널리스트·경제평론가의 대부분도 올해 경제 상황이 위기(자칫 경제 공황이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한 고비)라는 데 동의하는 듯하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공황 직후 트로츠키는 경제 공황과 노동자 투쟁의 관계에 대해 매우 뛰어난 견해를 제시했다. 먼저, 트로츠키는 공황이 닥치면 계급투쟁이 자동으로 고양된다는 생각이 기계적인 사고일 뿐임을 강조했다. 물론 공황으로 노동자 투쟁이 불붙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운동이 자동으로 혁명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트로츠키는 순차적으로 고찰해야 할 두 가지 핵심 논점을 제시했다.

(1) 먼저, 경제의 장기적 추세를 염두에 두고 경기 순환(호황/불황 주기)을 봐야 하고,

(2) 그다음, 폭넓은 정치적 맥락 속에서 경제 불황을 봐야 한다. 그래서 제국주의, 정치 체제, 정당 정치의 위기, 특히 노동계급 의식과 투쟁성이 경제 불황과 관련되는 방식을 봐야 한다.

위 요점을 차례차례 살펴보자.

추세와 순환의 구별, 그리고 합성

(1)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적 추세와 단기적 순환(불황/호황 사이클)을 구별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직면한 1920년대 호황을 마르크스가 《자본론》 집필 구상 초기에 경험한 1850년대 호황과 비교하며 분석했다. 1850년대의 호황은 장기적 호황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자본주의 호황은 1873년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1920년대는 자본주의 경제의 쇠퇴기였다. 그러므로 호황은 잠깐이었고, 불황은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고 더 깊어졌다.

이런 분석 틀로 우리 시대를 살펴보자.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는 두 번의 장기적 발전 단계를 경험했다. 1940~1973년 자본주의는 사상 최장의 지속적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불황은 단기간이었고, 심각하지도 않았다. 반면 견실한 경제성장이 지속됐다. 이윤율이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생활수준도 향상됐다.

그러나 1973년 이후 성장률은 꾸준히 낮아졌고 불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공격해야 비로소 이윤율이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심각성의 정도는 서로 달랐지만, 1973~1974년, 1979~1981년, 1991~1992년, 1998년, 2001년, 2008~2009년 공황을 경험했다. 2008년 이래로는 경제 침체가 지속됐다. 이 침체는 오랜 저성장 끝에 닥친 것이다.

경제와 정치의 상호작용

(2) 이제 경제 침체 상황과 정치 상황의 상호작용을 살펴보자. 전후 장기 호황이 1973년에 끝나면서 정치도 크게 변했다.

점점 취약해지고 있던 경제는 설상가상으로, 1989/91년 옛 소련 블록의 몰락과 냉전 종식 이후로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점점 더 자주 전쟁이 일어나는 제국주의 체제를 떠받쳐야 했다. 경제 침체는 이런 제국주의적 갈등을 점점 더 악화시켰다. 특히, 미국이 자기 경제적 지위의 상대적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자기의 여전히 우월한 군사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서구의 경우,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복지국가가 확장되던 호시절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종말을 맞이했다. 한국의 경우 그런 호시절은 1997년 이후 끝났다.

서구에서 케인스주의를, 한국에서 발전주의를 대신해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경제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리고 복지국가와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이 대폭 강화됐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우리는 20년간 규제 완화, 민영화(사영화), 노조 억제 정책들이 노동자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 상황에서 새로운 경제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경제 침체의 영향으로 정치인과 정치 제도 전반에 대한 회의론도 확산됐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군사독재 후신 정당(여러 차례 당명을 바꾼)과 실천상으로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회의론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정서는 특히 최근 문재인에 대한 실망을 뚫고 노동운동이 고양된 덕분에 널리 확산됐다. 이 점은 김명환 민주노총 집행부의 경사노위 참가 시도가 노동자 다수의 반대에 부딪혀 있는 것에서 드러난다.

물론 경제 위기에 직면해 정치 상황 전개가 언제나 좌경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자유한국당의 소생은 경제 침체기 노동계급의 태도가 양극화함 ─ 일부는 시스템을 비판하고, 일부는 시스템의 희생자를 비난한다 ─ 을 보여 준다. 경제 위기 때마다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누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대안적 해결책을 내놓는가를 둘러싸고 좌파와 우파 사이의 경쟁이 벌어진다.

이번 경제 위기는 노동계급의 대부분이 현 경제·정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상황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성격에 대한 명료한 정치적 견해를 내놓는 동시에, 불황의 해악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저항에도 정치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포퓰리즘 ― 좌와 우

김용균대책위 사례는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의 상호작용만으로는 불충분함을 보여 준다 ⓒ조승진

필자가 2015년 말 민중대회로 드러난 한국의 포퓰리즘에 대해 기사를 쓰고 있을 때 세계 곳곳에서도 포퓰리즘이 부상하고 있었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논자들이 포퓰리즘의 부상을 기정 사실로 언급하고 있을 만큼 포퓰리즘은 보편적으로 인지되고 있는 현상이다.

최근에는 스페인 좌파 포퓰리즘 정당 포데모스의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책이 우리말로도 번역 출판됐다(샹탈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2019).

어떤 영영사전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이렇게 정의된다.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와 편견에 계획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전략.”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예각을 가하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 중 부패한 최상위 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이 계급을 가로질러(여러 계급을 포함해) 단결해 집권한다는 전략.

2016년 영국에서 브렉시트를 결정케 한 국민투표의 다수 찬성표 표심에도 포퓰리즘 정당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프랑스의 국민전선(FN), 이탈리아의 동맹당(Liga)과 오성운동(M5S), 네덜란드의 자유당(PVV), 스웨덴의 스웨덴민주당(SD), 오스트리아의 자유당(FPÖ), 헝가리의 요빅당(Jobbik), 폴란드의 법과정의당(PiS) 등도 포퓰리즘 정당들이다.

방금 언급한 포퓰리즘 정당들은 모두 우익 정당들이다.(그중 프랑스의 FN과 오스트리아의 FPÖ, 헝가리의 Jobbik은 아예 파시즘 정당이다.)

이 우익 정당들은 2008년 이후 지속돼 온 세계경제 침체와 중도파 정당들의 배신의 수혜자로서 성장했다. 미국에서 트럼프의 부상,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루의 부상, 그리고 베네수엘라에서 과이도의 부상도 마찬가지 맥락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국에서 박근혜를 퇴진시킨 운동이 일어난 지 겨우 두 해 만에 우익이 부상하고 있는 것도 경제 위기와 중도파 정치인 문재인의 배신이라는 같은 맥락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좌파가 아니라 우익이 수혜자인 건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노동계급은 2008년 공황이 들이닥치고 처음에는 공황에 대한 설명과 해결을 조직 노동자 운동과 좌파에 의지했다. 실제로 2010년과 2011년은 곳곳에서 광장 점거와 거리 시위로 점철됐고, 영국과 몇몇 유럽 나라에서는 공공부문 파업도 있었다. 아랍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일부 독재자들이 타도됐다. 이런 일들로 좌파가 상당한 소득을 얻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미국과 영국, 스페인 등지에서 각각 버니 샌더스, 제러미 코빈, 파블로 이글레시아스(포데모스 당대표)가 부상했다. 하지만 방금 언급한 나라들을 포함한 자본주의 주요국들에서 더 큰 수혜자는 대개 우익이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노동계급의 투쟁이 우익 반동을 제압할 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이다.

둘째, 노동정치가 1930년대와 다르다. 1930년대에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이데올로기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으로부터 계속 대중적 선거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이 이들 노동계급 정당들로부터 표를 빼앗아 가는 것이 제한될 수 있었다. 반면 오늘날 공산당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고, 사회민주당 주류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데다 개혁을 위해 한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대중의 분노와 불신을 받고 있다. 덕분에 파시스트들을 포함한 우익 정당들이 기득권층에 반대한다고 사람들을 포퓰리즘으로 기만하면서 선거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셋째, 강화된 제국주의이다. 심각한 경제 위기는 양극화를 낳고, 정치 체계의 개편을 압박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도 강화한다. 이미 이라크 전쟁으로 강화된 제국주의를 더한층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시리아와 예멘의 비극은 그저 직접적으로 아랍 혁명의 패배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니다. 이라크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더 큰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 세계 상황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 게다가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 혐오를 조장했고, 이슬람 혐오는 서구의 우익 정당들을 포퓰리즘 이데올로기로 결속시키는 구실도 하고 있다.

한국은 이런 세계 상황과는 꽤 다르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원칙을 입증하는 예외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1996년 말 노동법 파업 이래 20년 만에 노동계급이 부패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포퓰리즘적 운동의 추진력이 됐다. 그 덕분에 그 운동이 진보성을 띠었고(진보적 포퓰리즘, 즉 민중주의), 노동계급도 그 운동에 의해 고무돼, 노동조합이 성장하고 있다.

물론 새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노동자들도 한국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해, 애초에 진보적 포퓰리즘인 민중주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즉, 박근혜와 당시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부패한 패거리를 제외한 국민(민중)이 계급을 가로질러 단결해, 그 부패한 패거리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국민’(민중)의 이익과 정서에 민감한 정부를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과 민주당이 그런 수권 정당이 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 노동운동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문재인과 민주당에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엊그제까지 문재인에게 기대를 걸었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문재인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의식이 진보적이기는 해도 아직 좌파적이라고까지 하기에는 불충분함을 반영한다. 노동조합이 그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조직 형태일 뿐 아니라, 그들의 의식이 현재 도달한 수위가 노동조합적이기(급진 노동조합주의) 때문이다.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의 상호작용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의 이러한 동요 또는 결합에 대해서는 이 글 첫머리에 언급된 필자의 글에서 논의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우리가 목격한 이 현상은 바로 김용균 씨 사망 추모 집회에서 드러난 김용균대책위 활동가들의 방침이었다.

아쉽게도 우리 단체의 김용균대책위 파견자들은 급진 노동조합주의자들이나 할 법한 주장(노동조합이 운동을 주도하라는)들과 제안들을 했던 듯하다. 필자는 위 언급된 글에서 한국 등 신흥국 노동운동가들이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의 변증법적 상호작용 속에서 흔히 개혁주의로 기울어진다고 지적했다. 그 글에서 필자가 언급하지 않은 점 하나는 남아공이나 브라질의 혁명가들도 자주 민중주의 대(對) 급진 노동조합주의 프레임에 갇혀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김용균 씨의 비극은 조직 노동자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알려 주듯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노동계급 사람들과 서민층 전체를 위태로운 환경 속에 놓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회주의적 전술은 이윤 시스템과 차별(단지 비정규직뿐 아니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항의 운동으로 동원할 구호와 조직 방법을 포함해야 했다.

김용균 씨 사망 추모 집회의 주도권은 처음에 ‘자연스럽게’(조직 노동계급의 성원이라는 김용균 씨의 신분과 사망 원인에 비춰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떨어졌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개혁주의적이라는 점은 혁명가들이 두루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장 활동가들조차 정치 영역에서는 자주 지도자들과 함께 개혁주의로 기울어진다. 우리는 왜 노동조합에 그런 경향이 있는지 그 구체적 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주장과 제안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조 지도자들은 파업만큼 항의 집회에도 큰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이 모두 문재인 정부를 우파 정당들로부터 지키는 데 연연한다는 것은 참말이 아니다. 이 점은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 내에서 경사노위 문제를 놓고 다수 성원들이 격렬하게 참가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조합의 약점인 경제주의와 부문주의를 극복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구현한다. 경제주의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 같은 개혁입법은 법률가 출신 진보계 국회의원(불행히도 민주당도 진보계로 여겨지고 있다)이 해야 할 몫이고 노조 지도자들 자신은 사용자와의 협상을 담당한다는 접근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부문주의는 김용균 씨 사망이 전체 노동계급 문제로 다뤄지기보다는 그의 소속 노조인 공공부문(나중엔 더 축소돼 발전부문으로, 심지어 그중 연료·환경설비운전부문)의 문제로 다뤄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주의와 부문주의 못지 않은 노조 지도자들의 문제는 민중주의이다. 이는 민중주의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를 중재하는 협상 전문가로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중간계급 지향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문에 노조 지도자들은 자연히 주요 NGO 지도자들에 우호적이 된다. 공공운수노조와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이태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을 김용균대책위의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한 것에는 이런 맥락이 있다. 더구나 참여연대가 현 정부의 주요 지지 세력임에도 말이다.

민중주의의 핵심 문제점은 ‘민중 연대’(요즘은 ‘사회적 연대’라고도 한다)가 중간계급(특히, 자영업자층)을 반드시 포함한 여러 계급에 걸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는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다른 계급을 향한 지배적 영향력)와 이것의 전제조건인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이 실종된다. 이는 처음에 산안법이 개정됐을 때 유족이 개정의 ‘진보성’을 착각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노조 지도자들이 율사 출신 ‘진보계’ 의원들로부터 독립적으로 개정안을 분석해서 비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주의와 부문주의와 민중주의는 모두 결국에는 개혁주의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김용균대책위 공동대표단이 산안법 개정을 서둘러 처리하고 정규직화 문제와 책임 소재 규명, 책임자 처벌 문제는 후순위로 돌린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더 키우는 데 충분한 열의를 보이지 않은 이유도 설명해 준다.

맺음말

반면 교사 브라질의 극우 대통령 보우소나루 당선은 노동자당(PT)에게 책임이 있다 ⓒ출처 Pedro França/Agência Senado

필자는 우리 나라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브라질의 상황을 보면서 자신들의 사명을 철저하게 의식하게 되기를 염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브라질에서 극우적인 보우소나루 정부가 들어선 것은 압도적으로 전임 대통령 룰라와 호세프의 노동자당(PT)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룰라-호세프 PT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시행한 주제에 뇌물 수수 등 부패 범죄를 저질러 브라질 사회를 총체적인 냉소와 사기저하, 이기주의, 무법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브라질의 살인사건은 대개 마약과 관련된 건데, 연평균 피살자 수가 시리아 내전 연평균 사망자 수와 거의 같다. 이런 혼돈의 상황에서는 보우소나루 같은 극우파가 충분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보우소나루는 1964년부터 1985년까지 브라질을 강권 통치한 군부 독재 정권을 노골적으로 찬양할 뿐 아니라 좌익에 대한 고문과 노동자 권리 유린, 투쟁적 노동조합의 탄압을 옹호하고 있다.

비록 보우소나루와 그가 이끄는 사회자유당이 파시스트 정당은 아니지만 브라질 노동계급의 적잖은 소수도 이 극우파를 지지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특히, 브라질이 경제 규모 세계 8위, 군사력 순위 세계 14위인 준강국인 점에 비춰 보면 이 사실은 가벼이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은 호세프 사임부터 보우소나루 집권까지 미셰우 테메르가 대통령으로 있던 2년 반의 과도기에 PT 왼쪽의 브라질 좌익은 뭘 했는가이고, 이 문제는 그들이 PT 집권기에 뭘 하고 있었는가로 연결된다. 필자가 2005년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했을 때 눈여겨본 PT 왼쪽의 좌파들은 종파주의나 중간주의 경향을 드러내면서 PT의 민중주의(진보 포퓰리즘)를 어떻게 다룰 줄 모르고 있었다.

PT의 진보 포퓰리즘은 2010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 포퓰리스트인 테메르가 PT 후보 호세프의 러닝 메이트로 활동해 2011년 1월 1일 부통령으로 취임했고, 2016년 8월 31일 호세프가 브라질 상원의 탄핵을 당하면서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일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2005년 이후 노무현에 대한 환멸이 노무현과 비슷한 부류로 비쳐지고 있던 민주노동당에도 좋지 못한 결과를 안겨 줘, 노무현 환멸의 반사이익을 2007년 이명박이 챙겼음을 기억하고 있다.

문재인에 대한 환멸을 황교안, 오세훈, 김진태, 홍준표 따위의 우파 정치인들이 활용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노동자 운동이 문재인을 선명하게 비판하면서 정치 지형을 왼쪽으로 기울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노동자 운동이 투쟁적인 동시에 정치적이 돼야 한다. 민중주의 전략과 급진 노동조합주의 운동(전략이 부재한 단순한 운동일 뿐임)의 변증법으로는 현재의 노동운동을 이런 노동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 민주노총 경사노위 참여를 둘러싼 투쟁이 시사하듯이 좌파가 강력해야 노동조합 운동도 좌파적이 될 수 있다.

민주노총과 그 조직들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다. 노동조합 외에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정의당과 민중당이 그런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의당과 민중당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고, 그 정당들보다 나은 (혁명적) 정치조직이 건설돼 그 정당들과 적절하고 효과적인 관계(공동전선을 포함해)를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조합 운동을 급진적·투쟁적으로 만드는 일과 혁명적 좌파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이 일이 쉽사리, 또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와 주요국들의 정치 위기, 그리고 트로츠키가 말한 “노동운동 리더십의 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무한정 먼 미래의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