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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8 제노바 회담 반대 시위 - 30만이 뒤흔든 이탈리아

G8 제노바 회담 반대 시위 - 30만이 뒤흔든 이탈리아

  이수현

 지난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는 G8(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이탈리아·캐나다·러시아), 즉 주요 8개국 정상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해마다 열리는 이 회담은 올해도 역시 별다른 성과 없이 그들만의 '말 잔치'로 끝났다.

 조지 W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처음 열린 이번 회담은 사실 회담 개막 전부터 이미 별볼일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지구 온난화 방지에 턱없이 부족한 교토의정서조차 내팽개치고 미사일방어체제(MD)를 강행하겠다는 미국의 독단에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조차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회담은 아프리카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있는 에이즈 대책으로 고작 13억 달러의 기금을 마련하는 계획을 발표하는 데 그쳤으며, 제3세계 빈국의 부채 탕감도 말만 요란했을 뿐 실질적인 지원책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번 정상 회담에서 두드러졌던 것은 지난 1999년 11월의 시애틀 시위 이후 정점에 달한 반자본주의 시위의 규모였다.

다함께

 회담 개막 하루 전인 목요일에 6만 명이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행진을 벌였다. 그 다음 날에는 G8에 반대하는 시위와 행진이 일곱 군데에서 벌어졌다. 주최측에 따르면 여기에 참가한 인원도 5만 명이나 됐다.

 정상 회담 이틀째이자 토요일인 7월 21일 드디어 30만 명의 시위대가 제노바 시내를 행진했다. 이것은 시애틀 시위의 무려 5배나 되는 규모였다. 시위 주최측인 제노바사회포럼(GSF) ― 7백여 개의 각종 단체가 망라된 ― 의 깃발이 맨 앞에 섰다. 고용 안정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프랑스의 다농 노동자들이 그 옆에서 함께 행진했다.

 시위대가 들고 있는 배너에는 "우리의 세계를 돌려 다오", "신자유주의 반대", "저항과 연대",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튀니지 등지에서 온 ATTAC(금융거래과세 시민연합) 회원들이 국제 금융 투기에 세금을 매기자는 요구를 내걸고 행진했다. 외채 탕감 운동을 벌이는 시위대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제노바 시위는 노동자, 환경운동가, 학생, 기타 활동가들이 다함께 단결하여 반자본주의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탈리아 금속노조(FIOM)의 대의원 수천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그들은 FIOM의 로고가 있는 빨간 모자를 쓰고, 적기를 휘날리면서, 서로 팔짱을 끼고 행진했다. 피아트 자동차의 노동자들을 비롯해서 이탈리아 전역의 청장년 노동자와 투사 들이 함께 어우러졌다.

 FIOM의 어떤 노조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 우리는 인원 감축이나 임금 삭감에도 반대하고 노동조합 권리에 대한 공격에도 반대한다. 그러나 평화와 인권은 모두 찬성한다. 우리는 오늘 청년들과 함께 어울릴 것이고 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할 것이다."

 이탈리아 최대의 노동조합 단체인 이탈리아노동자동맹(CGIL)의 배너도 많이 보였다. 파도바, 볼로냐, 브리안자, 기타 여러 지역에서 온 노동자들이 CGIL의 깃발을 들고 참가했다. 좌파 이탈리아 노조인 노동자기초위원회(COBAS) ― 이탈리아의 비공인 노조연합체로서 1980년대에 등장한 현장 노조 조직 ― 의 대의원들도 있었다. 한 COBAS 조합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자본주의에 반대해 사회주의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브레시아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온 사람이 1천 명이다. 그들 대부분은 정부에 반대해 이제 막 파업에 돌입한 금속 노동자들이다. 이 제노바 시위는 새로운 국제적 운동이 부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후퇴는 이제 끝났다."

 이탈리아의 '학생 행동'이라는 조직이 들고 있는 배너에는 "만국의 학생들이여 단결하라!"라고 적혀 있었다. 학생들이 '적기'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FIOM의 노동자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주먹을 움켜쥐고 흔들어 보였다. 그 두 단체는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길을 따라 계속 행진했다.

 제노바의 평범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지지를 보냈다.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거나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할머니는 붉은 스카프를 흔들기도 했다. 양동이에 물을 담아 와서 더위에 지친 시위 참가자에게 뿌려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항의 세계화

 그리스 공산당의 대규모 대표단이 구호를 외치고 적기를 흔들면서 시위대에 합류하자, 칼리니의 젊은 투사들은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그 두 집단도 함께 행진했다.

 행진 대열 안에는 그 전날 경찰에 의해 살해된 23세의 이탈리아 청년 카를로 줄리아니를 기리는 표시로 검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많았다. 로베르토, 크레모나, 토리노, 트리에스테, 파르마, 그 밖에 이탈리아 전역에서 줄리아니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제노바사회포럼의 깃발을 들고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킬트 ― 스코틀랜드의 민속 의상 ― 를 입은 던디 노동조합과 런던 시 공공부문 노조의 대의원들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환경 운동가 수백 명도 시위에 참가했고, 옛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온 좌파 조직 리폰다치오네("재건파")의 활동가 수천 명도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도 매우 많았다. 프랑스의 SUD 노동조합과 그리스의 통신 노동자들도 참가했고, 그리스의 지방자치단체 노동자들이 들고 있는 배너에는 "자본주의 반대, 사람들의 투쟁 찬성"이라는 구호가 쓰여 있었으며, 아테네의 병원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발칸사회주의센터 소속의 활동가들은 "혁명을 세계화하자"라는 구호가 적힌 배너를 들고 있었고, 세계야생생물기금의 대표단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팬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우리와 함께 온 사람은 50명이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러시아의 다른 모습, 즉 푸틴이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러시아 경제가 자유화된 결과는 끔찍한 것이다."

 '저항의 세계화'라는 명의의 단체가 마련한 열차를 타고 영국에서 온 사람들도 수백 명이나 됐다. 그 열차편은 프랑스 정부의 압력 때문에 취소된 적이 있었지만, 프랑스 철도 노조의 항의 덕분에 다시 운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제노바의 반자본주의 시위에 두려움을 느낀 각국 정부의 갖은 방해 노력과 책동에도 불구하고 주최측의 애초 예상 인원보다 세 배나 많은 30만 명이 모였다는 것은 일련의 반자본주의 시위가 기성 언론의 주장대로 "소수 무정부주의자들의 난동"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 주었다.

 비록 정상회담 자체를 중단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내년도 회담 규모를 현재의 3천 명에서 350명으로 크게 줄이고 장소도 외딴 산 속으로 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것은 이번 시위의 성과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G8은 살인자들"

 이번 G8 회담에서 두드러졌던 다른 하나는 바로 무자비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탈리아 경찰의 폭력성이었다. 이미 지난 6월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는 유럽연합 정상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총격을 가해 세 명이 다치는 등 계속되는 반자본주의 시위에 대한 각국 경찰의 대응은 더욱 폭력적인 양상을 띠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가 사망에 이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탈리아 경찰의 과잉 진압과 폭력으로 카를로 줄리아니가 사망하고 5백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 18명이 아직도 실종된 상태다. 그들 대부분은 외국인이며 생사 확인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경찰은 체포된 사람들의 변호인 접견을 금지하고 구타와 고문 등 가혹 행위를 했다. 기성 언론은 시위대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행동이" 경찰의 폭력을 부른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30만 명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사실,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이미 제노바는 군경 병력 2만여 명이 배치된 철통 같은 요새로 변해 있었다. 지난 7월 20일 경찰관이 차에 탄 채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줄리아니를 죽인 경찰 폭력이 단지 우발적인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겨레〉 신문에는 줄리아니의 아버지가 시위대의 폭력성을 비난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두번째로 큰 노동조합인 이탈리아 기업노동자동맹(CISL)의 간부인 그가 "소화기를 집어던지는 것이 총 맞아 죽을 이유가 되는가?" 하면서 경찰의 폭력을 비난했다는 사실은 보도되지 않았다.

 한편 캐나다, 프랑스, 그리스, 독일, 스페인, 스웨덴 등지에서도 줄리아니를 살해한 이탈리아 경찰을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G8은 살인자들"이라는 대형 배너를 들고 행진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정상 회담 기간 중 제노바사회포럼이 프레스센터로 사용했던 학교는 경찰의 폭력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과 비디오를 빼앗기 위한 경찰 습격으로 유혈낭자한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경찰은 사람들을 벽에 세운 뒤 몸수색을 하고 나서도 아무런 이유 없이 그들을 구타하고 폭행했다. 경찰 책임자조차도 "압수·수색하러 들어갔다가 보복을 하고 나왔다"고 시인했을 정도였다.

 국제기자연맹(IFJ)은 이탈리아 경찰이 기자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했다고 비난하면서, 경찰이 심지어 "기자로 위장하는 계책을 사용해 시위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탈리아 경찰의 이런 위장술은 느닷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1977년에 로마에서 학생 차림으로 위장하고 시위대를 1명 살해한 전력도 있다. 그들은 또한 당시에 극우 파시스트 대원들과 짜고 일련의 폭발 사고를 낸 뒤 그 책임을 아나키스트 단체에 뒤집어씌워, 좌파를 공격하는 기회로 이용한 바 있다. 199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다리오 포는 이번 제노바 시위 직전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련의 폭발물 사고에 대해 경찰을 의심하면서 "국가의 아나키스트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기성 언론은 또 '블랙 블록'이라는 아나키스트 단체 활동가들이 검은 마스크와 검은 복장을 착용하고 상가와 은행 들을 파괴하는 장면을 보도하면서 시위대 전체를 폭력 세력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블랙 블록'이라는 말은 1999년 시애틀 시위 당시 이미 사용됐으나 그 이후 시위대 본류와는 별도로 행동을 계획하는 고도로 조직된 그룹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의미가 확대됐다.

 이번 제노바 시위에 나타난 블랙 블록 대부분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에서 왔고 체포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일부 블랙 블록 대원들이 경찰과 아주 친숙한 듯이 말을 주고받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경찰은 이들이 시위대에서 뛰쳐나와 돌을 던지는 동안은 가만히 있다가 이들이 다 도주한 뒤에 남아 있는 평화적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하곤 했다는 목격담도 많았다.

 그래서 경찰이 일부러 블랙 블록 대원처럼 위장하고 파괴 행위를 연출하거나 경찰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 제노바 시민은 영국 BBC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경찰 30여 명이 시위대 4명을 집단 폭행"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하면서 경찰의 과잉 진압과 폭력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래서 정상 회담이 끝난 뒤인 7월 24일에는 제노바, 로마, 밀라노, 토리노 등 수십 개 도시에서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가두 시위가 벌어졌다. 또, 좌파 시위대 5백여 명이 이탈리아 국회의사당 앞에서 내무부 장관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결국 이탈리아 총리 베를루스코니는 강경 진압의 책임을 물어 경찰 고위직 간부 3명을 해임하지 않으면 안 됐다.

반자본주의 시위의 정점

 1999년의 시애틀 시위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1960년대 말 세계 각국을 뒤흔들었던 준혁명적 파고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완연히 가라앉은 다음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권좌에 오른 새처와 레이건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밀어붙였다. 1980년대는 선진국의 노동자 계급과 반자본주의 세력들에 음울한 침체기였다. 심지어 '사회주의자'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있었던 프랑스에서조차도 그의 배신적인 정책과 반노동자적 행태에 환멸을 느낀 노동자들과 좌파는 암울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1995년 말 프랑스의 '뜨거운 겨울' 이후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선진국의 노동자 계급과 좌파에게 시대적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해 준 사건이 바로 시애틀 시위였다.

 1989년에 당시 미국 국무부 관리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제 좌파는 몰락했으며 인류에게는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적인 역사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5월 이제 다시 "좌파가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고 전망을 수정했다. 그가 좌파의 부활을 보여 주는 실례로 든 것이 바로 1999년 11월 말의 시애틀 시위와 지난해 4월의 워싱턴 시위였다.

 그 이후 반자본주의 시위는 점점 더 확대돼 왔다. 그리고 이번 제노바 시위는 이런 일련의 흐름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이런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발전도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동안 각개약진하던 다양한 운동들, 예컨대 여성·환경·인권·평화·노동·농민·제3세계 외채 탕감 등 여러 운동의 목표가 점차 수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표적의 이름이 '가부장제', '군산복합체', '세계화', '신자유주의', '다국적기업', '자본주의', '제국주의' 그 무엇이든 간에 동일한 '하나의 적'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운동들이 깨달아 가면서 공동 활동의 틀이 넓혀지고 있다.

 이제 국제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일부인 우리 반자본주의 좌파는 그런 공동 활동의 틀과 범위를 더욱 확대하고 심화시키면서 더한층 전진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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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서 제노바까지

* 1999년 11월 WTO에 항의해 시애틀에서 5만여 명이 시위.

* 2000년 6월에 프랑스 미요에서 6만 명이 시위.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릴 때 전당대회장 밖에서 2만 명이 시위.

* 2000년 7월에는 일본의 오키나와에서 G8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에 5천 명이 참가.

* 2000년 9월에는 세계경제포럼(WEF)에 반대하는 수천 명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에서 시위.

*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 총회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에 2만 명이 참여.

* 2000년 10월에 서울에서 아셈(ASEM)에 항의해 2만여 명이 행진.

* 2000년 11월에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기후변화회의 회담장 밖에서 수천 명이 시위.

* 2000년 12월에는 프랑스의 니스에서 유럽연합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에 10만 명이 참가(대부분은 프랑스의 조직 노동자들).

* 2001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반대해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는 3천 명의 시위대가 대안 회의를 개최했고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수천 명이 항의 시위.

* 2001년 2월에는 에콰도르에서 국제통화기금의 긴축 계획에 반대하는 수십만 명이 시위를 벌여 승리.

* 2001년 3월에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글로벌 포럼에 반대하는 시위에 2만 명이 참가. 아르헨티나에서는 국제통화기금의 긴축 계획에 반대해 총파업.

* 2001년 4월에는 캐나다의 퀘벡에서 미주자유무역지대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8만 명이 참여.

* 2001년 5월 1일 메이 데이에는 세계 전역에서 수십만 명이 반자본주의 시위 전개.

* 2001년 6월에는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유럽연합 정상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에 3만 명이 참가.

*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는 세계은행이 회담을 취소했음에도 3만 5천 명의 시위대가 집결.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는 세계경제포럼에 반대하는 시위에 2천 명이 참가.

* 2001년 7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열린 G8 회담에 항의대 30만 명이 집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