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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며:
1989년 남북 자유왕래를 향한 투쟁

황석영 작가, 문익환 목사, 임수경 학생, 문규현 신부.

정확히 30년 전인 1989년 이맘때 무렵 이 네 사람의 방북이 남한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다.

당시는 전두환 군부 독재를 이어받은 노태우 정부 시절이었다. 정부 허가 없이 민간인이 북한을 간다는 것은 중대한 반역 행위로 처벌받던 때였다. 오직 정부만이 대북 접촉을 할 수 있었고(‘창구 단일화’), 민간인들은 정부의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북한 사람과 접촉을 시도하기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황석영 작가는 1989년 3월 18일 일본에서 방북 성명을 발표한 뒤 중국 베이징을 거쳐 3월 20일 북한 땅을 밟았다. 그는 분단 고착 이후 북쪽에 들어간 최초의 남쪽 작가였다. 그는 나중에 수감 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방북기를 펴냈다.

3월 25일에는 문익환 목사가 평양 순안비행장에 발을 내디뎠다. 문익환 목사는 대표적인 재야 민주·통일 운동가였다(1994년 1월 작고했다). 그래서 문 목사의 방북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 사회 전체가 그의 방북을 두고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다.

6월 30일 한국외국어대 4학년 임수경 씨가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 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했다. 분단 이후 남측 학생 대표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7월 25일 문규현 신부가 방북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천주교 신자인 임수경 씨를 국가 탄압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보내어 귀국길을 동행하게 한 것이다. 8월 15일 임수경 씨와 문규현 신부가 손을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두 사람은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에서 남으로 온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마녀사냥에 이은 장기 수감 생활로 커다란 고초를 겪었다. 그들의 가족들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다. 임수경 씨 언니는 직장에서 해고되고, 아버지는 사직 종용과 욕설 전화에 시달렸다.

아래로부터

이들의 방북은 강대국들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고, 남북 지배자들이 그 분단을 고착시켜 온 40년 시간을 끝내기 위한 투쟁이자 자유왕래를 향한 용기 있는 투쟁이었다. 황석영은 방북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반도에서 같은 땅에 살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우리 대중의 편이며 미국에 반대하는 아시아 대중의 편이며 무엇보다 반세기 동안이나 헤어져서 피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편입니다.”

1989년 방북 투쟁은 1987년 6월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대파업 투쟁이 열어젖힌 민주주의 공간 속에서 진행됐다. 거대한 대중 투쟁 덕분에 군부독재 시절에 철저하게 억눌려 있던 일들을 상상하고 현실화할 가능성이 생겨난 것이다.

1960년 4월혁명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한 민주주의 운동은 민족적 요구도 제기했다. 학생과 민중은 이렇게 외쳤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1988년 올림픽 공동 개최 요구 투쟁을 시작으로 통일 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노태우는 아래로부터의 통일 운동 분출에 ‘창구 단일화’ 조처로 대응했다. ‘대북 제의나 접촉의 창구는 정부로 일원화돼야 한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통일 운동을 불허하겠다는 것이었다. 1988년 6월 10일 학생 1만여 명이 남북 학생 회담 성사를 위해 판문점으로 가려 하자, 경찰이 원천 봉쇄했다. 890여 명이 연행되고 3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1988년 6.10 남북 학생 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역 앞 도로에서 연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9년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자, 노태우 정부는 그것을 빌미 삼아 ‘공안정국’을 형성해 노동자·민중 운동을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3월 30일 노태우 정부는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128일 파업 투쟁’)에 ‘아침이슬’이라는 작전명으로 경찰력을 전격 투입했다. ‘공안정국’이 본격화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4월 14일 새벽 〈한겨레〉 리영희 논설고문이 구속됐다. 한겨레 신문사가 방북 취재를 위해 북한의 초청이나 입국 허가를 타진한 것을 두고 "반국가단체 지역으로 탈출을 예비음모했다"는 혐의를 걸었다.

정부의 태도는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의 방북 때와는 180도 다른 것이었다. 정주영은 1989년 1월 24일 방북해 북한 정부 측과 금강산 사업에 합의하고 2월 2일 남쪽으로 돌아왔다. 정주영의 방북은 노태우가 격려하고 ‘6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이 지원했다.

임수경 씨는 평양 축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차가운 감옥에 갇혔지만,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었던 박철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렇듯 국가보안법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남북 자유왕래 운동은 탄압하고, 그 사람이 지배계급의 일원이라면 관용했다.

노태우 정부가 ‘공안정국’을 조성해 운동을 탄압하자,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꽁무니를 뺐다. 현대중공업 파업에 경찰력이 투입되던 날 당시 야당 대표 김영삼은 문익환 목사를 강하게 비난했다.

“남북한의 긴장 상황에서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진정한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방북 중인 문 목사는 북한에서의 활동에 대해 귀국 후 국민 앞에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1988년 6월 30일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밝혔던 북한 방문 용의를 철회했다.

문제는 적잖은 좌파들(특히 PD계의 다수)도 방북자들을 비난했다는 점이다. 가령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 따르면, ‘소영웅주의에 젖은 감상적 통일주의자들’이 ‘공안정국 초래에 빌미를 줬다’는 것이다.

가랑잎이 떨어졌기 때문에 겨울이 왔다는 말처럼 틀린 주장이었다. 방북이 없었더라도 노태우 정부는 노동운동을 공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1987년 이후 최고 수위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고양기에 접어들었던 해였다. 노태우 정부는 형식적 제스처만으로 이 투쟁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물리력을 사용해 운동을 분쇄해야 한다는 쪽으로 지배 방식을 굳히고 있었다. 그게 바로 ‘공안정국’, 즉 일반화된 탄압 물결이 시작된 진정한 배경이었다. 따라서 일부 좌파의 이런 종파적 입장은 방북자들에 대한 혹심한 마녀사냥과 국가 탄압에 맞서기를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과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은 서로 밀접히 연관돼 있다. 하나에서 밀리면 다른 하나에서도 밀리기 쉽다. 1989년 봄 노태우가 본격적인 공안탄압을 자행하면서 노동자 운동은 1990년 봄부터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

지난해 4월 남북 정상들이 손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러나 남북 지배자들은 여전히 남북 주민의 자유왕래를 허용하지 않는다.

가자! 북으로”도(북한 방문 등), “오라! 남으로”도(탈북민 환영) 안 되고, 오직 남북 정상만이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적 요구의 하나인 자유왕래의 견지에서 보면, 같은 민족의 일원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며 언제든지 상호 방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이산가족 상봉조차 ‘이벤트 벽’을 넘지 못했다.

남과 북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거주할 자유도 인정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탈북민 김련희 씨의 귀환 요구를 묵살했다. 탈북자에 대한 위선적인 선별 수용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북한 당국의 방침도 이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가자! 북으로”도(북한 방문 등), “오라! 남으로”도(탈북민 환영) 안 되는 현실은 여전하다. 오직 남북 정상만이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남·북한 정부는 평범한 사람들의 출입국을 철저하게 규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남북 자유왕래 보장은 노동자 운동이 지지해야 할 민주적 요구 중 하나다. 1989년 남북 자유왕래를 위한 투쟁을 오늘날에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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