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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보정당사 ③ 통합진보당

2011년 11월 27일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하 참여당 또는 참여계)의 통합 안건이 통과됐다. 12월 민주노동당+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참여당이 합당한 통합진보당이 창당했다.

2011년 12월 11일 통합진보당 출범식 ⓒ이미진

세력 분포에 따른 과도기적 당직 배분 비율을 보면, 세 당의 상대적 세력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 55퍼센트, 참여당 30퍼센트, 새진보통합연대 15퍼센트. 새진보통합연대의 당직 배분 비율이 가장 낮은데, 진보신당이 9월 당대회에서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안을 부결시켜 그 당의 일부(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이 주도)만이 탈당해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했기 때문이다.

세 당의 당원 구성과 계급 기반은 이질적이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사회적 구성은 압도적으로 노동자들이었고, 둘 다 노동조합 기반이 있었다. 두 당은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반면, 참여당은 이 당들과 계급적·사상적으로 이질적인 세력이었다. 참여당의 강령은 “보편적 복지제도 실현”을 약속하지만, 터놓고 친자본주의적인 내용도 담고 있었다. 또, 노무현 정부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진보적 노동자 당원들도 일부 있고 당 지도부에 노동조합 출신 인사들이 더러 있었지만, 노동조합 기반은 없었다. 그리고 현실 투쟁 속에서의 실천 문제, 즉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 하나의 조직으로서 참가하거나 연대하지 않았다. 그 당의 공직선거 후보자들은 대체로 (하층보다 상층) 중간계급 소속이 많았다. 즉, 참여당은 노동자 정당이 아니라 명백한 친자본주의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이 점을 근거로 많은 좌파들은 통합진보당이 노동자 정당이나 진보 정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이런 일면적 성격 규정보다는 더 복잡하고, 모순도 컸다.

통합진보당의 강령은 2000년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의 좌파적 개혁주의 강령에 견줘서뿐 아니라 2011년 6월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채택된 주류 개혁주의 강령에 견줘도 더 온건했다. 참여당도 합의할 수 있어야 해서다. 물론 민주당처럼 시장경제 확장을 표방하지는 않았다.

재정과 인력을 어느 계급에서 충원하는가 하는 점, 즉 당의 사회적 기반을 보면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의 기반이 이전보다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만만찮았다. 당 기구들에서 중간계급 지향적 인사들이 전보다 많아졌지만, 당원들은 노동계급 소속이 다수였다. 물론 통합진보당으로 새롭게 유입된 당원들은 수동적이었고, 계급투쟁에 고무받아 입당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특정 목적(비례후보 투표 등)이나 선거 기대감으로 입당한 경우들이 많았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은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세력과 연합한 민중주의적(좌파적 포퓰리즘)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2012년 총선

2012년 4월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13석을 얻었다. 진보 정당 역사상 최다 의석이었다.

총선은 정치적 양극화를 보여 줬다. 당시 집권당인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이 152석을 얻어 제1당 지위를 유지했다.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측과 달리, 민주통합당(민주당의 전신)은 127석을 얻어 2위에 그쳤다. 아직도 생생한 민주당의 배신적 전력과 미덥지 못한 개혁 약속 때문이었다. 많은 진보 지지자들이 당시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김진표를 ‘X맨’이라고 부르며 사퇴를 요구했다. ‘X맨’은 게임에서 일부러 실수해 자기 팀을 지게 만드는 노릇을 하는 자를 일컫는 은어였는데, 김진표는 평균적인 새누리당 정치인 못지 않게 보수적인 자였다.

덕분에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공간이 넓어졌다. 통합진보당은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한 대중적 반감의 수혜자였다. 정당 투표에서 219만 8,405표(10.30퍼센트)를 얻어 6명이 비례 의원이 됐다. 지역구 선거에서도 민주당과 후보 조정 협상을 한 덕분에 7명이 당선했다.

통합진보당의 으뜸 총선 방침은 민주당과의 선거 연합(당시 용어로 야권연대)이었다.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2012년 1월 중순경 민주당에 야권연대를 공식 제안했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정당 지지율에 따라 선거구 지분 배분과 후보 조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야권연대를 아예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전술 부재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전술에서 불가피한 타협과 배신적 타협을 구분할 줄 안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는 (1) 어쩔 수 없는 경우에, (2) 공동 집권을 목표로 하지 않고, (3) 그저 특정 선거구(들)에 한정해, (4) 후보 단일화 수준의 제휴를 하면서, (5) 정치적 비판을 삼가지 않는 전술적 야권연대 방침을 내놓은 바 있다.

또, 모든 야권연대가 민중전선 전략(이하 국민연합 전략)인 것은 아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200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재건공산당과 민주당의 선거 연합 필요성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옛 공산당의 비교적 보수적인 다수파를 흡수한 좌파 자유주의 정당이다. 나는 재건공산당 의원들이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에 맞서 때로는 민주당 의원들과 연대 투표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라고도 썼다. 왜냐하면 다른 조건은 일단 제쳐두고 볼 때, 베를루스코니와 우파의 복귀를 재건공산당이 방조했다는 비난을 듣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도좌파 연립정부의 내각에 참여하는 것은 연대 투표와는 성격이 다른 문제다.”(‘인민전선이 진보운동의 패배를 부르는 이유’, 《마르크스21》 12호, 250∼251쪽)

물론 통합진보당이 재건공산당 같은 급진좌파 정당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통합진보당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의 선거 연합을 반대했다면(물론 그 당의 지도자들은 결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지만) 박근혜의 승리를 방조한다는 비난과 방침 변경 압력을 받았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문제는 통합진보당이 민주당과의 상층 협상에만 의존하고, 일정 수위 이하로 계급투쟁의 억압을 포함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노골적 부르주아 정당(민주당)과 야권연대를 해야 한다는 방침이었다는 점이다. 그리 되면 상층의 전략적 연합을 위해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을 희생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국민연합 전략의 진정한 문제였다.

비례후보 당내 경선 부정

반(反)이명박근혜 정서와 야권연대 덕분에 통합진보당은 선거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고,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데서 터졌다. 노동자연대는 국민연합 전략에 따른 계급투쟁 발목 잡기를 경계했는데, 어이없게도 당내 비례후보 선출 과정에서 있었던 선거 부정이 통합진보당을 집어삼켰다.

2012년 5월 2일 통합진보당 진상조사위원회는 총선 비례대표 후보 선거를 “선거 관리 능력 부실에 의한 ‘총체적 부실·부정선거’로 규정”한다고 발표했다. 온라인 투표와 현장 투표 모두에서 대리 투표 등 부정 투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내 경선에 정당성과 신뢰성이 없었다고 공개 인정한 셈이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등 기성 정당들이 대중적 불신을 사는 이유 하나가 부정부패였다. 그런데 총선에서 13석을 얻어 제3당으로 부상한 통합진보당이 부정 선거로 진창에 빠진 것이다.

역겹게도,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의 원흉인 주류 정당과 당시 주류 언론들이 통합진보당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통합진보당 내부에서 생겨난 오점이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검찰까지 통합진보당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검찰 수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사태를 더 꼬이게 만들 것이었다. 검찰의 개입 목적이 결코 통합진보당 내 민주주의와 쇄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권파는 검찰 수사를 빌미로 자신들의 과오를 덮고 버텼다. 당권파는 2008년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의 집행권을 장악하고 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한 경기동부연합 자민통 계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권파는 진상조사위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쟁 후보들에게 선거 부정의 책임을 떠넘겼다.

실제로 참여계 후보인 오옥만 측이 광범한 선거 부정을 자행했다. 그래 놓고는 비례 후보 당선권 밖으로 밀리자 당내 경선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비열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권파 측이 저지른 선거 부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결국 법정으로까지 갔다. 오옥만은 부정 경선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당권파 측의 선거 부정 행위도 사실로 인정돼 대구지법·광주지법·제주지법 등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에서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판결의 취지는 선거 부정이 없었다는 당권파 측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저 선거 부정이 업무방해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뒤 대법원은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을 파기했다.

필자가 법원 판결을 선거 부정 사태의 진실을 판단하는 결정적 잣대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권파 측이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을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례로 강조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판결의 취지와 최종 결과를 재확인한 것이다.

당권파의 정치는 스탈린주의였다. 스탈린주의는 아무리 온건한 듯해도 사회민주주의와 똑같지 않다. 그러나 국민연합 노선이 실행되는 동안에는 위로부터의 점진적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병폐를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개혁주의 정치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선거 승리 자체가 가장 중요한 당면 목표가 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이 통용된다는 생각이 당권파의 정치적 판단을 좌우했다. 그러다 보니 참여계 같은 기성 정치 세력의 고질적인 폐습을 당권파도 답습한 것이다.

통합진보당 중앙위 파경 사태

비례후보 선거 부정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중앙위원회는 파행을 거듭하다 무기한 정회됐다. 참석 중앙위원의 6분의 1가량밖에 안 되는 당권파가 물리력까지 동원해 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를 훼방 놓다 급기야 단상을 점거하고 대표단을 폭행했기 때문이다.

2012년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당권파 지지자들의 폭력으로 얼룩지다 ⓒ고은이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당권파는 선거 부정을 인정하지 않고, 진상조사위의 조사 결과를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설상가상으로 우파 언론의 마녀사냥은 당권파를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은 개혁주의 언론도 그런 ‘색깔론’에 일부 동조하는 듯한 기사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우파의 징글맞은 ‘색깔 공세’와 자유주의자들의 얄미운 가세가 있다 할지라도 선거 부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당권파가 당에 아무런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권파는 진보 정당에 기대되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 자체를 깡그리 무시했다. ‘목적(결과)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식의 정치가 얼마나 오만하고 무모한지를 보여 줬다. 그들은 거의 모든 언론들이 취재하고 있던 중앙위원회를 폭력적으로 중단시켰다.

개혁주의가 “‘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만한’ 요소들을 앞세우는 온건하고 조심스러운” 정치라면, 스탈린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정서를 거의 또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거만하고 인정머리 없는”(존 몰리뉴,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 책갈피) 정치라는 점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통합진보당 대표 선거

‘한 지붕 두 가족’이 된 상태에서 7월 통합진보당 대표 선거가 실시됐다. 강병기 후보와 강기갑 후보가 경선했다.

강병기 후보는 자주파 진영의 부산·울산·경남연합을 기반으로 해서 출마했다. 당권파(경기동부·광주전남연합)도 강병기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혁신’에 미온적이거나 저항해 온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는 이석기·김재연 의원 사퇴 등 선거 부정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진보 정당을 자체 정화하기 위한 조처를 내놓지 않았다.

반면, 강기갑 후보는 참여계·새진보통합연대·인천연합 등을 기반으로 해서 출마했다. 강기갑 후보는 선거 부정 등에 대한 철저한 혁신을 말하며, 패권주의를 방지하고 투명하게 당을 운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강기갑 후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당 혁신의 소명을 요구받았다. 강기갑 후보가 이겼다. 이제 혁신파가 신당권파가 됐다.

신당권파 지도부의 당 혁신에는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당원 제명이(국회의원직이 아니었다)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당 혁신을 위해 불가피했다. 두 의원이 의원직 사퇴를 거부하며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당 혁신의 중요한 잣대 하나가 두 의원에 대한 처리 문제가 됐다.

당시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도 5월 17일 통합진보당 혁신을 요구하며 통합진보당에 대한 조건부 지지 철회를 결정하고는, 통합진보당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제명안은 2012년 7월 26일 통합진보당 의원총회에서 최종 부결됐다. 이제 통합진보당의 분열은 시간 문제였다.

노동자연대(당시 명칭은 노동자연대다함께)는 바로 이때 단체로 당을 탈당했다.

통합진보당의 분당

2012년 9월, 창당 9개월 만에 통합진보당이 분열했다. 그전에 이미 당원 6000여 명이 탈당하거나 당비 납부를 정지했다. 구당권파가 부정·부실 선거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일절 기피할 뿐 아니라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에 대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8월 13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 철회”를 결정했다. 구당권파의 종파주의로 인해 진보 정치 운동 전체가 불신받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구당권파는 이 결정을 두고 “반노동자적”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조직적·물질적 기반을 제공해 온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통해 “지지 철회”를 결정했는데도 말이다. 구당권파는 당이 운동을 대표한다고 본다. 그래서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은 죄다 “반노동자적”이고 “개량화 음모”라는 식으로 이견과 비판을 억누르려 했다.

구당권파는 분당 주도 세력에 참여계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개량화 음모”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참여계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결코 믿지 못할 자들이었다. 그러나 구당권파야말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당내 좌파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한 장본인이었다.

민주노총이 지지를 공식 철회하고 혁신파(진보혁신모임; 2012년 10월 창당한 진보정의당의 주축 세력)들이 당을 떠났다.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재분화를 알리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두 세력은 2003년 이후 민주노동당 안에서 동거하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결별했다가 2011년 통합진보당으로 재규합했다가 마침내 결정적으로 분리했다.

분화 과정에서 정치적 논쟁도 있었지만, 당시에 아직은 제국주의와 북한에 대한 태도 등을 둘러싼 정치적 차이로 본격적인 논쟁을 하지는 않았다. 당장은 선거 부정을 둘러싼 책임 문제를 놓고 감정적 소모가 엄청났고 서로에 대한 원한이 깊어졌다. 당시 함축적이 돼 있던 두 세력 사이의 정치적 차이는 그 뒤 각각 독자적 정당을 만들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구당권파가 주도하는 통합진보당

반대파들이 거의 다 떠난 이제 통합진보당은 구당권파가 주도하는 자민통 정당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계급 기반이 있었다. 물론 경선 부정 사태를 겪으며 노조 상층 간부 기반을 상당히 잃었다.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은 개혁주의의 진정한 등뼈다. 이들의 존재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 중 하나인 노동조합이 없다면 이들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선거 부정 사태에서 구당권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깡그리 무시했다. 이것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분노를 크게 샀다.

그럼에도 구당권파는 지역과 기층 노동조합들에서 만만찮은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구당권파가 주도하는 통합진보당은 노동자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이 사소하지 않은 이유는,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스탈린주의 정당과도 때때로 공동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국가 탄압을 받는다면 방어해야 한다. 노동자연대는 박근혜 정부의 이석기 전 의원 구속과 통합진보당 해산 공격을 확고하게 반대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통제하는 통합진보당이 노동자 정당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강점임과 동시에 아킬레스건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남한 노동계급뿐 아니라 북한 지배 관료의 의지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 경쟁 정치세력들, 가령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비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을 능력이 현저히 약해진다.

혁신파의 신당 창당

구당권파의 종파주의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했다면, 혁신파는 비교적 광범한 노동 대중의 당 혁신 바람을 상징했다. 분당 전 실시한 당 대표 선거에서 민주노총 산별노조 대표자 10명이 강기갑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혁신파는 통합진보당 내부 혁신이 실패하자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밝혔다. 유시민·천호선 등 참여계 출신의 자유주의자들, 심상정·노회찬·조승수 등 새진보통합연대 출신의 사회민주주의자들, 김성진·이정미 등 인천연합 출신의 연성 자민통 계열이 혁신파에 참여했다.

혁신파는 구당권파의 패권주의 극복과 정당 민주주의 회복을 전면에 내걸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혁신의 방향이 진보 정당을 기성체제에 더 순응시키는 쪽으로 향하고자 하는 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참여계가 대표적이었다. 참여계 리더였던 유시민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창당하기와 “민주당 왼쪽 방” 차지하기 사이에서 두 길 보기를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창당과 “민주당 왼쪽 날개”론을 동시에 말했다. “진보진영이 민주당 왼쪽날개가 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다.” 유시민은 결국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 뒤인 2018년 정의당을 탈당하고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됐다.

그러나 혁신파의 다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쪽으로 정치적 방향을 잡았다. 그럼에도 온건 세력이 혁신파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신당은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보다는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모습을 띠었다.

노동자연대의 엔트리 종료

노동자연대는 2012년 7월 29일 임시 대의원대협의회를 열어 통합진보당에서 즉각 탈당할 것을 결정했다.

혁명가들이 대중적 개혁주의 정당에 가입(또는 가맹)하는 것을 ‘엔트리’(입당) 전술이라고 한다. 혁명가들이 개혁주의 정당과 관계 맺는 방식 중 하나다. 그러나 언제나 엔트리 전술을 통해서만 개혁주의 정당과 관계 맺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전선 전술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혁명가들이 개혁주의 정당에 입당하거나 탈당하는 것은 결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전술 문제다. 따라서 결국은 어떤 타이밍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다.

“[프랑스와 중국의 혁명가들이] 프랑스 사회당이나 중국 국민당에 입당한 것은 그 자체로 범죄는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입당할지만이 아니라 어떻게 떠나야 할지도 알아야 한다. 당신이 계속 그 조직에 의존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은 참을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은 필연적으로 개혁주의, 애국주의, 자본주의의 보잘것없는 수단이 될 것이다.”(Leon Trotsky, The Crisis of the French Section)

사실, 노동자연대는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태가 발생하기 전인 그해 3월에 특별 대의원협의회를 열어 연립정부 구성 즈음에 탈당하기로 시점을 결정했다. 통합진보당의 자주파 계열이 4월 총선에서 약진하면 선거적 성과를 발판으로 삼아 민주당과 대선 공동 대응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겠다는 계획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경제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연립정부는 노동계급의 조건을 공격할 것이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통합진보당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런 공격을 방조하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는 연립정부가 등장하면 즉시 탈당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에 이어 당권파의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통합진보당은 순식간에 정치적으로 황폐해졌다. 선진 노동자들의 정치적 수렴 공간은커녕 환멸과 지탄의 대상이 됐다. 더는 엔트리를 지속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12월 대선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검찰이 통합진보당 서버를 탈취해 가는 등 국가 탄압만 없었다면 노동자연대의 엔트리 종료는 7월이 아니라 5월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7월 26일 통합진보당 의원총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제명안이 마침내 부결되면서 엔트리 종료를 지체할 수 없게 됐다. 7월 29일 긴급하게 노동자연대 특별대의원협의회가 소집됐다. 대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엔트리 종료를 결정했다. 2000년 1월에 시작한 엔트리를 12년 반 만에 최종 종료한 순간이었다.

* 다음에는 정의당을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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