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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크리스 하먼 10주기:
“실천을 위한 길잡이”였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다음 글은 2010년 3월 영국과 아일랜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존 몰리뉴가 동료인 앤디 더건과 함께 써 잡지 《혁명사》에 기고한 글이다. 존 몰리뉴는 크리스 하먼과 41년을 함께 활동했고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와 정당》, 《레닌과 21세기》 등의 저자이다.

한국에서 열린 맑시즘2009에서 연설하는 크리스 하먼 ⓒ임수현

2009년 11월 9일 크리스 하먼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국제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큰 손실이었다. 얼마만큼 큰 손실로 느낄지는 각자의 정치관에 따라 물론 달라질 테지만, 하먼이 주장한 종류의 트로츠키주의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그는 엄연히 [국제] 좌파의 거장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명백한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가 [영국 런던 북쪽의 도시] 왓퍼드에서 16살에 급진화한 이래로 흔들리지 않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살았다는 것이다. 하먼은 죽는 그날까지 활동을 했다. 하먼이 그날 카이로에 있었던 것도 이집트 활동가들이 개최한 ‘사회주의 기간’ 포럼에서 연설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먼은 꽤 소수인 축에 들 것이다. 게다가 하먼은 그 50년 대부분을 유럽에서 가장 크고 활동적인 극좌파 단체의 하나―국제사회주의자들(IS)과 그 후신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 지도부를 지내며 기관지인 〈소셜리스트 워커〉의 편집자(1974년, 1981~2005),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편집자, 이론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1970~1974, 2006~2009) 편집자를 맡았을 뿐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글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하먼은 에르네스트 만델, 토니 클리프, 다니엘 벤사이드 같은 정말 극소수 축에 들 것이다.

하먼의 핵심 사상(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고수,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사상, 자본 자체가 자본주의 위기를 낳는다는 이윤율 저하 경향 이론, 소련과 기타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국가자본주의였다는 분석)에 동의하는 우리에게 그의 업적은 (적어도 최근 시기로 보면) 단연 독보적이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21세기 초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를 잃었다.

크리스 하먼을 기리려면 그의 인격, 혁명적 실천, 지적·이론적 업적을 다뤄야 한다. 먼저 그의 실천적 활동을 다뤄 보고자 한다. 하먼이 가장 크게 기여한 영역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실천이야말로 그의 삶의 절대적 중심이자 이론적 방향키였기 때문이다. 하먼에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수단, 엥겔스의 말처럼 “도그마가 아니라 실천을 위한 길잡이”였다.

하먼은 왓퍼드에서 학교를 다니던 1959년 무렵에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61년 리즈대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이후 IS가 된다)에 가입했다. 1964년 그는 런던대학교 사회과학대학(이하 LSE)의 랠프 밀리반드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다가 전업으로 정치 활동을 하고자 이를 포기했다. 이때부터 하먼의 활동은 가장 흥미진진한 시기에 접어든다. 그는 토니 클리프(역시 LSE에 많은 시간을 투여했다)와 함께 ‘LSE 학생 사회주의자 모임’과 실력이 탁월한 IS 지회를 건설했다. 당시 하먼 주변에 모인 젊은 혁명가로는 리처드 쿠퍼(훗날 출판사 플루토프레스 설립자), 안드레아스 나글리아티(훗날 IS의 산업 조직자이자 중앙위원), 스티브 제프리스(훗날 SWP 산업 조소직자이자 중앙위원), 조앤 스미스, 존 로즈(시온주의를 다룬 저술가이자 현 SWP 당원), 마틴 톰프킨슨, 새비 사갈(시온주의 반대 운동 활동가이자 현 SWP 당원), 마틴 쇼(훗날 사회학 교수) 등이 있었다. 이들은 1967년 LSE 연좌농성을 추진한 핵심 세력이었고 그 농성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영국 학생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하먼은 1960년대의 또 다른 주요 운동인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도 전력했고 연대체 ‘베트남연대운동’의 지도적 인물이 돼 시위 현장에서 여러 번 체포됐고 1968년 ‘베트남연대운동’의 거대한 두 시위를 계획하는 데에도 도움을 줬다. 데이비드 위저리는 《1956~1968년 영국의 좌파》에서 하먼이 당시 운동에서 한 빛나는 구실을 잘 묘사해 두었다.

“우리는 이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하고 크리스 하먼이 LSE 구강당 연단에서 말했다. 연설을 시작할 때 항상 하는 말이었다. 강당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하먼은 스쿠터 헬멧을 흔들면서 연설을 이어갔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1968년은 1793년, 1830년, 1848년, 1917년, 1936년 못지않은 국제 혁명의 해입니다. 국제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30여 년의 패배와 겨울잠 끝에 부활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혁명적사회주의학생연맹’을 발족하러 모인, 너무 일찍 산전수전을 겪어 감수성이 무뎌진 학생 좌파 청중들이 하먼의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를 비타협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먼은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 바르셀로나 항쟁을 결코 허투루 들먹이지 않았다. 전투적인 학생들이 1830년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1970년대 이후 하먼의 실천은 SWP 지도부에서 그가 한 구실을 통해 이뤄졌다. SWP는 언제나 하먼을 조직자, 거리 운동가보다는 필자, 편집자, 연사로 써먹었다. 그의 재능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먼은 실천과의 연관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는 노동계급 투쟁, 당 건설,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제기되는 온갖 형태의 실천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죽기 직전까지 모든 운동의 주요 집회와 행진에 참가했다. 예컨대 하먼은 [사망 19일 전에도] BBC가 파시스트 정당인 영국국민당(BNP)의 대표 닉 그리핀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시킨 것에 항의해 ‘반파시즘연합’이 BBC 방송국 앞에서 연 집회에 참가했다.

하먼의 개성은 SWP나 다른 정치 기구에서 단독으로 지도자 구실을 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면이 있었다. 첫째로 웅변술이 그의 다른 재능만 못했다. 하먼은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상당한 연설 실력을 쌓았지만, 토니 클리프, 던컨 핼러스, 폴 풋의 언변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둘째, 그는 수줍음을 타고 대인관계에 능숙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하먼은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셋째는 위의 성격들과 분명 연관이 있을 텐데, 자신을 지도자로 내세우기를 내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먼이 자신에 관한 것이든 특정 전술·전략에 관한 것이든 당내 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아 하먼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은 곧 그의 장점이기도 했다. 하먼은 조금치도 거만하지 않았고, 개인적 야심이나 엘리트주의와 담을 쌓았으며, 일부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이 보이는 패거리주의([영국] 노동자혁명당의 게리 힐리가 가장 극단적 사례지만 다른 사례도 있다)와도 거리가 멀었다. 하먼이 활동하는 이유는 오직 계급, 대의, 사상뿐이었다.

그러나 하먼이 낯을 가리고 자신을 내세우기를 꺼렸다고만 하면 온당치 않다. 수년 동안 하먼은 나름 유명 인사였다(중년까지 유지한 젊고 멋진 외모가 필시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20년 동안은 탈라트 아흐메드와 누가 봐도 아주 행복하고 안정된 관계를 유지했다. 또 하먼은 그와 막역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친구였고, 특히 맥주 몇 잔을 마신 뒤에는 더 그랬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그의 이론적 업적의 양과 질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하다. 물론 양보다는 질이 훨씬 중요하다. 학자들이 쓴 육중한 책이나 유행을 노린 얇은 책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백배 천배 중요하다. 그럼에도 하먼이 남긴 저술의 방대함은 경이롭다. 웹사이트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에 실린 하먼의 글은 목차만 17페이지나 되고 450개가 넘는다. 이는 테드 그랜트(12페이지, 250개)나 칼 카우츠키(5페이지, 100개), 에르네스트 만델(6페이지, 200개)보다 많다. 물론 이런 식의 비교는 전혀 엄밀하지 않지만 하먼이 대단한 다작가임은 확인시켜 준다.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크리스 하먼, 갈무리, 1994년 11월, 12,000원

하먼의 글은 질적으로도 뛰어나다. 주요 저작이 여섯 권 있다. 첫째는 《동유럽의 관료와 혁명》(1974)으로, 이후 《동유럽 계급투쟁》으로 개정됐다. [국역: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갈무리] 이 책은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라는 토니 클리프의 분석을 동유럽 전체에 적용한 것으로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수립되고 이후 점차 해체되는 과정을 다룬다. 이 책의 핵심 통찰은 동유럽 국가들이 여타의 자본주의 경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윤율 저하 경향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1956년 헝가리 혁명도 탁월하게 분석한다.

그 다음 나온 책은 《패배한 혁명》(1982)[국역: 《패배한 혁명》, 풀무질]이다. 이 책은 20세기의 결정적 사건 하나인 1918~1923년 독일혁명의 역사를 다룬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의 교훈’에서 독일공산당(KPD) 지도부가 1923년 여름과 가을에 금쪽 같은 혁명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가 제공한 이 골격에 하먼은 살을 붙였고 그럼으로써, 혁명의 명운을 건 전투를 맞이하기 전에 미리 혁명적 정당을 건설하고 혁명적 지도력을 다져 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전주곡 격으로 하먼은 독일사민당(SPD)이 점점 개혁주의적으로 후퇴하다 결국 배신하는 과정을 추적·설명한다. 1923년에 독일혁명이 성공했다면 인류가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의 공포를 모면하고 지금쯤 사회주의 사회에 살았을 것이라고 하먼은 믿었다.

패배한 혁명 크리스 하먼, 풀무질, 2007년 04월, 20,000원

《위기를 설명하기》(1982)[국역 정보: 《마르크스21》 12, 13호에 일부 번역돼 있다]는 오랜 전후 호황 끝에 1970년대~1980년대 초에 세계경제를 다시금 엄습한 국제 경제 위기에 부친 저작이다. 이론적 측면에서 이 책은 전후 장기 호황을 상시 군비 경제론으로 설명하는 마이클 키드런의 이론을 《자본론》 3권의 이윤율 저하 경향 이론과 통합했다. 핵심만 간추리면 이렇다. 냉전 시기의 막대한 군비 지출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그에 따른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한 결과, 세계경제가 1940년대부터 1960년대 말까지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는 군비 경제가 경제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미국이 군비 지출을 상대적으로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군비 경제가 보장한 안정적 국제 질서 하에서, 그 군비 경제에 지출하지 않는 독일과 일본이 빠르게 성장해 미국을 추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체제의 근저에 있던 위기 경향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윤율 저하 경향을 부정하는 온갖 주장에 대한 반박도 주목할 만하다.[국역: ‘마르크스의 경제위기론과 그에 대한 비판’, 《마르크스21》 12호]

세계를 뒤흔든 1968 크리스 하먼, 이수현, 책갈피, 2004년 02월, 16,000원
1988년에는 《지난 번의 불꽃 ― 1968년과 이후》[국역: 《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이 출간됐다. 하먼 자신이 혁명가로서 성장하던 초기의 투쟁들을 분석하지만 단 한 치의 자전적 요소도 없는 책이다. 그 점에서 타리크 알리의 자서전 《거리 투쟁의 나날》 등과는 결이 다르다. 하먼은 자신이 설명하는 사건들에서 자신이 한 결코 사소하지 않은 구실을 소개하는 데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음 내용을 강조한다: 1) 1968년의 격변은 전후 호황기의 심대한 사회 변화, 특히 도시화, 프롤레타리아화, 교육 확대에 의해 조건이 마련됐으며, 이런 변화가 미국 최남동부에서 북아일랜드에 이르는 지역의 경직된 기존 사회·정치적 질서를 잠식했다. 2) 1960년대 말의 반란은 언론들의 묘사처럼 학생과 청년들만의 반란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투쟁은 중요했지만, 그 반란은 노동계급의 거대한 세계적 투쟁이었다. 3) [영국 광원들이 46년만에 벌인 파업을 지키기 위해 피켓라인을 세운] 솔트리 코크스 창고, [1970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한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한 칠레의] 산티아고, [미국의] 디트로이트, [1974년 혁명이 일어난 포르투갈의] 리스본 등지에서 6년 동안 투쟁이 분출했지만, 체제가 세계 곳곳에서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받아 노동계급을 다시 주저앉히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4) 혁명가들은 다음 번에 불꽃이 일 때 승리할 수 있도록 이 시기의 교훈을 배워 둬야 한다. 이 책은 1968년을 다룬 숱한 책들 중에 가장 흥미진진하진 않을지 몰라도 분석서로서는 가장 탁월하다.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책갈피, 2004년 11월, 35,000원

《민중의 세계사》(1999)[국역: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는 새천년을 맞이해 쓴 걸작으로, 40년에 걸친 연구와 활동의 성과가 집약돼 있다. 이런 책을 쓰려면 대단히 거만하거나 대단히 명석해야 할 텐데 하먼은 결코 거만한 쪽이 아니었다. 인류 전체의 역사를 크게 왜곡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600페이지 남짓한 책에 담아내려면 방대한 지식뿐 아니라 깊은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의 방법론인 역사유물론을 확실히 꿰고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살아있는 역사 즉, 충돌하는 사회 세력들에 이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민중의 세계사》는 하먼의 사고에서 꾸준히 나타난 세 특징을 종합했다. 세 특징이란 고고학과 초기 인류 사회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여성 차별의 기원에 관한 논쟁에서 비롯한 면도 있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특별한 관심(우파 수정주의 사학이나 로버트 브레너의 “정치적 마르크스주의”를 반박하는 게 동기의 일부였다), 20세기의 계급투쟁과 혁명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관여다. 그 결과물은 빼어나게 일관된 전체를 이루며, 유럽중심주의라는 흔한 함정에 빠지지도 않고, 자본주의의 등장을 독창적이고 철저히 국제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며, 모든 계급사회의 역사가 결국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갈림길로 귀결됐음을 보여 준다. 이 책은 향후 수십 년 동안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귀중한 무기이자 교육 자료로 쓰일 것이다.

좀비 자본주의 : 세계경제 위기와 마르크스주의 크리스 하먼, 이정구, 책갈피, 2012년 05월, 24,000원

끝으로 2009년에 출간된 《좀비 자본주의: 세계경제 위기와 마르크스의 현재성》[국역: 《좀비 자본주의: 세계경제 위기와 마르크스주의》, 책갈피]이 있다. 이 책은 《위기를 설명하기》에서 제시한 분석을 2008년 금융 위기와 뒤이은 세계적 경기 후퇴에 적용한다. 매우 타당하게도, 하먼은 이번 위기로 자신의 주장이 입증됐다고 봤다. 십수 년 동안 자본주의 옹호자들이나 다른 좌파들은 자본주의가 1950년대에 견줄 만한 새로운 지속적 팽창의 시기에 접어 들었다거나 근본적 모순을 극복했다고 주장했지만 하먼은 이를 거부했다. 이제 하먼은 이렇게 주장한다. 은행가들이 탐욕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위기는 은행가의 탐욕 탓만이 아니고, 규제가 불충분한 탓만도 아니며, 금융 위기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이번 위기는 전체 자본주의 체제의 심층적 위기이고 여전히 이윤율 하락에 뿌리가 있다. 게다가 더 악화하고 있다. 자본의 집중이 낳은 (AIG 같은) 거대 기업들이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커서 [정부가 개입한 결과], 예전처럼 경제 위기로 인해 이윤율이 회복할 만큼 자본이 파괴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먼은 ‘임박한 재앙과 최종적 위기’를 선언하라는 (일부 SWP 당원들이 내민) 유혹에도 저항했다. 오히려 그는 미래의 구체적 양상은 예측할 수 없고 미래는 언제나 계급투쟁 결과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좀비 자본주의》가 한 장 한 장 세심하게 쓴 ‘명작’임을 덧붙여야겠다. 가치와 사용가치를 설명하는 첫 장은 짐작하건대 마르크스 이래 그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한 글로, 그가 마르크스의 이론과 현대 자본주의 본질을 얼마나 깊게 꿰뚫고 있는지 보여 준다.

위 책들은 하먼이 40년 동안 쉬지 않고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쓴 주요 논문들을 기초로 삼거나, 발전시킨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논문들 다수가 집필 당시 구체적 정세에 필요했던 정치적·이론적 문제를 다뤄 우리의 정치적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일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크리스 하먼 선집 : 시대를 꿰뚫어 본 한 혁명가의 시선 크리스 하먼, 최일붕, 책갈피, 2016년 07월, 18,000원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패배했나’(1967)[국역: ‘러시아혁명은 어떻게 패배했나’, 《크리스 하먼 선집》, 책갈피]: 러시아혁명 50주년에 쓴 이 글은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러시아혁명이 변질과 스탈린주의의 부상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가장 잘 설명한 글이다[오늘날에 비해 제한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68년 투쟁의 시기에 대단히 유용했다.

정당과 계급’(1969)[국역: ‘정당과 계급’, 《크리스 하먼 선집》, 책갈피]: 1968년 5월의 사건들과 다른 투쟁들은 필연적으로 정당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한 편에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입으로만 떠드는 트로츠키주의 종파들이, 다른 한 편에는 [당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자유지상주의적 자발성주의자들이 활개를 쳤다. 하먼은 레닌만이 아니라 그람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정당 논쟁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고,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그 주제를 다룬 핵심 문헌으로 남아 있다.

스탈린주의 국가들’(1970): 전망을 담은 이 짧은 글은 이후 하먼이 소련과 동유럽에 대해 쓴 모든 글의 단초가 담겨 있고, 그 국가들이 맞이할 최후를 대담하게 예견한다.

유럽 혁명적 좌파의 위기’(1979)[《세계를 뒤흔든 1968》에 실린 ‘16장 유럽 좌파의 위기’가 이 논문의 축약이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의 격변기 동안 전도유망해 보이는 혁명적 조직이 여럿 등장했다. 일부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이었고, 일부는 반(半) 마오주의 조직이었다. 후자는 특히 이탈리아에서 융성했다. 하지만 투쟁 수준이 가라앉자 많은 수가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와해했다. 이 논문은 이런 현상에 대해 경각심을 심어 주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여성 해방과 혁명적 사회주의’(1984)[국역: ‘여성해방과 계급투쟁’, 《크리스 하먼 선집》, 책갈피]: 1970년대에 여성 해방 운동이 부상하면서 한 세대의 사회주의자들이, 그것도 대다수는 처음으로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만만치 않은 쟁점을 다뤄야 했다. 열띤 논쟁과 혼란이 숱하게 벌어졌다. 하먼이 논쟁에 개입하며 쓴 이 논문은 여성 해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가장 충실하고 명료하게 설명한 글의 하나로 남아 있다.

글라스노스트: 폭풍 전야’(안제이 제브로프스키 공저, 1988)와 ‘폭풍이 일다’(1990)[국역: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 고르바초프와 베를린 장벽 붕괴에 부친 글이다. 당시 거의 모든 좌파가 취했던 입장(고르바초프에 대한 환상이 팽배했다)과는 다르게 이 탁월한 논문들의 주장은 이후 사태 전개에 의해 옳았음이 입증됐고, 동구권 국가들이 몰락하는 상황을 국제사회주의 경향 전체가 사기 저하 없이 헤쳐나가도록 방향을 잡는 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 크리스 하먼, 책갈피, 2011년 03월, 4,900원
‘예언자와 프롤레타리아’(1994)[국역: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 책갈피]: 하먼이 쓴 많은 논문들 가운데 가장 필수적인 하나를 꼽으라면 이것일 것이다. 당시 국제 좌파들은 이슬람 근본주의, 즉 이슬람주의라는 문제와 막 씨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좌파들 사이에서] 이슬람주의가 진보적인 것으로만 그려졌다. 마르크스의 종교 이론을 기초로 삼고, 무슬림 세계의 발전 과정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는 하먼의 꼼꼼한 분석은 이슬람주의 현상이 사실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이질적임을 드러낸다. 9·11과 ‘테러와의 전쟁’에 직면해 서방과 동방의 숱한 좌파들을 망친 그릇된 두 주장, 즉 이슬람주의는 파시즘이라는 주장과 전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주장을 모두 비판하며 전혀 다른 노선을 탐색한다.

그러나 위 논문들은 하먼의 방대한 저작 중 극히 일부만을 선별한 것이다. 트로츠키처럼 하먼도 문헌보다는 사회관계를 분석하기를 선호했지만, 하먼에게는 철학자의 면모도 있었다. ‘철학과 혁명’(1983)[국역: ‘철학과 혁명: 알튀세르 비판’, 《크리스 하먼 선집》, 책갈피]은 알튀세르에 관한 논쟁을 일단락한 글이다. 하먼은 역사유물론을 둘러싼 논쟁에 개입해 ‘토대와 상부구조’(1986)[국역: ‘토대와 상부구조’, 《자본주의 국가―마르크스주의의 관점》, 책갈피]를 썼고, 학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그람시를 곡해하는 데 맞서 ‘그람시 대 유러코뮤니즘’(1977)[국역: 《곡해되지 않은 그람시》, 노동자연대]을 썼다. 하먼은 또한 인류학자로 변신해 여성들의 섹스 파업 신화에 대한 허황된 주장을 논박하기도 했다. 하먼은 대중 교육자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원리’(1979)와 ‘광란의 경제학’(1995)[국역: 각각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책갈피; 《크리스 하먼의 마르크스 경제학 가이드》, 책갈피]을 썼고, 말 그대로 무수히 많은 기사를 그의 이름으로, 혹은 이름 없이 〈소셜리스트 워커〉와 〈소셜리스트 리뷰〉에 실었다. 이 모든 글에서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을 가장 쉽고 명료하게 밝히는 그의 언어다.

하먼은 ‘박식가’ 그 이상이었다. 하먼이 능통한 분야보다 그렇지 않은 분야를 열거하는 편이 더 쉽다. 스포츠, 시각예술, 대중문화가 당장 떠오른다. 하먼 글의 뚜렷한 특징은 모든 학문적 경계를 초월한다는 것이고, 또 정치적 성장이 남달리 빨랐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22살에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서 서평을 썼고(콰메 은크루마가의 《컨시언시즘》, 로버트 블라우너의 《소외와 자유》, 장폴 사르트르의 《방법의 탐구》 등), 27살에 만델과의 논쟁에서 선방 이상을 해냈다(일관되지 못한 에르네스트 만델’, 1969). 가끔 하먼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보수적인 면도 보였다. 그의 이론이 마치 방향 전환에 시간이 걸리는 바다 위 거선 같다는 점에서 말이다. 예컨대 하먼은 1970년대 후반 노동자 투쟁이 하강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과 그것의 중대한 함의를 토니 클리프보다 늦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하먼의 사고는 언제나 유연했고 생애 막바지에는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쟁점을 경제 분석에 포함시키려 했다. 하먼은 말할 것도 없이 원칙적 국제주의자였지만, 그의 관심사는 놀라울 만큼 국제적이었다. 그는 미국, 멕시코, 라틴 아메리카,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중동, 인도, 중국, 한국 등 무수히 많은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 지역 대부분을 방문했고 관련 글을 썼다. 대부분 국제사회주의경향 단체들을 위해 한 활동이다. 하먼의 부고에 세계 도처에서 인상적인 조사가 쏟아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 기간 SWP는 당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네 명이나 떠나 보냈다. 토니 클리프가 맨 처음이었고, 던컨 핼러스, 폴 풋, 크리스 하먼이 그 뒤를 따랐다. 토니 클리프는 창립자이자 가장 강력한 정치 지도자였다. 그에 걸맞게 토니 클리프의 장례식은 당원들이 주로 참석했다. 던컨 핼러스는 아마 모두에게 가장 덜 미움받고 나이 든 핵심 당원들에게는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폴 풋은 당 바깥에서 가장 유명했고 광범한 좌파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장례식은 아마 참가자가 가장 많고 그 구성도 가장 다양했을 것이다. 반면 크리스 하먼의 장례식에는 개인적으로 큰 슬픔에 휩싸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가족뿐 아니라 당원들도 마치 가족을 잃은 듯이 비통해 했다. 하먼의 죽음이 너무 뜻밖이기도 했지만, 더 주되게는 한 세대의 당원들이 하먼과 함께 활동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클리프의 자식이지만 하먼은 맏형이었다. 그런 형, 그런 동지를 두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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