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왜 플라스틱과 비닐을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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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생물들이 비닐봉지에 갇힌 모습 등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다. 마땅하게도 해양 오염에 대한 대중적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화석연료를 가공하면서 생기는 부산물이 어떻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고, 그 후 석유 화학 업계가 어떻게 플라스틱 소비를 부추겼는지 에이미 레더가 살펴본다.
플라스틱은 나쁘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이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상식이 됐다. 우려의 목소리가 들끓는 것도 당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BBC 다큐멘터리 “블루 플래닛”[한국에서는 “아름다운 바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에서 향유 고래의 뱃속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득하고, 알바트로스가 새끼에게 플라스틱을 먹이고, 거북이가 비닐봉지에 갇힌 모습 등을 보면 충격을 받는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억만장자들을 위해 2016년에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1억 5000만 톤이 넘는 플라스틱이 바닷속에 존재하며 매년 800만 톤씩 더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된다.
플라스틱 조각 5조 개가 바닷속에 있고 계속 증가 중이다. 이대로라면 2050년에는 플라스틱의 무게가 바닷속 모든 물고기의 무게를 합한 것보다 더 클 것이다.
그런데 모순이 있다. 플라스틱은 환경에 큰 해를 끼치지만 동시에 의학과 위생, 식품 보존, 수도 등의 분야에서 여러 발전을 가능하게 한 굉장한 소재다.
우리는 플라스틱이 이 세계와 동떨어진 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플라스틱 이야기는 정말이지 자본주의가 무엇이 잘못됐는지 핵심적으로 보여 준다.
플라스틱은 화석연료 산업의 부산물이다. 모든 플라스틱의 99퍼센트는 석유와 가스에서 나오는 화학물질로 생산된다. 플라스틱의 생산을 추동한 것은 이 체제의 중심에 있는 끊임없는 이윤 추구였다. 전쟁은 플라스틱 개발을 더욱 부채질했고, 국가 투자로 생산 확대를 보조했으며, 기득권자들은 우리가 플라스틱을 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겼다.
플라스틱 생산을 추동하는 것은 “소비자 수요”가 아니다. 즉, 소비자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플라스틱 생산은 현대 산업 자본주의의 화석연료 기반 경제와 단단히 얽혀 있다. 화석 연료 기반 경제는 기후 위기의 근원이기도 하다.
플라스틱의 기원은 19세기 중반에 개발된 셀룰로이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셀룰로이드는 식물에 있는 천연 고분자 물질인 셀룰로오스를 기반으로 하며, 상아를 대체할 용도로 개발됐다. 최초의 진정한 합성 플라스틱은 베이클라이트로, 1907년 한 연구실에서 셀락의 대용품으로 발명됐다. 이후 대량생산의 길이 열렸다. 과학자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새롭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세계 곳곳에서 과학자들이 개발한 새로운 물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석유의 여러 쓰임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안 앵거스가 《인류세를 마주하며》에서 개괄하듯이, 석유 기업들이 연료 시장을 한창 확장하는 동안 화학 산업은 석유 정제 과정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완전히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고 있었다.
부산물
《플라스틱, 유독한 사랑 이야기》[국역 《플라스틱 사회》]를 쓴 수전 프라인켈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석유 재벌] 존 D 록펠러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록펠러는 자신의 정유 공장을 바라보다가 몇몇 굴뚝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봤다. 그는 무엇이 타고 있는지 물었고, 정제 공정의 부산물인 에틸렌 가스라는 답을 들었다. 그러자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것도 낭비돼선 안 돼. 저걸로 뭘 할 수 있을지 알아내 봐.”
사실이든 아니든 이 이야기는 현대 석유화학 산업의 기원을 요약적으로 보여 준다. 그것은 땅에서 뽑아올린 모든 화석연료를 이윤 추구에 이용해야 한다는 신조였다.
연소되는 에틸렌에서 생산할 수 있는 ‘무언가’는 1933년에 발견된 폴리에틸렌이었다. 그것은 기존에 알려진 다른 중합체들과는 너무 달라서 아무도 그 용처를 상상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폴리에틸렌은 가장 흔히 쓰이는 고분자 물질이 됐다. 폴리에틸렌은 저렴하고, 내구성이 높고, 유연했다.
오늘날 석유화학 부문에서 가장 큰 기업인 다우듀폰, 엑슨모빌, 셸, 셰브런, BP, 시노펙은 화석연료와 플라스틱을 모두 통합 생산하는 기업들이다. 이들의 뿌리는 대부분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석유화학 산업체들은 서로 제휴를 맺거나 수직계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전후 일상 생활에서 플라스틱을 널리 사용할 토대를 마련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은 플라스틱의 다재다능함을 뽐낼 기회였다. 폴리에틸렌, 나일론, 아크릴, 폴리스티렌 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주요 플라스틱들이 전쟁 중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전쟁 중에 석유화학 공장을 건설하거나 증설하는 데 30억 달러 이상을 썼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석유화학 기업들은 이 공장들을 헐값에 살 수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플라스틱 생산량이 4배로 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러한 생산 능력에 걸맞는 판매처가 필요했고, 그래서 플라스틱이 소비자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플라스틱 기업들의 계획이었다. 듀폰에는 이미 1943년 초부터 당시 전쟁에 쓰이던 플라스틱으로 가정용품 시제품을 개발하는 부서를 따로 뒀다.
부력과 절연성이 있어서 미국 해안경비대의 구명보트로 쓰이던 폴리스티렌은 이제 휴대용 컵과 아이스박스에 쓰였다. 폴리에틸렌은 뛰어난 고주파 절연 능력을 잠시 제쳐두고 샌드위치나 드라이클리닝한 옷을 포장하는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초창기 플라스틱 업계의 한 임원은 회상하기를,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아직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상 거의 없었지만, 장차 무엇이든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플라스틱 소재의 제품군을 확장시켜서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분명했다.
장난감
그래서 플라스틱은 우리의 집, 자동차, 옷, 장난감, 일터, 심지어 우리의 몸 속으로까지 고요히 파고들었다.
오늘날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 문제를 논하면서 대중적 소비주의와 일회용품 소비 문화 탓으로 돌리는 일이 매우 흔하다. 하지만 일회용품 소비 문화는 소비자가 이끌었기보다는 거기에서 이익을 얻는 기업들에 의해 조장되고 추진됐다.
석유·가스 산업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이 놀라운 물질들은 우선 새로운 제품으로 변신해야 했다. 그 다음에는 이 새로운 용처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내야 했다. 여기서 플라스틱 산업은 큰 문제에 직면했다. 플라스틱은 강하고 내구성이 좋은 것이 특징이다. 플라스틱 제품은 오랫동안 쓸 수 있기 때문에 제품을 또다시 사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플라스틱 업계는 우리가 더 많은 플라스틱을 원하고 필요로 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그리하여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이 탄생하고 ‘쓰고 버리는’ 시대가 열렸다. 1956년에 열린 ‘플라스틱 산업 회의’에서 한 발표자는 청중석에 있는 플라스틱 제조업자들에게 말했다. “쓰레기 수거차에 여러분의 미래가 달려 있다”.
처음에는 일회용품이 잘 팔리지 않았다. 당시 세대가 대공황과 전쟁을 거쳐 왔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는 “어떻게든 고쳐 쓰자”는 표어 대로 사람들이 아무 것도 낭비하려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새로 산 플라스틱 제품을 한 번 쓰고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
이런 태도를 바꾸기 위한 대대적인 언론 캠페인이 벌어졌다. 주간지 〈라이프〉에 실린 일명 ‘쓰고 버리는 생활’을 찬양하는 기사가 전형적인 사례다. 이 기사에 실린 삽화에는 접시, 포크, 나이프, 봉지, 재떨이, 개밥그릇, 들통, 바비큐 그릴 등등 각종 일회용 제품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젊은 부부와 어린 아이가 두 팔을 치켜든 채 기뻐하고 있다. 이 기사의 필자는 이 모든 물건들을 설거지하고 닦으려면 40시간이 걸릴 테지만 이제는 “어느 주부도 그런 성가신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썼다.
마찬가지로 일회용 플라스틱의 대명사인 비닐봉지는 1970년대 중반에 처음 소개됐을 때 인기가 없었다. 봉지를 벌리려면 계산원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야 했는데 이를 고객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대형 마트들이 경제 논리에 넘어 갔다. 종이봉투는 비용이 3~4배 비쌌는데, 일단 한두 대형마트가 비닐봉지를 쓰기 시작하자 모두 비닐봉지로 바꿨다.
일회용
라이터, 펜, 면도기, 빨대 등등 여러 상품들이 한 번 쓰고 버리도록 다시 설계됐다. 오늘날 생산되는 모든 플라스틱 제품 중 절반은 일회용이고, 그중 핵심은 포장재다. 포장재는 전체 플라스틱 생산의 26퍼센트를 차지한다.
자본주의는 사실상 영원히 썩지 않는 물질로 한 번만 쓰고는 버릴 물건들을 만든다. 자본주의의 비합리성을 이보다 더 잘 요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는 말 그대로 플라스틱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최근 실린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 이후로 생산된 플라스틱이 총 83억 톤에 달한다. 그리고 매년 전 세계적으로 약 4억 톤이 추가로 생산된다. 생산량은 계속 늘고 있다.
전 세계에서 1년에 사용되는 비닐봉지는 5000억 장에서 1조 장 사이 어디 쯤이다. 1분에 100만 장 이상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일회용 플라스틱을 줄이길 바라는 사람들이 비닐봉지를 주요 표적으로 삼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최근 과학기술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는 면으로 된 에코백이 일회용 비닐봉지보다 친환경적이려면 에코백을 버리기 전에 131번 이상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에코백의 환경 비용은 대부분 목화를 재배하면서 생긴다. 순전히 에너지 측면에서만 보면, 철제 물병은 만드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500번 넘게 써야만 일회용 물병보다 환경에 이롭다.
바다로 흘러가는 플라스틱을 줄이는 또 다른 방법은 더 많이 재활용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재활용을 위해 수거되는 플라스틱은 전체의 14퍼센트에 불과하다. 실제로 재활용되는 것은 그 중에서도 3분의 1(전체 생산의 5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즉 오염물질이 되어 자연으로 흘러들어 간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론적으로는 모든 플라스틱을 재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실현되기에는 장애물이 많다.
재활용 시설
양질의 재활용 시설이 너무 부족하다. 플라스틱은 종류가 다양하며, 종류별로 분류해서 재활용해야 한다. 적외선 센서를 쓰면 이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사우스 런던 사우스워크에 있는 최첨단 폐기물 및 재활용 센터에서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이동하는 플라스틱에 빛을 쪼인다. 그리고 반사된 빛으로 종류를 판별하고 공기 분사기로 플라스틱들을 종류별로 각각 수집 지점으로 밀어 넣는다. 이 시설에는 가장 재활용하기 까다로운 비닐봉지와 검정색 플라스틱 식품 용기를 재활용할 수 있는 설비도 있다.
다른 지역 시설들은 훨씬 조악하다. 대부분의 분류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재활용되는 플라스틱이 거의 없다.
가장 정교한 가공 센터들에서도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바로 혼합 플라스틱이다. 제조업체들은 혼합 플라스틱을 선호한다. 재활용 플라스틱에 대한 산업적 수요도 있어야 한다. 많은 제조업체들이 요구하는 투명한 플라스틱 포장재는 재활용으로 생산하기 매우 어렵다.
영국의 플라스틱 쓰레기 상당수는 재활용을 위해 해외로 보내진다. 그러나 폭로된 바에 따르면 많은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그냥 소각되거나 터키, 말레이시아 등지의 매립지에 버려진다. 중국은 최근 ‘외국 쓰레기’를 더는 받지 않겠다고 했고, 이 때문에 거래업자들은 재활용 쓰레기를 받아 줄 다른 나라들을 찾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제조업체들은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에서 이득을 챙기려 한다. 그들은 재활용 가능한 제품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판매가 더 잘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그것을 재활용할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사실 대기업들 입장에서는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보다 새로 만드는 것이 더 저렴하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재활용률을 높인다 해도(물론 이를 요구하고 싸우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이 효과가 있으려면 재활용 플라스틱만큼 새로 생산되는 플라스틱이 줄어야 한다. 그러나 화석 연료와 석유화학 부문의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은 여전히 플라스틱 생산을 늘리는 중이고 더 늘릴 계획이다.
프래킹과 미국의 이른바 ‘셰일 혁명’은 최근 몇 년 동안 플라스틱 산업에 더 박차를 가하는 데에 일조했다. 프래킹으로 추출한 미국의 셰일가스는 에탄이 풍부하다. 에탄은 플라스틱의 주요 원료 중 하나인 에틸렌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 프래킹으로 값싼 에탄이 시장에 넘쳐났고, 심지어 미국은 에탄 수출로 이윤을 낼 수 있게 됐다.
영국 화학 기업인 이네오스의 스코틀랜드 그레인지머스 공장에 처음 셰일가스가 도착한 것은 2016년이었다. 당시 프래킹 반대 활동가들은 격분했다. 하지만 그 셰일가스가 플라스틱을 더 많이 만드는 데 쓰일 것이라는 사실은 간과됐다. 〈플라스틱 뉴스〉는 2013년에 이렇게 보도했다. “셰일 기반 천연 가스는 북미 플라스틱 시장에 3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다.”
자본주의가 기존의 화석연료 기반 시설을 바탕으로 팽창하기 때문에, 폐기물로 갈수록 더 많은 플라스틱을 만드는 것은 계속해서 ‘합리적’이며 수익성이 높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로 서로를 도덕주의적으로 꾸짖기보다는 상위 생산단계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분노의 방향을 플라스틱 생산 업체와 석유화학 기업들로, 그리고 기업들에게 프래킹을 허용한 정부들로 돌려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해야 한다.
우려의 목소리가 광범하자 최근 몇 년 동안 효과가 나타났다. 유럽연합은 일회용 포크, 나이프, 빨대, 접시 등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 금지를 준비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플라스틱 협약’을 도입할 예정이다. 그에 따라 영국에서 사용되는 플라스틱 80퍼센트에 책임이 있는 기업들은 플라스틱 포장재를 100퍼센트 재활용하고, 재사용·분해 가능하게 만들며, 2025년까지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을 모두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구속력이 없어서 기업들의 자발성에 기대야 하는 한계가 있지만, 이것은 시작이긴 하다.
지역사회와 직장에서 더 나은 재활용 시설을 요구하고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 충분하지는 않다. 재앙적인 기후 변화를 막으려면 화석연료를 땅속에 내버려 둬야 한다. 바다와 자연계가 플라스틱으로 꽉 차는 것을 막으려면 플라스틱 생산을 줄여야 한다.
자본주의의 논리, 즉 이윤 추구는 그 반대를 요구한다. 플라스틱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꽤 현실적이다. 플라스틱은 1950년대 이후에나 널리 사용됐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화석연료 기반 시설에 쏟아 부은 투자금도, 높은 수익을 안겨 주는 상품도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저항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강제해야 한다. 프래킹 반대 운동은 영국에서 화석연료 영역의 확산을 막거나 적어도 확산 속도를 늦추는 데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거대한 기업들에 맞서 싸울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2013년에 이네오스 트럭 운전자들이 파업에 돌입했을 때, 스코틀랜드에 석유 공급은 절반으로 떨어질 위험에 놓였고 이윤이 큰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에서 새 노동법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인 에너지 부문 노동자들은 연료 저장소를 봉쇄해서 휘발유 부족 사태를 초래했다. 전기 생산량이 감소해서 전기를 수입해야 할 지경이 됐다.
이런 사례들은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힐끗 보여 준다.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노동자들은 생산을 중단하고 이윤에 타격을 줄 뿐 아니라 사회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집단적 힘이 있다. 만약 우리가 화석연료에서 벗어난다면, 합성 플라스틱을 대체할 식물 기반 플라스틱을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강하고 내구성 있는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지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화석연료가 더 많은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고 더 많은 플라스틱이 환경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지금 싸워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든 우선순위에 도전할 수 있는 더 광범한 요구와 운동을 그 싸움과 결합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