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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종차별의 근원과 진정한 해결

많은 사람들이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가져온 재난에 놀랐다. 다른 무엇보다도 희생자의 대다수가 가난한 흑인인 것에 놀랐다. 미국의 연방정부가 흑인을 노골적으로 2등시민 취급하는 것에 다시 놀랐다.

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파월 같은 정부 고위관료가 있지 않은가? 2004년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식에서 흑인이 남녀 주연상을 독식하지 않았던가?

대다수 흑인들은 분명 과거 노예일 때와는 처지가 다르지만, 불행히도 제도적으로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단순히 ‘편견’과 ‘인식’의 잔존 문제가 아니라 기업과 국가가 조장하는 체계적 차별 문제다.

2004년 통계를 보면 흑인 가정의 소득은 백인 가정 소득의 63퍼센트다. 소득도 문제지만 자산을 보면 차이는 훨씬 더 뚜렷하다. 백인 가구 평균자산보유액이 4만 2천 달러인 데 반해, 흑인 가구 평균은 1천1백 달러에 불과하다. 같은 대졸자일지라도 흑인의 임금은 백인 임금에 7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1995∼2000년까지 짧은 호황을 제외하고 지난 30년 간 흑인 실업률은 계속 두 자리 수를 유지하고 있다. 뉴욕의 할렘 같은 대도시 흑인 게토에서는 50퍼센트 이상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기업들의 흑인 노동력인구 차별에 대해 〈USA 투데이〉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경제가 호황일 때 가장 늦게 고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당연히 경기 불황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잘린다.”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소재인 ‘마약과의 전쟁’의 최대 희생자들은 흑인이다. 소위 ‘불법 약물 사용자’의 대다수는 백인이지만, 기소된 사람의 90퍼센트는 흑인이다. 결국 전체 인구 중 흑인의 비중은 13퍼센트이지만 수감자의 절반 이상이 흑인이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원래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문제는 남북전쟁 이후 노예가 해방된 지 거의 1백50년이 지났고 공민권 운동이 일어난 지 50년이 지났지만,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왜?’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흑인들은 백인 노동계급을 포함한 모든 백인이 인종차별로부터 득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만약 진짜로 백인 노동자들이 인종차별로 이익을 얻는다면 미국에서는 결코 인구 다수의 지지를 얻는 반인종차별 운동을 건설할 수 없을 것이다.” 저명한 흑인 급진주의자 매닝 매러블의 지적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흑백 노동자 분리가 심할수록 백인 노동계급의 상황도 열악했다. 1950∼60년대 흑인 공민권 운동이 가장 활발했을 때 흑백 노동자 모두의 임금이 올랐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운동의 패배는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하락시켰다.

미국 사회학자인 마이클 라이히는 1990년대 초반 발표한 연구에서 대도시 중 흑백 간 차이가 클수록 최상위 백인 자본가(백인 인구 중 1퍼센트)가 전체 백인 소득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백인 내 부유층과 빈곤층 간 소득격차 ― 일명 백인 지니계수 ― 가 가장 높았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노예제 해체 이후 인종차별이 백인 노동계급의 제 몫 챙기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자본가들의 흑백 분할지배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30년대 흑인 탄광노동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안젤로 헌든의 다음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흑인 지도자들은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이 우리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흑인 선전을 퍼뜨리는 강력한 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백인 노동자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다. 따라서 억압자는 부유한 백인임에 틀림없다. 교회·학교·신문·라디오를 그들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통으로부터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그들은 백인 노동자와 흑인 형제를 이간시키는 이런 사악한 ‘분할지배’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모든 흑인이 똑같은 고통을 받은 것은 아니다. 흑인 사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다른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일례로 뉴올리언스 시장은 흑인이지만 그는 2004년 허리케인 아이반이 왔을 때 슈퍼돔을 개방하지 않았다. 가난한 흑인들이 슈퍼돔을 망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지역 백인 자본가의 파트너를 자처하며 임기 동안 도심 재개발을 위해 흑인 빈민들을 공공주택에서 몰아내는 정책을 실행해 왔다.

흑인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해 중간계급과 지배계급이 등장한 것은 1960년대 공민권 운동 이후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공민권 운동의 성과였다.

‘차별시정조처’ 등이 도입되면서 흑인의 소수는 중간계급이나, 심지어 콘돌리자 라이스나 오프라 윈프리처럼 드물게 지배계급으로 계급 상승을 이룰 수 있었다.

이것은 미국 지배자들의 지배 전략의 일부이기도 했다. 민주당은 공민권 운동 지도부를 포섭했고, 공화당도 1980년대에 소수의 흑인 신보수주의자들을 키웠다.

이들은 인종차별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았고, 때로는 인종차별적 정책에 동조했다. 수많은 흑인 시장들의 공통된 정책은 경찰 수를 늘리고 감옥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지난 40년 동안 흑인 운동을 통제해 온 결과 흑백 노동계급 간 연대나 아래로부터의 투쟁보다는 보수적 흑인 민족주의나 민주당과의 동맹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과 1930년대 대공황기에 좌파들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흑백 노동계급의 단결을 추구했고, 노동자들의 의식은 급속히 변했다.

19세기 말 대규모 흑백 연대파업에 참가했던 한 백인 탄광노동자는 “[흑인과] 함께 일해야 하는 우리들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을 자신에게 예속시키기 위해 이런 수단을 이용하곤 한다” 하고 말했다.

이런 연대의 노력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30년대 미국 공산당의 사례였다. 당시 흑인 단체인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가 가난한 흑인 실업 노동자 문제를 외면하고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쓴 무고한 흑인 소년의 변호를 거부했을 때, 공산당은 적극적으로 연대 운동을 건설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공산당 뉴욕지부의 흑인 당원 수는 1932년 74명에서 1938년 1천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공산당의 정치적 오류 때문에 일관되게 진행되지 못했다. 공산당이 스탈린의 민중전선 노선을 수용해 로즈벨트 정부와 동맹을 추구했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로도 미국 사회주의자들은 흑인 운동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고, 흑인 중 가장 선진적인 혁명가들도 흑인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오늘날 흑백 노동자 간 단결의 조건은 40년 전보다 유리하다. 흑인 노동계급 규모가 커지고 공민권 운동의 성과로 오늘날 백인 노동자들의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예전처럼 지독하지 않다.

1958년에는 백인의 44퍼센트가 흑인이 자기 동네로 이사해 오면 이사가겠다고 답변했지만, 1997년에는 1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사회운동이 활발할 때 인종차별 반대 운동도 강력했고, 흑백 노동자 단결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19세기 말, 1930년대 대공황기, 1960년대가 그랬다.

지금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부활하고 있다. 이 운동은 카트리나 재난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난 지배자들의 인종차별에 분노하고 있다. 이 운동은 머지않아 인종차별 반대 투쟁을 고무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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