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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자본주의의 새로운 입간판?

국내외 주요 언론들이 인도에 열광하고 있다. 국내 언론들은 한국이 올해 안에 인도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을 것이며, 그것은 엄청난 기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언론들은 부시를 좇아 인도가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열강”이 되기를 기대한다.

일부 논평가들은 인도가 중국처럼 세계 자본주의의 또 다른 기관차가 되리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현실을 한번 보자.

인도는 사실 중국과 비교가 안 된다. 1980년대 이후 인도의 평균 성장률은 4∼5퍼센트 정도였다. 이에 반해 중국은 지난 25년간 평균 9.6퍼센트 성장해 왔다.

세계시장에서 인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은 세계 3위 수출국(약 6퍼센트)이다.

분명 중국과 인도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인도 지배자들은 다른 선진 산업국과 군사적·경제적으로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이 동원됐고, 간디의 후계자인 네루의 전략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발전 전략과 근본적으로 동일했다. 물론 자본축적 규모는 중국보다 인도가 훨씬 적었다.

인도 정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마오 시대 중국만큼 ‘본원적 축적’을 강요할 수 없었다. 첫째, 인도에서 독립정부 수립 과정은 중국과는 달리 내전을 수반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 권력을 장악한 중간계급 지식인들은 상당히 강력한 자본가나 지주 들과 직면해야 했다. 중앙 정부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도도 중공업 우선주의를 시도했지만 다른 부문 자본가들의 반대 때문에 축적 규모가 제약받았고, 지주에 대한 공격도 중국보다 상당히 온건했기 때문에 농업으로부터의 잉여 이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둘째, 인도의 노동자와 농민 운동은 중국보다 성공적이었다. 나중에 일부가 국가에 흡수되고 부패했을지라도 인도 민중운동은 독립적인 대중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도 지배자들은 중국처럼 노동자·농민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인도의 축적률은 중국에 비해 평균 10퍼센트 정도 낮은 20∼25퍼센트였다. 하지만 이조차 후진적 인도에서 대중의 소비 수준을 지속적으로 제약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았다.

물론 네루 시대에는 세계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그의 포퓰리즘적 미사여구와 부분적 개혁 덕분에 커다란 정치적 격변 없이 안정적인 축적이 이뤄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네루가 약속한 ‘사회주의’를 아래로부터 실현하기 위한 대중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20년 간의 고축적 속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하면서 이윤율의 위기에 부딪혔다. 인도의 정치적 상부구조는 곧 불안정한 시기에 들어섰다.

이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네루의 딸이자 후계자인 인디라 간디는 1976년 모든 야당 지도자들을 강제로 체포하는 긴급명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했고, 1980년대 중반까지 두 명의 총리가 암살되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가 시작됐다.

국민회의는 두 가지 변화를 추구했다. 먼저 이전의 포퓰리즘적 미사여구와 정책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소수 부유층에 정치적 지지를 호소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이것은 변화한 세계에서 인도의 가장 선진적인 자본가들이 원한 것이기도 했다. 간디를 보호하고 네루를 지지한 비를라, 타타 같은 대자본가들은 이제 40년 간의 축적 후 좁은 인도 시장을 벗어나 세계시장에 진입하고 싶었다. 이것을 위해서는 먼저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했다.

물론 세력관계 때문에 이 개방 과정은 중국처럼 극적일 수는 없었다. 본격적 개방은 1991년부터나 가능했고, 이것도 중국처럼 3년 동안 6천만 명의 국영기업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둘째, ‘사회주의’를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축적 방식을 더는 정당화할 수 없었다. 이제는 지방의 카스트간·종단세력간 분열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종단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결국 1990년대 말 BJP 연립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다.

많은 점에서 인도는 1947년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자본주의 사회로 변신했다. 1951년부터 2001년까지 인도의 공업 생산은 20배, 농업도 4배가 늘었다. 주류 언론들은 이 점을 찬양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설사 성장이 가능하더라도 이것은 모순 투성이의 불균등·결합 발전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도 경제에서 세계시장에 편입된 부분은 지금과 같은 성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며, 극소수는 세계시장에서 다국적기업들과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타가 최근 전 대우자동차 화물차 부분을 인수한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지만 IT 산업의 일부도 여기 속할 수 있다.(GDP의 3퍼센트, 총고용인 중 0.0023퍼센트!)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국내시장의 협소함에서 벗어났을지 몰라도, 이제는 세계시장의 불안정성과 리듬에 점점 종속되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투자붐이 매우 불안정해서 투자규모가 해마다 심하게 변동을 겪는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인도 노동자와 농민 들의 문제다. 2004년 BJP가 “빛나는 인도” 캠페인을 벌이고, 선심성 공약을 남발했는데도 재집권에 실패한 이유는 바로 보통 노동자와 농민들의 인도는 전혀 빛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도 지배자들은 빈곤이 계속 줄고 있다고 말하지만 현장 조사들은 인도의 다수 인구가 여전히 끔찍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2000년 전국표본조사를 보면, 농촌 인구의 4분의 3과 도시 인구의 절반이 적절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조사도 성인 인구의 5분의 2가 심각한 영양 결핍 상태이고, 여성의 절반이 빈혈에 걸렸고, 아동 중 절반이 영양실조 상태라고 지적했다.

또, 비록 2004년 국민회의가 이끄는 ‘연합전선’이 포퓰리즘적 미사여구를 앞세우며 집권했지만, 국민회의의 득표수는 이전 선거보다 낮았다. 가장 약진한 것은 인도 공산당들이었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주류 정치 전반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보여 준 것이다.

더구나 국민회의가 네루 시대 수준을 넘어 의미 있는 포퓰리즘 경제 정책을 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은 부자에 대한 세금을 늘리거나 적자 재정을 대폭 확대해야 가능할 텐데 [15년간 금융 자유화를 겪은 지금] 그것은 곧장 자본의 갑작스런 탈출을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국민회의는 과거처럼 안정적인 정치적 동맹을 형성할 능력이 없다. 국민회의의 포퓰리즘 미사여구와 실제 정책 사이의 간격은 아래로부터 개혁 운동을 고무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주류 정치에 대한 환멸이 반드시 계급투쟁으로 직결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카스트 사이의 충돌과 종단주의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전통 좌파(대표적으로 두 개의 공산당인 인도공산당과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는 노동자와 그 밖의 다른 피억압자들을 조직하는 데 오랫동안 실패해 왔다. 불행히도 지난 십몇 년 동안 힌두 극우들이 이들 중 후진적인 부분을 성공적으로 조직해 왔다.
그러나 2004년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에서 우리가 목격한 그 역동성과 전투성이 지속된다면 분명 새로운 대안의 등장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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