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 혁명 시대의 아름다운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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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난 지 2백50년이 되는 해이다. 사이먼 버먼이 그의 삶과 작품을 되돌아본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가 첨가한 것이다.
오는 1월 27일에 우리는 1756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며, 작은 방에서 걸작들을 작곡하던 그 천재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전무후무한 완벽성과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 외에도 다른 여러 과장된 얘기들을 듣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에는 모종의 진실이 담겨 있다. 모차르트가 사춘기 전에 소나타·교향곡·오페라를 모두 작곡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진실은 이러한 작품들이 비교적 단순하고 대부분 유치하다는 점이다. 어린이가 작곡한 것들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진실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에게 정말로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는 재능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음악이 다른 장르의 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테면 차이코프스키의 발레나 쇼팽의 피아노 음악보다 더 아름답고 균형잡힌 것처럼 객관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에게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고정관념은 그가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일 뿐이라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삶의 결정적 순간에 예술을 위해 투쟁했다. 모차르트가 꼬마 천재에서 생애 마지막 10년간 예리하고 급진적인 작곡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과 정치 모두에서 급진적 사상이 충만한 환경에 그가 개입하고 예술적 용기를 발휘한 결과였다.
모차르트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동시에 19세기 바이올린 연주의 표본을 제시한 교과서의 저자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와 그의 누이 나네를은 아버지에게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자식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레오폴트는 자식들을 데리고 유럽의 여러 궁전들을 돌아다녔다.
여섯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모차르트는 유럽의 왕과 왕자, 대주교 들을 위해 연주하는 광대나 마찬가지였다. 조숙한 재능의 신선함이 점차 사라지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당시의 음악가들은 오직 두 가지 선택만을 할 수 있었다.
하나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처럼,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예배 때 쓰일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요제프 하이든처럼 지방 귀족들의 시종이 되는 것이었다.
이 중 어떤 것도 모차르트에게는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독립적 음악가로서 경력을 쌓기 위한 최초의 시도를 했고, 이런 일은 당시 거의 전례 없는 것이었다.
1778년에 모차르트는 파리로 갔다. 2년 뒤 잘츠부르크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실망하고 낙담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잘츠부르크의 제후이자 대주교의 시종이 됐다.
모차르트는 보수적이고 금욕적인 상전이 강요하는 제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긴장은 대주교와 함께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폭발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모차르트는 대주교의 수석시종에 의해 궁전에서 쫓겨났다.
모차르트는 마침내 자유를 찾았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동안 독립적 음악가로 남으려 했다.
모차르트는 빈에 남기로 결심했다. 빈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역동적인 수도였다. 더 중요한 점은 빈이 당시 계몽주의 사상과 행동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18세기에 과학적 이성을 장려하고 예술을 개성의 표현과 독재정치 완화 수단으로 장려하는 운동이었다.
모차르트가 빈에 도착하기 전해에 계몽주의 사상을 열렬히 지지하는 남자가 오스트리아의 단독 통치자가 됐다. 그는 바로 요제프 2세였다. 새 황제는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공격했고, 법전을 개정했고, 예술에 대한 검열을 크게 줄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모차르트는 독립적으로 살면서 그의 걸작들을 창작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계몽주의의 소극적 수혜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것에 개입했다. 빈에서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모임인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
모차르트는 이런 급진적 사상을 그의 음악 속에서 때로는 분명하게, 때로는 드러나지 않게 표현했다. 예컨대, 빈에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때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와 동등하게 피아노 독주 ― 독주는 그 전에는 오케스트라의 반주처럼 취급됐다 ― 를 배치했다. 이것은 음악을 통해 개성을 표현한다는 생각을 구현한 것이었다.
더 직접적으로는, 세 편의 위대한 오페라, 즉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 피리〉에서 그는 예술을 이용해 낡은 질서를 공격했다.
〈피가로〉는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 금지된 연극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동명의 시종 이야기이다. 피가로는 동료 시종인 수잔나와 결혼하려 한다. 그들의 상전인 백작은 결혼 전에 수잔나와 동침해 자신의 봉건적 권리를 선언하겠다고 결심한다.
피가로와 그 밖의 하인들은 결혼 전에 백작에게 책략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어느 순간 피가로는 백작에게 복수의 아리아, ‘그대가 춤추기를 원한다면’(Se Vuol Ballare)을 부른다.
모차르트는 이 아리아에서 피가로의 대사에 미뉴엣 음악 ― 귀족들의 우아한 무도회장에 어울릴 법한 ― 을 반주로 넣어 피가로의 분노를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돈 조반니〉는 돈 후안 전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이야기에 담긴 메시지는 모호하지만, 그 음악은 전에 들어보지 못한 극적인 힘을 표현한다.
돈이 속죄하기를 거부하고 지옥으로 끌려가는 장면은 오페라에서 가장 오싹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장면은 또한 1백여 년 뒤에도 여전히 급진적이라고 평가받는 음악 사상을 담고 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요제프 시절의 점진적 개혁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 황제는 1790년 죽기 직전에 반동적 방향으로 돌아섰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오페라 중 마지막에서 두번째 작품이 될 〈마술 피리〉를 어떤 내용으로 할지를 결정했다. 이 오페라는 프리메이슨과 계몽주의의 진보적 이상을 은근히 찬양하고 있다.
혁명이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는 동안 빈은 더 급속히 반동으로 기울었다. 모차르트는 반동이 아니라 혁명의 편에 섰다. 비극은 〈마술 피리〉를 완성시키는 몇 달 사이에 모차르트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음악과 정치가 어디로 향했을까 하는 것은 역사의 커다란 흥밋거리 가운데 하나다.
모차르트는 35살 때 죽음을 맞이했다. 하이든과 베토벤 같은 동시대의 위대한 음악가들은 오늘날 그들의 걸작이라 여겨지는 작품들의 대부분을 그 나이에 써야 했다.
그러나 2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모차르트가 살았던 혁명적 시대의 흥분과 희망을 일깨워주는 그의 작품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
번역 조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