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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코민테른 ─ 사회주의 전략·전술의 보고에서 소련 외교정책의 도구로》:
혁명의 학교

《코민테른 ─ 사회주의 전략·전술의 보고에서 소련 외교정책의 도구로》 던컨 핼러스 지음, 최일붕 옮김, 책갈피, 2022년, 296쪽, 15,000원

사회주의를 쟁취하려면 어떤 종류의 당이 필요한가?

이 물음은 1848년 《공산당 선언》 출간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주된 논쟁거리였다.

러시아 혁명 초기인 1919년 3월, 35명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여 코민테른을 창립했다. 그들이 세운 과제는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당의 노선으로 대중적인 혁명 정당을 국제적으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미 레닌은 제1차세계대전이 개전한 1914년에 새 인터내셔널의 설립을 촉구했다.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 같은 강력한 정당들이 전쟁 발발하자 각자 자국 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미 전쟁이 일어날 위험을 알고 있었다. 두 차례의 회의에서 유럽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전쟁이 터지면 노동계급에게 전쟁 동원을 저지하자고 호소하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소식을 들은 레닌은 처음에 이것이 노동계급의 사기를 꺾으려는 정보기관의 날조라고 믿었다.

혁명의 전진

코민테른이 창립 직후 부딪힌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에 직면해 정치적 파산을 초래한 제2인터내셔널의 전통에 맞서 어떻게 정당을 건설할 것인가?

던컨 핼러스의 책 《코민테른》은 이 물음을 둘러싼 논쟁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이 책은 코민테른을 다룬 유일하게 제대로 된 역사서다. 이 책은 80년도 더 된 잊혀진 논쟁을 그저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맞닥뜨리는 여러 논쟁들을 망라하고 있다.

이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한 코민테른의 첫 네 대회가 혁명적 전략·전술의 학교 구실을 하도록 의식적으로 조직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민테른 창립 대회 참가자들 중 대중의 지지를 누리는 단체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사람은 다섯 명의 러시아 대표뿐이었다. 러시아 바깥에서 제1차세계대전에 반대하고 이후 러시아 혁명을 지지한 단체들은 소규모에 불과했다. 하지만 레닌과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을 결성한 것은 여러 소종파에 거창한 후광을 비춰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코민테른은 제1차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유럽이 혁명적 위기에 휩싸여 대중적 공산당이 부상할 조건이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창립됐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이런 전망은 대체로 옳았다. 코민테른 창립 한 달 만에, 헝가리와 독일의 바이에른주(州)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돼 잠시나마 권력을 장악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공장 점거 물결이 일어, 혁명을 통한 권력 장악이 공공연히 거론됐다.

1920년 3월 독일에서는 우익 쿠데타가 총파업에 의해 분쇄됐다. 1919년에는 글래스고와 벨파스트에서 대중 파업이 벌어지는 등, 영국에서조차 혁명적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있었다.

1919년에서 1920년 초 사이 유럽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전쟁 이전의 국가 기구들이 와해된 상황에서 노동계급이 정면 돌파를 감행한다면, 심지어 경험이 적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승리할 수도 있다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내다봤다.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이를 분명하게 경고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특히 독일 혁명에 기대를 걸었다.

1918년 마지막 몇 개월, 혁명이 독일을 휩쓸면서 카이저는 도망쳐야 했고 독일 정부는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런데 독일의 노동자 평의회들은 대개 사민당이 주도했는데, 사민당은 제1차세계대전을 지지했었다. 사민당이 장악한 신생 좌파 정부는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고, 정규 군대를 해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새 정부는 노동자 평의회의 해체를 획책했다.

던컨 핼러스가 지적하듯, 전쟁을 지지했던 그 사민당이 이번에는 자본주의 국가를 재건하러 나섰다. 사민당은 자본주의를 폐지하려면 혁명으로 분쇄된 국가기구들을 재건한 후 의회를 통해 장기간의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민당의 개혁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를 바꾼다는 사상과 노동자 권력이라는 개념 일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장애물이 됐다.

이와 대조적으로 코민테른은 두 가지를 추구했다. 볼셰비키와 노선을 같이하는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인 소비에트 권력을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성공한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와, 반혁명을 이끈 독일 사민당 같은 정당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던컨 핼러스는 제1차세계대전 이전의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정당들은 입으로는 자본주의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한다고 떠들면서도 실천에서는 본질적으로 당원과 득표수를 늘리는 데 몰두했다. … [이 정당들이 보기에 ─ 역자]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도래할 터였다. 국가권력과 충돌하거나 심지어 사용자와 충돌하는 일도 최대한 회피했다.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사회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이었다. … 사회주의자들이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조직을 자처했다. 그러면서 이 당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측면에 능동적으로 반대하는 노동자들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 당들은 득표를 늘리려고 노동자 모두(그들이 얼마나 반동적인 관념들을 받아들이든 간에)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이런 후진적 부문에 스스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 전체 노동계급을 공산주의자 전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 노동계급 가운데 진정으로 단호한 소수, 즉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행동하기를 원하고 강령을 갖고 있고 대중투쟁을 조직하려는 소수, 바로 이것이 공산당이다.

코민테른 지도부가 쟁투를 벌인 상대는, 선출된 대표자나 노동조합 지도자, 당 기관지 기자들이 당의 규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오늘날 개혁주의 정당의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누구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층 당원에게 행동할 ‘자유’가 있는 것과, 당 지도자와 지도부가 책임지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토론을 한 후 그 결과에 따라 행동을 통일하는 것은 어떤 노동자 투쟁에서도 필요한 일이다. 이는 연대, 사상적 명료함, 행동 통일을 위한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영국 노동당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에는 인종차별주의자인종차별 반대자든, 파업 지지자파업 파괴자든 모두 같은 당에 속해 있을 수 있다. 그런 ‘자유’는 기층을 약화시키고 지도부의 힘을 키워 준다.

공동전선

코민테른 창립 당시 경계선은 단지 공공연히 혁명을 지지하느냐 개혁만을 지지하느냐로만 그어진 게 아니었다.

1920년 7월에 레닌은 이렇게 썼다.

최근까지도 제2인터내셔널 소속이던 정당과 조직이 점점 더 빈번하게 제3인터내셔널 가입 신청을 하고 있다. 그들이 실제로는 공산주의 정당이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은 일종의 유행이 되고 있다. …

그 달에 열린 코민테른 2차 대회에는, 그 전까지 제2인터내셔널에 속해 있던 이탈리아 사회당, 프랑스 사회당 등의 정당들이 대표단을 보냈다. 그런 당들에는 시류에 편승하려는 노골적인 개혁주의자들이 속해 있었다.

한편, 독일 독립사회당 등의 정당들은 코민테른과 제2인터내셔널 사이에 서서 단결을 도모하겠다고 주장했다. 핼러스의 책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끈 코민테른이 여전히 개혁주의를 버리지 않은 자들에 맞서는 동시에 개혁주의와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혁명적 대안을 건설하는 것을 진정으로 고민하며 동요하는 사람들을 획득하려고 벌인 논쟁을 개괄한다.

이는 까다로운 논쟁이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레닌과 트로츠키가 보기에는 신생 공산당들 자신도 전략·전술을 배워야 하는 처지였다고 핼러스는 설명한다.

그런 공산당들은 자신들이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노동계급에게서 그런 지지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려면 노동계급에게서 여전히 지지를 얻고 있는 기성 정당들을 상대해야 했다. 개혁주의 정당이든, 코민테른과 제2인터내셔널 사이의 중간 세력을 자처하는 정당이든 간에 말이다.

신생 공산당들은 개혁주의와 정치적으로 단절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자신들과 사상을 공유하지 않는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할 가능성까지 모두 배제하기도 했다.

1920년 3월 독일에서 사민당 정부를 전복하려는 우익 쿠데타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런데 독일의 신생 공산당은 사민당과 우익이 별로 다를 바 없는 세력이라며 총파업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의 논리에 떠밀려 공산당은 황급히 방침을 바꿔야 했다.

1년 후 공산당은 노동계급 내 소수만의 지지로 총파업을 일으키려 했다. 이것이 실패하자 공산당은 실업자를 행동대로 조직해 노동자들의 출근을 막으려 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신생 공산당들에게 거듭 일깨워 주려했던 것은, 개혁주의와 단절한 뒤에는 개혁주의자들에게로 다시 돌아가 여전히 그들에게 기대를 거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어내려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산당이 상당한 지지를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소수인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공산당이 개혁주의자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코민테른은 촉구했다.

트로츠키는 혁명적 위기 시기가 아닌 때에도 계급투쟁은 중단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런 시기에도 사용자와 자본주의 국가에 맞선 일상의 투쟁은 계속 벌어진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려면 일상적 투쟁에서 명확한 혁명적 정치를 통해 그들이 최상의 투사임을 입증해야 했다. 그런 투쟁에서는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는 없을지라도 계급의 자신감을 북돋을 수 있을 요구들을 두고 노동자들이 단결할 필요가 제기됐다. 공동전선은 혁명적 노동자들과 개혁주의적 노동자들, 그리고 그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정당들의 단결을 제안하는 정책이다.

핼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공동전선 전술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첫째, 혁명적 소수의 정당은 단지 노동계급 운동의 주변부에서 선전과 선동 할 수는 없다. 비록 그런 일들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둘째, 공동전선 전술은 노동계급 투쟁과 노동계급조직(아무리 반동적일지라도)과 관련된 것이고 근본으로 ‘민중전선’이나 ‘민주대연합’과 원칙에서 다르다.

또 다른 점은, 공동전선은 공동 행동의 근거가 존재할 때, 그리고 참여하는 단체들이 서로 어깨를 견줄 만한 규모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는 개혁주의자들과의 타협이나 공동행동을 일체 거부하는 사람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영국에서는 수천 명 정도가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같은 시기 노동당은 전쟁을 거치면서 더 강력해졌다. 득표와 당원 수 모두 늘었다. 레닌은 신생 공산당이, 변화를 원하고 러시아 혁명에 매력을 느끼지만 여전히 램지 맥도날드(당시 노동당 대표) 같은 자들에 기대를 거는 노동자들을 청중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신생 영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올바른 강령을 제시하기만 하면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혁명가가 아닌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 종파주의를 분쇄하기 위해, 레닌은 신생 공산당에게 노동당과 제휴할 것을 제안했다.

두 가지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첫째, 레닌은 노동당에 대한 환상을 전혀 품지 않았다. 실제로 레닌은 노동당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노동당은 철저한 부르주아 정당이다. 이 당은 노동자들로 구성돼 있지만, 이 당을 이끄는 것은 최악의 반동 분자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레닌은 노동당 입당을 제안한 것이 아니었다. 공산당이 독립적 조직을 유지한 채로 노동당과 연계를 맺으라고 제안한 것이다. 당시에는 노동당의 당 기구가 아직 형성 중이었고, 독립노동당이나 (현재 공산당의 일부인) 영국 사회당 같은 당들도 노동당과 제휴를 맺고 있던 때였으므로, 이는 비현실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레닌은 노동당 지도자들이 이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러면서 공산당은 노동당 당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알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서 공산당은 새 당원을 어느 정도 얻었다.

핼러스의 책에는 혁명적 정치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재료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이 책에는 노동조합 활동, 여성, 선거, 제3세계 민족주의 등에 관한 논쟁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레닌 사후 코민테른이 타락하고, 1943년에 스탈린이 전시 동맹을 맺은 루스벨트와 처칠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코민테른을 해산하기에 이르는 과정 말이다.

이 책은 1923년의 사건들, 특히 그해 독일 혁명의 실패를 살펴본다. 이 사건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앞서 지적했듯 볼셰비키는 후진적인 러시아든 다른 어떤 나라에서든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이들은 국제 혁명에, 특히 독일 혁명에 희망을 걸었다.

1923년에 러시아는 레닌이 설명했듯이 노동자 없는 노동자 국가였다. 전쟁, 반혁명, 경제적 봉쇄, 기근으로 노동계급은 떼죽음을 당했다. 소비에트 권력의 생존은 국제 혁명의 성공에 달려 있었다. 1923년에 바로 그 희망이 스러졌다.

러시아를 통치하던 고립된 관료 집단에 기반해 이듬해에 빠르게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선포했다. 1920년대 말이 되면 스탈린은 반혁명을 완수하고 러시아를 국가자본주의의 길로 이끌었다. 국제 혁명의 실패가 소비에트 권력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신화와 현실

핼러스가 깨뜨리는 신화 하나는 코민테른의 이런 실패가 러시아가 코민테른을 지배한 탓이라는 것이다. 핼러스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영향력이 뒷돈이나 숙청 협박이 아니라, 그들이 성공한 혁명을 이끌었다는 사실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레닌 생전에 러시아 지도자들은 중요한 쟁점에서 코민테른 내의 격렬한 반대에 종종 부딪혔다.

국제 혁명 운동의 비극은 볼셰비키당이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고 타락하는 가운데 코민테른에서 지도적인 구실을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코민테른과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서로 얽혀 있었다.

오늘날 많은 훌륭한 투사들이 개혁주의 정당에서 독립적인 혁명적 정당을 건설할 가능성을 제쳐 버리곤 한다. 그들은 레닌이 견지한 당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확고한 원칙을 고수하며 일시적으로 노동계급 내 소수가 되는 것도 무릅쓸 태세가 돼 있으면서도, 일상 투쟁에 참여해 개혁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노동자들과 협력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정당 말이다.

1980년대에 이 책이 영국에서 출간됐을 당시 영국 공산당 기관지 《마르크시즘 투데이》 편집부 같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혁명은 고사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비웃었다. 하지만 핼러스는, 그들이 ‘대처주의’에 맞선 새로운 동맹의 정치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정치가 사실은 스탈린이 코민테른에서 관철시킨 실패한 1930년대 민중전선 전략의 재탕에 불과함을 보여 줬다.

이 책은 현대 선진국 사회에서 혁명이 현실성을 갖게 되고, 혁명가들이 노동자 권력이라는 사상에 기초한 강력한 조직을 건설할 수 있었던 시기를 다룬다. 동시에 핼러스는 그런 사상이 오늘날에도 몽상이 아님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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