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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코민테른 세계대회 100주년:
결정적 분기점이 된 제2차 코민테른 세계대회

100년 전인 1920년 7월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2차 대회가 열렸다. 사이먼 바스케터가 당시 논쟁이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를 이해하고 체제에 맞서는 데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살펴 본다.

1920년 여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2차 세계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의 목표는 세계 전역에서 최상의 투사들을 한데 모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재현할 수 있는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 초대 의장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썼다. “세계 프롤레타리아는 결정적 투쟁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공공연한 내전의 시대에 살고 있다.

1920년 7월 코민테른 2차 대회 코민테른 제2차 세계 대회에서 레닌이 연설하고 있다. (Isaak Brodsky가 그린 그림) ⓒ출처 State Historical Museum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노동자 운동이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머지않아 격렬한 무장 투쟁에 직면할 것이다.”

사회주의 조직과 지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

2차 대회에는 40개국 67개 조직에서 파견된 217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소규모 조직을 대표해 참가한 사람도 있었고, 수만 명 규모의 정당을 대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좌파 개혁주의 정당 대표들은 혁명과 개혁 사이에서 동요했으나 결국 자본주의의 편에 서는 길을 택했다.

좌파 조직의 행사가 으레 그렇듯 코민테른 2차 대회는 제시간에 열리지 못했다. 예정보다 1주일이 늦었다.

대표들이 대회 개막을 기다리는 동안 러시아 팀 대 국제 팀의 축구 경기가 열렸다. 영국 직장위원회 운동의 지도자 윌리 갤러거가 국제 팀 주장을 맡았고, 미국인 기자 존 리드도 국제 팀 선수로 참여했다. 국제 팀은 1만 8000명의 관중 앞에서 참패했다.

대회 개막식이 끝나고 대표단은 대중 집회에 참가한 뒤 옛 증권거래소에 모여 3000명이 출연한 연극을 관람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끈 볼셰비키당은 사회주의가 위에서 하사하는 선물 같은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당은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세계 체제인 자본주의에 맞서려면 국제적 차원의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19년 코민테른 제1차 세계 대회 이후, 헝가리와 독일의 바이에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잠깐 동안 등장했다. 공장 점거가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와 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대중파업이 벌어졌고,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에서 사병 반란이 일어났다.

이라크, 아일랜드, 인도,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그리고 옛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민족해방 투쟁이 분출했다.

논쟁

2차 대회에서 제기된 핵심 주장은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와 완전히 갈라서는 동시에 노동자 대중도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갈라서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와 레닌의 《“좌파” 공산주의 — 유치증》이 대표단에게 배포됐다.

트로츠키의 책은 혁명적 무장봉기로 국가 권력을 장악해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책이었고, 레닌의 책은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적 노동자들이나 그들의 조직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관해 논쟁하는 책이었다.

2차 대회에는 온갖 정당의 대표들이 왔다. 그래서 레닌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어느 정도 유행이 되고 있다”고 썼다.

몇몇 개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체제와 타협하려 한다는 것을 감추려고 좌파적 미사여구를 사용했다. 그래서 코민테른은 엄격한 가입 조건을 제시해서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려 했다. 이는 무책임한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결별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한편, 개혁주의와 결별했으니 이제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과는 일절 협력하지 않겠다는 자들도 있었다.

일례로 1918년 11월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노조 관료들은 재빨리 노동자 대표로서 협상에 나섰다. 자본가들은 8시간 노동제를 양보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노조 관료들은 혁명에 맞서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구실을 했다.

그러자 독일 공산당원 대다수는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탈퇴하라”고 요구하는 잘못된 태도를 취했다.

1920년 3월 우파 쿠데타를 저지한 파업이 벌어졌을 때도 독일 공산당은 처음에 이 “개혁주의적”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다.

많은 공산당원이 노동조합의 기능과 정당의 기능을 겸비한 “통합 조직” 건설을 선호했다.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기존 노동조합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레닌이 보기에 그런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를 최고로 도와주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노동조합운동의 다수파는 신디컬리스트들이었고, 미국[시카고]에 본부가 있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도 명성이 높았다.

노동조합 투쟁으로 자본주의를 분쇄하려 했던 다양한 신디컬리스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러시아 혁명을 환영했다.

코민테른 2차 세계대회에서 신디컬리즘의 영향을 받은 대표들은 개혁주의자가 이끄는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하라는 제안에 (지노비예프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끈덕지게 반대했다.”

2차 대회는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적 신디컬리스트 노동조합을 지지해야 한다”는 테제를 작성했다.

레닌은 신디컬리즘 경향에 타협하자고 제안했다. 코민테른 소속 정당들이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을 지도할 능력이 있는지는 “실천에서 검증돼야 한다”는 것도 그 안에 포함돼 있었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노동조합에 관한 테제는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의식적 투쟁의 도구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하고 “노동조합이 없는 곳에서는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극복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분열을 극복하려면 혁명적 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노비예프 등은 노동조합이 근본적 사회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올바른 지도만 받는다면 노동조합이 혁명적 기구로 바뀔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래도 상당히 많은 신디컬리스트들이 코민테른에 합류했다.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 관해서도 생산적 논쟁이 벌어졌다. 2차 대회에는 아시아의 11개국에서 온 대표들도 참가했는데, 이것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획기적 발전이었다.

레닌은 대회 연설에서 세계 인구의 70퍼센트가 “직접적 식민지 종속국이나 반半식민지에 살고 있다”고 했다.

레닌은 2차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의 “중심 사상”은 “피억압 민족과 억압 민족을 구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테제는 “지주와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공동 투쟁에서 “모든 민족의 프롤레타리아와 근로 대중을 단결시키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 목표를 이루려면 “모든 나라의 공산당이 종속국이나 식민지 민족들의 혁명적 운동을 직접 지지해야 한다.”

레닌은 식민지의 “혁명적 민족 운동”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추구하더라도 식민주의를 받아들이는 개혁주의 경향과 “혁명적 민족 운동”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는 토론으로 더 개선됐다. 어느 정도는 인도 대표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의 중요한 개입 덕분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단지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격변을 위해 투쟁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테제에는 공산당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무리 맹아적 단계일지라도 그 운동의 독립적 성격을 무조건 고수해야 한다”는 점이 포함됐다.

이런 관점은 미국, 캐나다, 호주의 이민자 문제로도 확대됐다.

2차 대회는 “이민 통제 법률에 반대하는 활발한 운동”, 백인과 비백인 노동자들의 동일 임금, 이민자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여기서도 개혁주의자와 혁명가들의 차이점이 드러났다.

이탈리아 사회당 지도자인 자친토 세라티는 미국 내 흑인 억압에 관해 토론하는 데 10분이나 쓰였다는 사실에 개탄했다.

그의 동료 안토니오 그라치아데이는 해방 운동을 “지지한다”를 “적극적 관심을 가진다”로 약화하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대다수 공산주의자들은 해방 투쟁을 지지하는 편에 섰다. 바로 그 해에 터키, 이집트, 이란, 인도(망명지에서), 조선,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이 건설됐고, 이듬해에는 중국에서도 공산당이 결성됐다.

2차 대회 이후 많은 좌파 사회민주주의 경향이 분열했다.

수십만 명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로 넘어왔고 나머지는 개혁주의로 후퇴했다.

이 과정은 러시아 혁명에 매료된 새 세대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데 도움이 됐다. 2차 대회의 논쟁들은 세계를 변혁할 방법에 대한 좌파들의 이해를 크게 진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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