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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해산 80년:
세계혁명의 이상은 어떻게 산산조각 났는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은 1919년에 창립됐다. 창립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굳건히 맞서고 혁명을 통해 제1차세계대전의 위기를 “자본가 계급의 지배가 몰락하는 것을 앞당기는”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번 대규모 제국주의 전쟁인 제2차세계대전이 개전한 1939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은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레닌 사후 변질된 코민테른은 세계 혁명보다 소련 외교 노선 복종을 더 중시했다 사진은 레닌이 참석한 1920년 코민테른 2차 대회의 대표단 ⓒ위키피디아

그 전쟁을 앞두고 코민테른은 노동자들과 피억압 민족들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같은 “평화 유지를 바라는 … 자본주의 국가들”과도 평화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치가 “전쟁 도발의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1939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코민테른은 영국과 프랑스를 집중 비난하면서 심지어는 독일 노동자들이 영국의 승리보다 아돌프 히틀러의 지배를 선호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2년 후 코민테른은 다시 정책을 뒤집어 세계 인민들에게 미국‍·‍영국과의 전쟁 동맹에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 동맹의 승리가 “평등에 기초한 국가 간 우호관계”의 기틀을 닦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3년 5월 코민테른은 연합국 정부들의 “군사적 노력을 모든 수단으로 지원하기” 위해 스스로 해산했다.

이렇게 매번 정책을 뒤집을 때마다(앞서 말한 것 외에도 1935년과 1928년에도 그랬다) 모든 코민테른 소속 공산당들도 즉시 그에 맞게 정책을 뒤집었다. 다른 노동계급 정당과의 동맹을 초좌파적으로 일체 거부하다가도, 정책을 뒤집어 자본가 계급 일부와 단결을 추구하고, 그러다 다시 초좌파적 입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처럼 정책을 연거푸 뒤집는 가운데에도 변하지 않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1919~1922년 레닌 생전의 코민테른 대회에서 발전시킨 혁명적 강령과 전략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그재그

코민테른은 혁명적 강령과 전략을 따르는 대신 스탈린 치하 소련 외교 정책의 변화를 충실히 따르며 지그재그를 반복했다. 소련은 1935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1939년에는 독일, 1941년부터는 영국‍·‍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레닌 생전의 소비에트 러시아도 1918년과 1922년에 독일과 조약을 맺은 바 있다. 그러나 그런 조약들과 별개로 당시 코민테른은 독일 노동자들을 자국의 제국주의 정부를 타도하도록 이끌려고 노력했다.

스탈린의 정책에 맞서 공산당 내 반대파를 이끈 레온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이 그즈음 “어떠한 좌충우돌에도 따를 준비가 돼 있는, 소련 외교 정책에 복무하는 순종적 기구”가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소련을 외부로부터 방어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이었다. 스탈린주의 정책이 약화시키고 있던 바로 그 세력 말이다.

스탈린주의 정책은 “세계 노동자 운동에 불행만 가져왔다.” 매우 재앙적인 후퇴도 낳았다. 그런 후퇴로 독일(1933년)과 스페인(1936~1939년)에서 파시즘이 승리해 전쟁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코민테른의 몰락은 근본적으로 소련에서 보수적이고 특권적인 관료층이 부상한 것에서 비롯했다. 이 관료층이 스탈린의 지도 아래 공산당과 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레닌은 위험을 감지했다. 1921년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를 운전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차에 비유하며 “마치 어떤 불가사의하고 무법적인 손에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다”고 묘사했다.

소비에트 국가를 창설한 혁명적 노동계급은 내전의 여파로 해체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은 정부 부처에 종사하는 모스크바의 공산당원 4700명이 “저 거대한 관료 기구를 지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관료 기구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관료 기구는 “많은 점에서 과거의 유물”인 국가기구였다. 레닌은 정복당한 자본주의 사회가 “정복자에게 자신의 문화를 강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관료 기구가 공산당 간부들을 흡수하고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1922~1923년 마지막 투병 기간 동안 레닌은 이러한 위험에 맞선 투쟁을 개시하려 했다.

1923년 3월 레닌이 뇌졸중으로 활동이 불가능해진 후 레온 트로츠키가 그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이끈 좌익반대파는 관료 분파가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에 대한 장악력을 굳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레닌 시절 노선과의 결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개념이었다.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승리 없이도 소련 내에서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볼셰비키의 입장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입장은 1922년 12월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다시금 명확히 선언된 바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일국 내에서 결코 완전히 승리할 수 없다. 일국이 아니라 세계혁명으로써 국제적으로 승리해야만 한다.”

2년 후, 스탈린은 “일국 내에서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일국사회주의 개념은 코민테른의 역할을 바꾸어 놓았다. 최우선 순위는 더 이상 국제 혁명이 아니었고, 1930년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단지 “[소련 내 — 존 리델] 사회주의 건설을 외부 개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즉 본질적으로 국경수비대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그 평가가 옳았다는 것은 1935년 마지막 코민테른 대회의 중심 구호로 입증됐다. 그 구호는 “평화와 소련 방어를 위한 투쟁”이었다. 코민테른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는 이 구호가 소련과 관련해 뜻하는 바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소련의 전체 정책과 각각의 실천을 확고하게 방어한다.”

반대파

1923~1924년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캠페인은 코민테른 내에서 광범한 의구심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응해 스탈린과 그의 동맹자들은 코민테른에 대한 장악력을 확고히 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리고 부당하게도 이를 “볼셰비키화”라고 불렀다.

1924년에 소속 정당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령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 “즉시” 적용돼야 하는 것으로 규정됐다. 코민테른 특사는 코민테른의 대리자로서 광범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제 소련 정부가 각국 공산당 지도부를 직접 지명했다. 그 기준은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당의 “최신 조직 구조를 기꺼이 수용하고 인정할 준비”가 돼 있는지였다.

《코민테른 ─ 사회주의 전략·전술의 보고에서 소련 외교정책의 도구로》 던컨 핼러스 지음, 최일붕 옮김, 책갈피, 2022년, 296쪽, 15,000원

1930년대에 스탈린주의 정권은 레닌 시절에 활약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대부분과, 소련으로 피신한 다른 나라 공산당의 중요 인물 수백 명을 처형했다.

국제 스탈린주의가 진보적 투쟁에 씌워 놓은 거대한 굴레는 1943년 코민테른 해산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약화되다 결국 산산조각 났다.

오늘날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의 투쟁에서 국제주의가 새롭게 부상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세기가 바뀐 이래로 [이 글이 쓰인 2007년] 세계적인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라틴아메리카에서 대중 투쟁이 부상하는 등 여러 운동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들은 우리 시대의 커다란 문제들이 세계 무대에서 결판날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닌 시절의 코민테른이 수립한 강령과 전략은 여전히 시의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