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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이데올로기일 뿐인가?

《다함께》 9호 독자투고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역겨운 자들인가”에서 바라 씨는 에이즈에 대한 현재의 주류 이론이 모두 허구라고 주장했다. 나는 바라 씨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라 씨의 입장에 대해 과학적 증거를 들어 반론을 펴는 것은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바라 씨는 과학의 객관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라 씨가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입장 ― ‘과학은 이데올로기이다’ ― 을 토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다만 바라 씨가 예로 든 과학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에이즈와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또, 듀스버그나 케리 뮬리스 등의 연구 결과도 바라 씨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듀스버그는 주로 AZT라는 초기 에이즈 치료제 개발 과정에서 제약회사의 거짓과 사기가 난무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라 씨는 어떤 연구도 에이즈의 존재나 HIV와의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연구 결과는 대부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에이즈

바라 씨의 주장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학은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도구 역할을 한다. 예컨대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는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들여 유전자 지도를 헤집고 다닌다. 또, 동성애자의 뇌의 구조가 다르지 않을까 하고 연구하기도 한다. 바라 씨의 주장대로 에이즈가 동성애자들이 옮기는 병이라는 편견을 부추기기 위한 연구도 진행됐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학은 엘리트주의적이다. 그 결과 평범한 사람들은 과학으로부터 배제된다. 그리고 어떤 영역 ― 예컨대 공장의 유해 물질이 노동자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 에 대해서는 아예 투자조차 않거나 하더라도 그 액수가 극히 미미하다. 따라서 바라 씨가 과학을 단지 지배자들의 음모로만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고 과학의 객관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은 너무 나간 주장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관계, 그리고 이들에 대한 지배자들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과학이 사회 현상, 즉 인간 집단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수단이라면 자연과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수단이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인류가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생산력의 혁명적 발전은 불평등한 생산관계에도 불구하고 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가 건설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복잡하고 거대한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식을 필요로 했다. 사장들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히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지하고 있다. 노동자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짓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컴퓨터나 기계를 돌릴 수 없다. 또, 꾸며 내거나 날조한 거짓말만으로 사람을 달에 보내거나 복잡한 외과수술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나 생산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들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불평등한 생산관계를 은폐하고 왜곡시켜 현존 체제를 유지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과는 달리, 지배자들의 사회과학 ― 경제학, 정치학, 법학, 철학 등 ― 은 ‘객관성’보다는 사실의 체계적인 은폐와 왜곡을 위해 발전했다. 현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자연과학이 사회과학보다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과학에서 얻은 객관적 사실들이 현실에 응용되고 자본가들에게 유용한 기술이 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된다.

인류를 에너지 위기에서 구할 수도 있었을 핵 에너지의 발견은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핵 폭탄을 만드는 데 이용됐다.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약(가령 글리벡)의 가격을 제약회사가 비싸게 매기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 간다. 어떤 사실들은 반쯤만 알려지고 어떤 사실들은 은폐된다. 게다가 각각의 사실들은 서로 분리돼 따로 제시된다. 노동자들은 신문과 뉴스를 아무리 봐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왜 어떤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걸리지 않는지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알 수가 없다. 지배자들이 거짓 과학적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어서라기보다는 불평등한 생산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자연과학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

한편,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들은 자연과학적 발견으로 무력화되고 폐기된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려고 시도한 연구들은 그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찾아 냈을 뿐이다. 인종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낳지 못한 채 흐지부지됐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바라 씨가 예로 든 에이즈의 경우, 지금의 연구 결과가 모두 진실이라거나 우리가 모든 결과를 알고 있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판단할 근거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밝혀진 과학적 연구 결과에 비해 형편없는 의료 제도가 에이즈를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에이즈는 수혈과 주사제, 가족이나 친지, 연인 간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에이즈가 동성애에 의해 전파된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그것이 불결한 환경과 소홀한 검사 탓에 더 번창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경제적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헌혈과 수혈에 대한 과학적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에이즈 환자가 치료받지 못한 채 전염 가능성이 있는 환경에서 주변 사람들과 살고 있는 것이 에이즈 창궐의 진정한 이유다. 이런 사실들은 바라 씨의 주장과는 달리 에이즈가 바이러스성 질병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현대의 많은 질병들은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업주들보다 노동자들에게 많이 생긴다. 하지만 질병을 유발하는 것은 병원균이다. 한때 질병의 원인을 병원균 하나로만 여겼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병원균보다 사회 환경에 더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바라 씨가 모든 질병의 치료가 병원균에만 집중돼 있는 현실을 꼬집는 것은 옳다. 하지만 병원균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