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론, 미국판 연줄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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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론, 미국판 연줄 자본주의
정형준
“정말 엄청나고 놀라운 기업 비리다. [미국식] 기업 문화의 정직함과 투명성을 철썩같이 믿고 있던 대다수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 이러한 금융 재앙은 이미 한 대기업의 실패를 넘어섰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패다.”최근 〈비즈니스위크〉는 엔론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 대기업의 상징이자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성공작으로 거론됐던 엔론은 이제 언급을 삼가야 할 대상이 됐다. 엔론의 성장에서 윤활유 노릇을 했던 위싱턴의 정치인들 역시 이제는 엔론과 거리를 두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
엔론의 몰락은 탐욕, 사기, 정치 권력과의 뒷거래로 얼룩진 뻔한 스토리다. 미국에서 일곱번째로 큰 기업이 대규모 장부 조작과 막대한 부채, 정치적 뒷거래, 온갖 사기 사건에 휘말려 파산했다. 엔론의 흥망성쇠는 자본주의 자유시장의 축소판이다.
규제 완화
엔론은 1985년에 구식 천연가스 송유관 업체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엔론의 설립자 케네스 레이(위싱턴에 많은 줄을 대고 있던 전직 연방 관료)는 전력 산업의 규제 완화에 찬성하는 정치인들을 이용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엔론은 발전소에서 전기를 싸게 공급받아 기업과 가정에 비싸게 되팔았다. 엔론은 곧 신경제와 규제 완화, 자유시장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엔론의 성장은 거의 독점에 가까운 시장 지배력 덕분이었다. 엔론은 미국의 모든 천연가스와 전기 거래의 4분의 1을 차지하게 됐다. 이러한 지배력을 이용해 2000년에는 캘리포니아의 전기 요금을 거의 4배로 올리려 하기도 했다. 사실, 규제 완화가 없었다면 엔론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엔론이 에너지 공급업체뿐 아니라 정치권을 공격적으로 매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우익 이데올로그들은 엔론에 톡톡히 ‘공헌’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엔론은 에너지 부문에서 거둔 성공을 석탄·제지·플라스틱·금속·파생금융상품 시장에서도 재현하려고 했다. 1990년대 말에는 인터넷 ‘대역폭’ 사업에도 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그러나 인터넷 거품이 꺼지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광통신 네트워크가 실수요보다 33배나 과잉투자됐던 것이다.
엔론은 자유시장의 무질서를 이용해 거침없이 성장했지만, 똑같은 자유시장의 무질서 때문에 파산과 몰락을 겪게 됐다.
장부 조작
엔론은 부채가 늘어나자 이를 수많은 비공식 ‘자회사’에 은폐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상당히 많은 이익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경영진은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다.
3천5백 개가 넘는 엔론의 자회사 중 9백여 개는 케이먼 제도 같은 ‘조세 피난처’에 세운 회사였다. 엔론은 이들 ‘조세 피난처’의 자회사를 이용하는 수법과 기타 기술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최근 4년간 세금 한푼 내지 않았다. 오히려 3억 8천2백만 달러 상당의 세금을 환급받을 자격까지 확보했다.
엔론은 회계장부 조작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2000년에 회계법인 아서 앤더슨이 엔론의 회계감사 비용으로 받은 돈은 2천7백만 달러였다. 게다가 ‘경영 컨설팅’ 대가로 2천8백만 달러의 돈을 더 받았다. 엔론이 파산하자 전문가들은 엔론의 장부 조작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들이 결산을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해 수치를 조작하는 일은 흔하다.
더욱이 엔론이 이윤을 많이 벌 때는 어느 누구도 그런 장부 조작을 문제삼지 않았다. 9월 말에도 〈워싱턴 포스트〉는 “증권사의 엔론 담당 애널리스트 17명 중 16명이 엔론의 주식을 ‘매수’ 추천 또는 ‘강력 매수’ 추천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엔론이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10월에 레이는 당해 연도 3분기 손실이 6억 1천8백만 달러라고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숨겨 둔 부채를 고려하면 회사의 가치가 12억 달러나 줄어든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몇 주 뒤에 엔론의 경영진은 이전 5년 간의 소득이 5억 달러나 부풀려졌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11월에 소규모 경쟁업체인 다이너지가 엔론을 인수하겠다고 막판 제의를 했지만 협상은 결렬됐고, 결국 12월 4일 레이는 파산을 선언해야 했다. 사상 최대의 파산이었다.
그날 엔론 노동자 4천 명이 해고됐다. 하지만 엔론 경영진과 노동자들 사이의 운명은 극명하게 달랐다. 〈뉴스위크〉는 “가장 큰 피해는 퇴직금과 연금이 사라져 버린 무고한 해고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고 보도했다. 엔론의 최고 경영진은 부도 전에 이미 11억 달러어치의 주식을 팔아치웠고, 반면에 퇴직금이 자사주에 잠겨 버린 노동자들은 13억 달러의 손실을 봤다. 최고 경영인과 엔론 노동자의 평균임금 차이는 531 대 1이었다.
정경유착
1997년에 금융 위기가 아시아를 강타했을 때, 미국의 재계는 ‘연줄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정부·은행 등과 결탁된 기업 경영진들이 장부 조작 등을 통해 금융 문제들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미국도 ‘연줄 자본주의’와 다름 없으며 엔론이 바로 그 증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엔론은 위싱턴의 친구들에게 엄청난 돈을 뿌렸다. 지금 부시는 엔론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다. 엔론 사건이 터진 후 부시는 ‘엔론’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도 않았다. 또, 텍사스 주지사 선거 당시 레이가 부시의 경쟁자였던 앤 리처드를 지지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부시와 레이는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친밀한 사이다.
아르헨티나의 전직 장관에 따르면, 1988년 당시 아버지 부시가 부통령을 지낼 때 아들 부시는 3억 달러 상당의 송유관 계약을 엔론에게 선사하려고 갖은 로비를 벌였다. 아들 부시는 아버지가 부통령 이던 시절부터 레이를 알고 있었고, 자신의 주지사 선거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엔론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다. 그 대가로 그는 텍사스 주의 에너지 규제 완화를 지원했다.
부시는 백악관에 가서도 여전히 엔론의 친구였다. 부시 정부의 각료 수십 명이 엔론의 주식을 배당받았고 그 중 몇 명은 지난 1월에 직접 이사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부시의 경제수석비서관 로런스 린지, 무역대표부 대표 로버트 죌릭, 육군장관 토머스 화이트도 포함돼 있다.
현직 부통령 딕 체니는 11월에만 엔론의 이사와 여섯 차례 만났으며, 엔론이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 10월 16일 전에는 적어도 매주 한 번 이상 만나 사태를 논의했다. 엔론 경영진은 부시 정부가 은행의 채무상환 요청에 개입해 줄 것도 요구했다.
엔론은 백악관뿐 아니라 상원의원 71명, 하원의원 188명에게도 돈을 주었다. 200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엔론이 사용한 정치자금 240만 달러의 대부분은 공화당이 받았지만, 일부는 민주당으로 흘러들어 갔다. 영국 황실과 토니 블레어 정부도 엔론의 자금을 받았다. 엔론이 진출한 세계 각지의 지배자들은 모두 로비의 대상이었다.
자본주의
엔론 게이트는 기업이 이윤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식의 정경유착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정경유착이 엔론 파산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가 항상적으로 동반하는 주기적 경기후퇴의 진정한 원인이다.
호황과 불황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의 본질이다. 개별 기업은 경쟁에서 다른 기업을 이기기 위해 더 많은 이익을 내야 한다. 그러나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 모든 기업이 이익의 감소를 각오해야만 한다.
앞뒤 가리지 않고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확장하던 기업은 갑작스런 후퇴와 추락에 직면하게 된다. 엔론처럼 지나치게 확장한 기업이 최초의 희생자가 된다. 살아남은 기업은 임금 삭감과 공장 폐쇄로 대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을 뽑아 낼 수만 있다면 무기를 생산하는 데도 수십조 원을 낭비하지만 이윤이 생기지 않으면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제공돼야 할 의식주와 의료 서비스도 뒷전으로 밀려난다.
문제는 이윤 체제 자체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일상적인 싸움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위한 더 큰 투쟁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