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해빙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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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공동 선언에 통일 방안에 대한 합의가 담기자 ― 1항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2항 남측 연합제 안과 북측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의 공통성 인정 ― 통일에 대한 관심과 바램이 높아지고 있다. “통일의 첫발”을 디뎠다는 평가가 줄을 잇고, 특히 통일 운동 진영은 통일이 코앞에 다가온 듯한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못마땅한 〈조선일보〉는 “북한을 향해서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도 실천력 없는 통일 논의는 공허하다는 것을 일깨워야 한다”고 김대중 정부에 주문한다. 괜시리 기대치를 높이지 말고, 정상회담이 통일을 하자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라는 요구다. “통일 대신 ‘우호적 분단’을 얘기해야 한다. … 일부 인사들은 그것을 ‘반통일’이라고 매도하겠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지고의 가치는 평화이고 공존이고 대화이고 화해라는 것을 김 대통령은 만천하에 천명해야 한다.” 〈조선일보〉는 마치 자기네가 그 동안 평화와 공존과 대화와 화해는 진심으로 바라고 주장해 온 양 역겹기 짝이 없는 훈수를 두었다.
김대중은 〈조선일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의 평소 신념이 “통일은 서서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지난 7월 10일 “통일 정세”가 무르익었다는 들뜬 분위기를 겨냥한 듯 이렇게 주장했다. “통일은 서로가 더 안심할 때까지 이삼십 년 정도 기다려도 된다. … 지금은 경제적 능력이 없고 국민 감정이 받아들일 수 없어 남북의 통일을 바랄 수 없[다].”
이것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공통성이 인정된 국가연합의 기본 내용이다. 범민련, 한총련, 전국연합 등은 6·15 공동선언을 통일 선언이라고 환호하면서 한껏 고무돼 있지만 동시에 큰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김대중을 통일의 한 주체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주장 때문에 얼마 전까지 “반통일 세력”으로 비난했지만, 그가 공동선언의 당사자가 된 것을 어쩌겠는가. 국가연합과 연방제의 공통성을 인정한 것은 그 동안 범민련과 한총련 등이 해석해 온 바에 따르면 사실상 반통일과 통일 사이의 공통성을 인정한 것과 다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희망이 앞서는 해석들과는 달리 남북 공동선언은 실제로는 당장 통일을 하자는 합의는 아니다. 그럼에도 남북 화해 분위기는 사회적으로 통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우리는 통일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분단의 기원 ―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
통일을 원하는 민족 감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민족은 강제로 분단돼 살아 왔고 이로 인해 여러 고통을 겪었다. 한반도가 왜 분단됐는가를 살펴보려면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 민족은 19세기 후반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에 직면했다. 1876년에 일본은 조선에 강화도조약 맺기를 강요했다. 한반도를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세력 확장에 불안해 하고 있던 청나라는 조선 정부가 갑오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자 이를 기회 삼아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일본은 전쟁을 도발했다. 이때 이미 한반도를 한강 선으로 분할해 남과 북을 각각 일본과 청나라의 세력권에 두자는 의견1이 제시되기도 했다. 한반도를 무대로 벌인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으나, 이 승리는 곧 러·일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태평양에 진출하기 위한 부동항을 구하려고 한반도를 기웃거렸다. 게다가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외교 정책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또 한번의 강대국간 전쟁을 일으켰다. 이 때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각각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권 안에 두자는 분할안이 러시아로부터 나왔지만2 일본은 이를 거절하고 영국과 미국의 재정 원조를 받아 러·일 전쟁을 치렀다. 영국과 미국은 일찌감치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했다. 미국은 1905년에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 보호권 확립을 찬성하는 ‘태프트·카츠라 비밀협약’을 맺었다.
1905년에 일본은 조선과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음으로써 외교권과 통치권의 대부분을 빼앗았고 1910년에는 한반도를 완전 강점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서로서로 식민지 강점을 용인해 주었다. 미국은 “한국에서의 일본 행정이 매우 선의에 차 있고 한국민의 행복을 위해 힘쓰고 있는 흔적이 역력하다”고 평가했다. 영국은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의 한 신문은 일본의 조선 강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병합이 조선과 이해관계가 있는 열국의 동의를 얻어 단행되었고 러시아도 이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36년 동안의 일제 강점이 1945년 일본 패배와 함께 끝났지만, 이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2차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을 분할 점령했다. 미국은 8월 6일과 8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이 때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로 진격해 들어왔다. 뒤늦게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소련이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삼킬까 봐 걱정이 된 미국은 서둘러 미국과 소련의 군사 점령 분계선을 획정하려 했다. 미군은 오끼나와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남하 속도를 따라잡을 도리가 없었다.
미국이 제안한 ‘일반명령 제1호’는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에서는 소련군 사령관이 항복을 받고, 38도선 이남의 한반도에서는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항복을 받도록 분할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소련은 ‘일반명령 제1호’의 한반도 분할 점령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조선 민중은 해방의 기쁨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돼 군사통치 아래 들어갔다.
미국과 소련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유지·확대하기 위해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미국은 남한을 반소의 전초기지로 만들려 했다. 맥아더의 보좌관들은 한국에 파견된 미군 요원들에게 이렇게 교육했다. “점령의 일차적인 목적은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새 사회 건설의 희망에 부푼 노동자·민중 운동의 파괴를 뜻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가 건설됐고,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버리고 간 공장을 접수해 운영하는 자주관리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화신 같은 한국인 자본가 공장에서도 벌어졌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식량공급 체계를 조직했다. 미군이 주둔하기 이틀 전인 9월 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이런 상황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환영할 리 없었다. 미군은 조선인민공화국 주최로 인천항에서 열린 미군 환영식에 발포하라고 일본군에 명령했다. 환영식장에서 조선인 2명이 죽었다. 조선인들을 ‘해방’하러 왔다는 사람들이 조선인들을 억압하기 위해 이전 억압자인 일본군을 이용한 것이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스스로 정부를 자처하는 잡다한 집단”이라고 매도했다. 그리고 “38선 이남에서 미군정만이 유일한 합법 정부”라며 “정부를 참칭하면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미군정은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 운동이 사유재산을 침해한다며 탄압했고,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탄압했다. 미군정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민중항쟁을 대량 학살로 진압했다. 미군정의 탄압은 매우 잔혹했다. 미군 정보 장교 콜드웰은 조선인을 대하는 미국인 경찰고문관의 태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들 고문관들은 인종적 편견과 무지에 입각하여 ‘황인종’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생각했다.”
친일파는 권력을 유지했다.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들이 해방 뒤에도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을 짓밟았다. 한국 경찰의 기초를 놓은 매글린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일본인들에 의해 훈련받은 사람들을 그대로 쓰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천부적으로 경찰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만약 일본인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다면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다.”
조선 북부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조선 북부를 점령한 소련군도 미군과 마찬가지로 친소 정권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스탈린은 소련의 점령지 정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 다른 나라를 점령한 승전국은 자신의 군대가 그렇게 할 힘을 갖고 있는 한, 자신의 체제를 점령당한 나라들에게 강요할 권리가 있다.” 미군이 9월 8일 주둔한 데 비해 소련군은 8월 12일에 이미 나진과 청진을 점령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대규모 운동이 분출하기 전에 대부분의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각지에서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탈린은 9월 20일 북조선 주둔 소련군에게 다음과 같이 지령을 내렸다. “현지 주민들로 하여금 평화적 노동을 계속하고, 산업 및 상업 기업 그리고 공영 및 기타 기업의 정상적인 작업을 보장하며, 소련군 당국의 요구와 명령을 이행하며, 공공질서의 유지에 협조하도록 호소할 것.”
이에 따라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은 금지됐다. ‘공장을 노동자에게로’라는 구호와 ‘빈농위원회’는 좌경적 오류로 지적돼 억압당했다. 소련군이 일본인 소유 공장에 대한 권한을 모두 장악했다.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입장을 좇아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이 “자본가들에게 일종의 공포감을 주고 …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또, 소련군은 각 지방 인민위원회의 지도부를 재편하고 소련군의 통제를 따르게 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북한 지역 인민위원회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했으나 소련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련군은 조선 북부에서 전리품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소련군 유지비를 요구했고, 천연 자원과 쌀을 약탈해 갔고, 산업 시설들을 철거해 갔다. 심지어 중요 산업 시설을 소련 극동지역으로 수송하기 위해 철도보안대까지 창설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열리고 1946년과 1947년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미국과 소련은 절충안을 찾지 못했다. 한반도 전체를 자기 지배력 아래 둘 수 없다면 절반만이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게 미국과 소련의 계산이었다. 결국 1948년에 두 개의 한국 ― 소련 점령지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 점령지의 대한민국 ― 이 생겨났다. 분단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지키기 위해 한편으로 미국과 다른 한편으로 중국·소련이 한반도를 무대로 해서 벌인 한국전쟁으로 한층 굳어졌다.
일본 식민주의, 일본 패망 이후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 그리고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국과 중국이 모두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다. 제국주의적 침략과 분단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징병, 죽음, 이별 등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민족주의는 이처럼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국주의 억압에 대한 반감, 즉 반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민족을 경제·지리·언어를 기준으로 삼아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어떤 추상적인 기준도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역사 의식과 감정과 욕구다. 제국주의 강대국에 대한 종속의 기억은 이 국가가 상당한 정도의 독립을 쟁취한 뒤에도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외세에 의한 분단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기 원하는 민족 감정을 이해하고 지지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누구를 침략해 본 적도 없으며 통일을 하더라도 주변 나라들을 억압할 가능성도 없다. 피억압 민족에 대한 지배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자결권을 요구하는 경우라면 이것을 지지할 수 없지만(예컨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을 지배하려는 유태인들의 자결권) 한국 민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남북한 주민들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해 살고 싶다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통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재통일 결정을 포함해 강대국들의 간섭 없이 살자고 결정할 권리, 즉 자결권을 지지해야 한다.
적대 관계 속의 공생
두 개의 한국은 각각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의 모습을 좇아 건설됐다. 지난 50년 동안 남과 북은 각각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했고, 자체의 지배계급을 형성했고, 자체의 부(富) 축적 방식을 추구해 왔다. 미국과 소련은 국민국가의 건설과 경제 발전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남한 지배자들은 극동의 반공 보루로서 원조 덕을 보기도 했다. 그 결과 남북한은 세계 중류 수준의 공업국으로 성장했고(북한이 지금 심각한 경제 붕괴 상태에 있지만 1970년대까지는 놀라운 속도로 공업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대규모 노동계급이 형성됐다.
통일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한반도 주변의 열강만이 아니었다. 남북한의 지배계급은 각각 별도의 국가를 건설하면서 통일은 그저 먼 미래의 일로만 미뤄 두고 오히려 적대관계를 정권 유지의 명분으로 이용해 왔다.
한국전쟁을 앞뒤로 한 시기에는 남북한 당국이 공공연히 무력 통일을 주장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에는 반공·반북 의식이, 북한에는 반미·반남 정서가 팽배했다. 이승만은 국제적으로는 ‘유엔 감시하의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주장했지만, 국내적으로는 북진통일을 내세우고 있었다. 북진통일은 또 다른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얼마나 호전적이었던지 미국은 그가 미국과 상의 없이 전쟁을 일으킬까 봐 걱정이 돼 북방한계선(NLL)3을 정하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대화를 통한 통일을 배격했다. 제3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왔던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선거가 끝난 뒤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사형당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에 1960년 4월혁명으로 분출했던 통일운동을 짓밟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수천 명의 인사들을 용공 혐의로 잡아들였다.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이른바 ‘선 경제건설 후 통일’을 주장했다. “국토통일을 위해서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통일을 입에 담는 것조차 불온시됐다.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천명했지만, 그것을 종신 권력을 구축하는 지렛대로 사용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다. 통일 시대를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유신 개헌을 단행한 것이다. 그 뒤에 들어선 정권들도 자신의 통일 방안을 거창하게 발표하곤 했지만, 그것은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국민 과시용이고 상대방 압박용이었다. 남한 지배계급은 수십 년 동안 북한과의 대치 상황을 이용해 내부의 적을 탄압하고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분단 국가 건설에 매진하기는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대남정책의 핵심적 개념으로 알려진 ‘민주기지론’은 흔히 잘못 해석돼 왔다.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민주기지론을 무력 적화 통일 방안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기지론은 분단 국가 건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을 원용해 한반도의 한 지역에서 먼저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종석의 지적대로 ‘민주기지론’은 “통일을 향한 적극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한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혁명 건설을 통일의 관점에서 정당화시키기 위한 매개 개념의 성격이 더 강하다”4고 할 수 있다.(여기서 ‘사회주의 건설’ 또는 ‘혁명 건설’은 급속한 중공업 건설을 뜻하는 것으로 읽으면 된다.) 이런 점에서 ‘민주기지론’은 박정희의 ‘선 경제건설 후 통일론’과도 일맥상통했다.
이것은 북한 당국이 민주기지론을 당건설, 경제 발전의 성과를 통일 문제와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제시하곤 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북한의 《정치사전》은 민주기지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미제의 남조선 강점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혁명을 밀고 나갈 수 없게 된 조건에서 공화국 북반구에 조선혁명의 강력한 보루, 혁명적 민주주의를 창설할 데 대한 독창적인 노선[을 김일성이 내놓았으며] … 공화국 북반부에 혁명적 민주기지를 창설하기 위하여 우선 당을 창건하고 당의 령도 밑에 인민정권을 세[웠다.]”5
1960년대부터 주창된 ‘남조선혁명론’의 밑바탕도 “북반구 혁명적 기지의 가일층 강화”였다. 북한 관료들은 노동자들을 더 오래, 더 많이 일 시키기 위한 증산 운동에 ‘전투’, ‘투쟁’ 등의 구호를 붙이고는 경제 성장이 ‘반미’와 ‘통일’과 관련 있는 양 명분을 내세우곤 했다. 북한에서 “경제투쟁”은 임단협 투쟁이 아니라 증산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한도 남한과의 적대 관계를 내부의 적을 탄압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해 왔다.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북한은 모든 권력을 국가 주석 김일성을 중심으로 편재하는 기형적인 새 헌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북한 당국은 남북 화해 국면을 이용한 남한의 유신 체제 수립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하지 않았다. 최근에 남측 언론사 사장단을 만난 김정일도 “그 때 그 환경에서는 유신이고 뭐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마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이 “무정부적 민주화”를 주장하기라도 한양 말했다.
남북한 지배자들 사이에 서로 눈감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노골적인 뒷거래도 있었다는 사실이 1998년 북풍 사건 폭로를 통해 확인됐다. 1996년 4·11 총선 때 북한이 DMZ에서 무장 시위를 벌인 것은 김영삼 정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북풍 사건을 조사한 전 국정원장 이종찬은 1992년 대선에 영향을 준 대형 간첩단 사건인 ‘중부지역당 사건’과 1987년 대선에서 여권이 이기는 데 결정타 구실을 한 ‘KAL 기 폭파사건’도 북풍사건이었을 것이라고 의구심을 나타낸 바 있다.
냉전 해체와 남북한 및 주변 열강과의 관계 변화
1980년대 말 냉전의 해체는 남북 관계에 여러 변화의 조짐들을 불러 왔다. 북한-소련, 북한-중국6을 한편으로 하고, 남한-일본-미국을 한편으로 하는 냉전 구도가 무너지면서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한층 복잡하고 불안정해졌다. 많은 사람들은 냉전 해체로 통일 여건이 조성됐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북한은 냉전 해체 전부터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1970년대까지 북한의 대남 정책은 남한에 대한 경제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남북 합작은 남조선 경제 복구의 담보” ― 이 말은 1960년대 북한이 가장 자신있게 남한측에 제시했던 제의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의 경제력 균형은 뚜렷이 남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북한의 연평균 성장률은 1975~85년에 4%대로, 1986~89년에 2% 수준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7 1987년에 북한은 채권국에 대해 공식적으로 지급 불능을 선언했다. 1988년에는 소련에 무역대금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자 북한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1991년 1월 소련은 대북 무역에서 예전 같은 특혜를 중단하고 경화 지불을 요구했다. 북한 총 무역량 가운데 소련과의 교역이 5분의 3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에너지 수입은 전해보다 75%가 줄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수입 에너지 물량의 3분의 2를 중국에 의존하게 됐는데, 중국마저 그 해 5월부터 무역 특혜를 중단할 방침이라고 통보해 왔다. 북한은 석유 소비량의 4분의 1 가량을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이 잇달아 멈추고 건설이 중단됐다. 북한의 GNP 감소폭은 1990년(-3.7%)에 비해 1991년(-5.1%)과 1992년에(-7.7%)에 더욱 커졌고, 그 뒤 10년 동안 북한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고르바초프가 1989년 12월 몰타회담을 통해 미국과 적국이 아님을 선언하고, 1990년 6월 노태우와 정상회담을 갖자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한국과의 관계 개선 결정을 알리러 소련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 외교부장 김영남은 북한 당국의 입장을 이렇게 전달했다.
- 한-소 수교는 한반도의 영구 분단에 대한 국제적인 적법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소련이 남한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 그렇게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보다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 소련이 남한을 승인하게 되면 남한은 동독에 대한 시나리오를 본떠 북한의 사회주의를 말살하고 북한을 집어삼키기 위해 더욱 무모한 시도를 할 것이다. 그로 인해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될 것이다.
- 소련의 남한 승인은 1961년 체결된 북-소 안보조약의 근간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고 정책 수립에 있어 소련과 협의할 의무에서 벗어날 것이다.
- 북한과 소련의 동맹조약이 파기되면 북한은 희망하는 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8
대단한 분노가 묻어나는 그리고 어느 정도 협박조인 위 글에는 누구의 통제에도 따르지 않게 된 동시에 의지할 곳도 없어진 북한의 처지가 잘 드러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소련이 통제하던 동안은 북한이 안정된 지역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된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 항의 “희망하는 무기”가 핵무기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미국은 소련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와 1990년 2월부터 5월까지 이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중국과의 관계는 소련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았지만 소원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1990년 9월 김일성은 중국 선양을 방문해 장쩌민·덩샤오핑과 각각 회담을 가졌는데, 김일성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선양 회담 한 달 뒤 한국과 준영사급 무역사무소를 개설하는 데 합의했다. 1991년 5월에는 한국의 유엔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급기야 1992년 8월에는 한중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9 북한 당국은 북한이 미국·일본과 수교할 때까지 중국이 남한과의 공식 관계 수립을 유보해 주기를 바랐지만,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은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과 수교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 한-소 정상회담 이후 일본과의 관계 개선 노력을 쏟은 결과, 그 해 9월에 일본 외무성 관리, 보좌관, 언론인 들과 함께 44명의 의원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방문자 가운데는 일본 정치계 제1실력자 가네마루 신도 포함돼 있었다. 김일성은 북-일 국교를 즉각 정상화하자고 제의했다. 이것은 그 동안 북한이 반대해 온 남북한 교차 승인을 뜻했다.
북한은 1965년 한일협정의 전례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그 중 일부라도 국교 정상화가 되기 전에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긴 협상 끝에 일본의 자민당·사민당 합동 대표단은 “일본은 36년간의 식민 통치와 2차대전 후 45년간의 비정상적인 대우에 대해 북한에 공식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이 북일 수교를 가로막고 나섰다. 미국은 일본 정부에게 ① 북한이 핵사찰을 받아들이게 하고, ② 전후 45년의 보상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③ 식민지 기간의 보상도 북한 군사력의 강화에 이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받으며, ④ 남북대화가 후퇴하지 않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구했다.10 사실상 회담을 결렬시키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가네마루는 주일 미 대사에게 미국을 제쳐놓고 성명서를 발표한 데 대해 사과해야 했다.
북한은 남한에도 고위급회담을 제의했다. 1990년 10월 안기부장 서동권의 평양 방문으로 시작된 대화로 1991년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됐다. 한반도의 화해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도 한껏 달아 올랐다.
북한은 미국과의 수교에도 관심을 보였다. 김일성은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미군의 즉각 철수에서 한발 물러난 주장을 폄으로써 대미 관계의 변화를 소망하는 제스처를 보냈다. “미국이 남한에서 한꺼번에 모든 군대를 철수할 수 없다면 점진적으로 철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11 또, 5월 28일에는 미군 전사자 유해 5구를 미국에 돌려 주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핵사찰을 수용하라”는 것뿐이었다.
미국의 북한 핵사찰 요구가 거세지면서 남북 관계는 덩달아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남북 화해와 불가침 그리고 교류·협력” 약속은 물거품이 됐다. 평범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냉전이 해체된 뒤에 한반도 긴장이 더욱 고조됐던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키려는 미국 때문이었다.
냉전 해체 이후 미국의 대북 정책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냉전 해체 이후에도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도발로부터 우방국을 지킨다는 냉전 시기의 명분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미군은 이제 무슨 근거로 전세계에 주둔할 것인가? 1990년대 초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새로운 위협이 지난 45년 동안의 전통적 동서 대립 밖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말로 미국의 탈냉전 시대 전략을 암시했다.
북한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위협” 구실을 맡을 적임자였다. 북한은 소련과 소원해지고 미국과는 수교를 맺지 않는, 제멋대로인 골칫덩이요 시한폭탄 같은 이미지에 딱 알맞았다. 게다가 북한은 1970년대까지 놀라운 경제 성장을 기록한 공업국이고, 군사에 많은 비용을 투자해 온 나라였다.12 이 점도 미국이 제기하는 ‘의혹’의 개연성을 뒷받침해 주는 조건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을 이를 데 없이 과장했다. 그래야 이 “새로운 위협”을 다스리는 미국의 능력이 더욱 위대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이 이라크에도 똑같이 써먹은 수법이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홀리 스클라는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 국방부는 고의로 이라크의 위력을 과장했다. 이라크 군대를 제3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의 하나로 묘사한 것이다. 그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라크를 오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승리를 더욱더 영웅적으로 보이게 과대포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13
그러나 미국이 걱정한 것은 북한 자체가 아니었다. 동북아 다른 나라들이 북한을 군사력 증강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게 미국의 진짜 걱정거리였다. 미국은 특히 일본이 걱정스러웠다. 미국은 북한의 핵을 문제삼았다. 그것은 미국이 탈냉전 시대 세계 전략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삼고 있는 핵무기확산 통제 정책의 일환이었다.14 미국은 탈냉전 이후 확산될지도 모를 각국의 핵무장에 쐐기를 박으려고 북한을 본보기로 삼았다. 전세계 거의 모든 언론은 북한을 무시무시한 악당으로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북미 관계는 대개 범죄와 처벌에 관한 사건으로 보도됐다. 북한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경제제재를 받는 불법 국가로 묘사됐다. 북한의 양보조치는 경시됐으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제안은 의도적으로 무시됐다.15 미국은 북한에 온갖 협박을 퍼붓고 전쟁도 불사하려 했다. 클린턴은 남한에 상당수의 증원군 파병을 승인했고 북한의 핵시설을 공습하는 계획이 준비됐다. 전쟁을 할 경우 1백만 명 이상이 죽을 것이란 예측이 나왔지만, 미국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한국인 1백만 명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됐다.
결국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잔류하고 사찰을 받기로 약속했으며, 흑연감속 핵 반응기를 경수로로 대체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에게 불리한 협정이었다. 세계 제일의 핵강국인 미국이 남의 나라의 핵 개발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자체가 위선일 뿐 아니라, 북한에 핵 투명성을 강요한 미국 자신은 정작 한반도에서 비핵화 약속을 지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부시는 1991년에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겠다는 공식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남한 당국에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 여부와 상관 없이 한국에 핵우산을 계속 제공하겠다’고 비공식 통보를 한 바 있었다.16 지금까지도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 공격 위협을 결코 철회한 바 없다.
그런데도 미국과 남한내 우파들은 미국 정부가 지나치게 양보를 해 북한에 경제적 보상을 해 줬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왜냐하면 흑연감속로는 1990년 이래로 심각한 에너지난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의 전력 공급원 ― 그로부터 플루토늄을 추출했든 안 했든 ― 이었기 때문이다. 경수로와 중유 제공 약속은 최소한의 보상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에 필요한 돈을 제공하는 데서는 꽁무니를 뺀 채 일본과 남한 ― 주로 남한 ― 에 책임을 전가했다.
대북 전쟁 위협과 제네바 협상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미국은 냉전 해체 뒤에도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손뗄 생각이 전혀 없으며, 동아시아의 안정이 미국의 군사력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라고 동아시아의 다른 열강에게 선언한 셈이었다. 패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깡패짓을 미국 자신은 “전쟁억지력”, “지역적 균형자”라고 불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구상도 확립돼 갔다.
1990년 미국 국방부는 ‘동아시아 전략구상’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지(EASI)’라고 부르는 이 전략 구상은 동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3단계 철수안을 담고 있었다. 이에 따라 1단계로 1992년 12월까지 모두 1만 5천여 명의 미군이 아시아를 떠났고, 주한미군 6천9백87명도 철수해 3만 7천4백13명으로 줄었다. ‘이지’는 1992년에 ‘이지 투(EASI Ⅱ)’로 수정됐다가 1995년 2월에 다시 수정돼 ‘동아시아 전략보고서’로 발표됐다.17
이 전략은 주한미군 2단계 감축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고 주한미군을 앞으로 10년 동안 유지한다는 것과, 주한미군·주일미군·미 제7함대의 해상지원 병력을 포함해 동아시아에 전진배치한 10만 명의 병력을 계속 유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문서는 아시아 주둔 미군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비교적 솔직하고 분명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에 대한 미군의 전진 배치는 지역 안보와 미국의 전지구적인 군사적 위치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태평양 지역에 전진 배치된 군사력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신속하고 유연한 위기 대응 능력을 보장한다. 그것은 지역적 패권국가의 등장을 억지한다. 이 지역에서 광범한 영역에서의 중요한 문제들에 미국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국가 안보 목적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미국 군사력의 숫자를 줄임으로써 제한된 군사력을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방대한 태평양이 제기하는 시간과 거리상의 불리점을 극복하게 해준다. 미국의 친구들, 우방국가들과 잠재적 적대국들에게 다같이 이 지역 전체의 안보에 대해서 미국이 가진 관심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18
냉전 해체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잘 보여 주는 이 보고서는 “21세기에도 미국은 태평양 세력으로 계속 남을 것이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19 냉전 해체와 더불어 부풀었던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 속에 허물어졌다.
제네바 협상 즈음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북한이 미국의 핵심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점(NPT 잔류, 핵개발 포기)과 함께 김일성의 죽음은 미국 태도 변화의 중요 요인이었다. 미국은 김일성의 죽음을 계기로 북한이 격변에 휘말릴까 봐 걱정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나라들은 김일성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고 북한이 붕괴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공식 표명했다. 이런 태도는 1994년부터 1997년 상반기 정도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관계가 더 험악했던 쪽은 남북한간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반대하고 나섰다. 1996년 1월 하와이에서 대북 쌀 지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한·미·일 3국이 만났을 때도 한국 정부는 나머지 나라들을 집요하게 설득해 ‘정부 차원의 지원을 유보’한다는 ‘협의’를 얻어냈다. 미국은 남한 정부의 눈치를 보며 국제 기구를 통한 대북 식량원조를 추진했고, 일본에서도 “북한에 식량 지원을 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론”이 주류를 이루었다.20
“고장난 비행기”론 같은 ‘붕괴론’이 남한 지배자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일관되게 북한의 붕괴를 바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남한 지배자들은 북한의 붕괴가 몰고올 파장을 두려워했다. 이런 혼란을 한몸으로 표현하고 있던 김영삼에 대해 전 주한 미 대사 제임스 레이니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이성적으로는 북한의 붕괴가 재난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북한과 협조하기 위해 현재 추진하고 있거나 앞으로 추진하려는 일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북한이 붕괴함으로써 자신이 통일 한국을 통치하는 첫번째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21
이런 혼란은 국내 정치와의 연관에서 비롯한 대북 정책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때문에 심화되곤 했다. 1994년 이후 미국과 일본이 골치 아파 할 정도로 남한 정권이 ‘강경’ 방향으로 튀었던 계기가 김일성 죽음 직후의 ‘조문 파동’ 때문이었던 점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조문이 가져올 대북 이데올로기의 균열이 국내 정치의 위기를 가져올까 봐 한층 우경화된 국내 정치 상황이 남북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1998년 초경부터 미국은 북한을 다시 한번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북미간에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1997년 12월 9~10일 열린 4자회담 첫 본회의는 오히려 미국이 만족할 만했다. 그런데도 미국 국무부 차관보 스탠리 로스는 다음 번 접촉의 일정표 제시를 거부했다. 객관적 상황이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담 자체의 성과로 섣불리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국 국방부 아시아 태평양 지역 부국장을 지낸 바 있는 척 다운스는 완고한 우익 입장에서 쓴 책 《북한의 협상 전략》에서 이렇게 시인했다.
협상은 진공상태에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협상 테이블 이면에서 벌어지는, 회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이는 수많은 사건들이 회담의 탄력을 둔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때 남한은 동남아에 이어 전혀 예상치 못한 심각한 금융위기를 맞이하였다.22
대부분의 사람들은 1998년에 재현된 한반도 전쟁 위기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실험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실험 발사하기 몇 주 전 미국 정보기관은 북한이 핵합의를 위반하고 대규모 지하 핵시설을 건설중임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2주 전에는 〈뉴욕타임스〉에도 이런 내용이 보도됐다. 클린턴 정부의 한 관리는 “북한이 지하에 새로운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건설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 뒤 확인됐듯이 클린턴 정부가 지목한 금창리 지하시설은 빈 동굴이었는데, 이것이 1998년 한반도 전쟁위기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왜 클린턴 정부가 금창리 지하시설을 핵시설로 둔갑시켰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해 5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 5월에 인도가 핵실험을 했는데 이것은 동아시아 세력 균형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인도는 공공연히 중국을 적국으로 생각한다고 표명하고 있었으므로 인도의 핵실험은 중국의 핵전력 증강 노력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중국의 무기 증강은 일본의 무기 증강을 자극할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 핵무기 등을 개발하려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동아시아는 경제 공황에 빠져 있었고 이와 함께 심각한 정치 불안을 겪고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최근에 발표된 ‘아시아 2025’라는 보고서에는 미국이 “일본-인도 동맹” 등 새로운 동맹관계 출현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 실렸는데,23 이 보고서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미국은 해결의 실마리를 또다시 북한에서 찾았다. ‘인도가 핵실험을 한 것은 파키스탄의 가우리 미사일 시험 발사 때문인데, 가우리 미사일은 북한 노동미사일 기술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모두 북한 책임이다!’ 이것이 미국의 해법이었다. 미국의 안보문제 전문가들은 “파키스탄의 미사일 발사 실험이 인도의 핵실험 결정을 자극한 것”24이라는 의도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금창리 현장 방문과 미사일 협상은 냉전 해체 이후 두번째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1998년 11월에는 클린턴이 직접 남한을 방문해 금창리 사찰을 받으라고 북한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 긴장은 1999년 8월 이후에 완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우방들의 안전이 미국 군사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킬 수 있는 전역미사일방위체제(TMD)를 일본이 공동 개발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일본에 몇 년 동안 촉구해 온 끝에 거둔 성과였다. 미국은 동아시아 패권 유지 문제에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1999년 하반기 이래 한편으로 나토 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의 관계 악화 속에 결속이 강화된 중·러와 다른 한편으로 일본의 TMD 공동 개발 약속으로 다져진 미·일이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을 이룬 상황을 배경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남북 정상회담과 4대 열강
남북 정상회담 발표가 있자 한반도 주변 4열강의 움직임은 매우 부산했다. 그 동안 남북간 관계개선을 지지한다고 표명해 왔지만 속으로는 한반도의 (통일을 포함한)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주변국들은 막상 정상회담이 일정에 오르자 변화되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또는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확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지난 두어달 동안 남북한과 4열강(2+4)은 서로서로 정상회담 또는 외무회담 등을 가졌다.
미국은 대북 문제에서 주도권이나 우선 순위가 밀리게 될까 봐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에 변화라도 생길까 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 정상회담 발표가 있자 중국은 정부 대변인을 통해 “환영한다”고 발표한 반면 미국의 첫 반응은 “주한미군은 장기간 머물러야 한다”(코언)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정상회담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은 정상회담 발표 뒤에, 그리고 정상회담이 있은 뒤에 보름이 멀다 하고 뻔질나게 남한을 드나들며 탐색하고 간섭했다. 5월 9일 방한해 대북정책 조율을 위한 한미회담을 가진 미국측 대표는 그 동안 양국간에 “사소한 오해와 마찰이 이번 협의를 통해 해소됐다”고 내비쳐 그 동안 “사소한 오해와 마찰”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미국으로서는 주한미군 주둔과 지위 문제, 남한내 확대되고 있는 반미 분위기가 골칫거리다. 6월 23일 올브라이트가 방한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현지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었는데, 그 뒤(7월 초)에 주한미군에게 혼자 다니지 말라는 경계령이 내려졌다.
또, 북한을 핑계 삼아 추진하고 있던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도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의 NMD 반대에는 힘이 실리게 됐다.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고 G8에 참여한 푸틴은 NMD 반대를 소리높여 요구했다. 게다가 7월 7일에 있었던 두번째 요격 실험도 또다시 실패했다. 유럽 국가들의 반대도 거세고, 미국내 노벨상 수상 과학자 50명도 NMD 추진을 미친 짓이라고 말한다. 미국 국방부는 NMD의 치명적인 결함이 밝혀진 검사 보고서를 공표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 MIT대학의 시어도어 포스털 교수를 세미나실에 감금하고 협박하기도 했다.25 포스털 교수는 보고서를 낸 뒤 한 좌파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NMD체제는 과학적으로 실행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NMD체제는 탄두와 교란 물체를 구별하지 못하고, 수백 개의 탄알로 나뉘어진 생물학·화학 무기는 궤도를 정확히 알아도 맞출 수 없다. 두 차례 실험은 진짜 탄두를 구별하기 위해 모양과 궤도를 미리 알려 준 상태에서 진행됐는데도 실패했다. 성공하도록 조작됐는데도 실패했다는 얘기다. 포스털 교수는 NMD가 세계적인 무기경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안보에 대한 실체를 알 수 없는 위협의 결과로 제기되고 있다. 이 위협은 좀체 믿을 수가 없다. 북한은 GDP가 파라과이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도 파라과이가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요괴’를 발명해 낸 것이다.”
그런데 미국 국방장관 코언은 “NMD 체제 전체가 아닌 실험의 실패일 뿐”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NMD 포기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결정권은 다음 정부로 넘어갔는데, 공화당과 민주당 둘 다 새 정강에서 “NMD 추진”을 표방했다. 이것은 군비경쟁을 자극해 동아시아를 더한층 불안정에 빠뜨릴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남북 정상회담 국면을 이용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을 견제하는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와의 동반자 관계를 확립해 동아시아 맹주로서 지위를 확보하고 싶어한다. 중국은 미국보다 훨씬 빨리 남북 정상회담 사실을 알았고, 베이징 비밀회담을 위한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이미 지난 3월에 중국 대사관을 방문해 남북 정상회담 사실을 통보하고, 중국에 초청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1990년대 동안 한반도 문제에서 영향력이 약화됐던 중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정상회담이 열리기 10여 일 전 김정일은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고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길에 성큼 다가섰다.
러시아는 7월 중순 중국과 북한 방문을 통해 자신이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세력임을, 그리고 북한 미사일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한몫 할 수 있음을 G8 정상들에게 과시하려 했다. 중국 방문을 위해 떠나기 직전에 푸틴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는 유럽 국가임과 동시에 아시아 국가이며 새처럼 두 개의 날개를 갖추게 된다면 더 잘 날게 될 것이다.”
정상회담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 속에서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의 진출에 대비해 북한과의 수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국은 7월 들어서만 세 차례나 북한과 회담을 가졌다. 미국은 여전히 북한을 다스리는 능력을 보여 줌으로써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미사일 회담과 테러지원국 해제를 위한 평양회담이 구체적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미국은 이 회담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세안지역포럼에서 북미 외무회담을 가진 뒤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장기자랑 시간에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꿔 불렀다. “북한을 그 동안 깡패(rogue)로 생각했는데 요즘은 인기(vogue)가 좋다. … 처음 악수할 때 그[백남순]를 무례한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주 세련된 사람이었어요.”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북미 수교가 머지 않아 이루어지리라는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4강의 각축전은 남북 관계의 불안정성도 보여 주고 있다. 전통적인 미·일과의 동맹을 재삼 다짐하고 있는 남한과,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을 끌어들이고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재건하고 있는 북한. 이 둘의 관계개선은 4강의 관계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커다란 위기로 비화될 수도 있는 동아시아의 불안정성은 중국 외교부장 탕자쉬안을 향한 올브라이트의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나의 가장 친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여, 당신의 사랑이 식는다면 난 미 제7함대를 부를 거예요. 이것이 미국의 방법이죠.”
남북 공동선언 1항 ― 자주의 원칙?
미국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 4대 열강은 한반도의 통일을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있지 않지만, 2차대전 종전과 함께 그어진 국경이 유지되는 ‘현상의 지속’에 더 관심이 크다. 한반도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방식의 통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분단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북한 당국은 6·15 공동선언에서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했으면서도 제국주의 열강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특정 세력을 등에 업거나, 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거나, 여러 세력들 사이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 말 한반도 역사는 이런 방식의 비극적 결말을 보여 주었다.
김대중은 “자주”가 주한미군 철수 등 반외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주의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옛날에는 주변 나라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 것을 자주라고 했는데, 우리가 말하는 자주는 그게 아니다.”며 “공조가 자주”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했듯이, 미국이 냉전 해체 이후에 한반도를 두 차례나 전쟁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을 염두하면 “자주”가 “한·미·일 공조”와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순전한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리영희 교수는 김대중을 이렇게 꼬집었다.
김대통령이 ‘한·미·일 공조는 남한에도 좋고, 북한에도 좋은 것’이라고 답변해 김위원장을 이해시켰다고 설명하던데, 이는 북한이 이해할 성격의 답변이 아닙니다. ‘공조’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합니다만 사실상 한·미·일 공조는 군사동맹과 같습니다. 북한을 적대시하고 파멸시키려는 미국의 군사 전략에 입각한 것이 이 공조 체제인데, 어떻게 한국에 좋은 만큼 북한에도 좋을 수 있겠습니까.26
김대중은 주한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상회담 앞뒤로 미국 정부가 확답받고 싶어하는 가장 핵심 사안이었다. 주한 미국 대사 보스워스는 한 강연에서 “주한미군은 한미 상호방위 조약에 따라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있으며 남북 정상회담의 바람직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위협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27 고 주한미군 주둔을 정당화했다. 미국 국방장관 코언은 한술 더 떠 “통일이 돼도 우리 군대가 그 곳[남한]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주한 미군을 철수하게 되면 태평양의 다른 지역 주둔군에 대한 문제도 야기할 것”28이라는 것이다.
김대중은 미국이 행여 오해라도 할까 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주한미군에 대한 고마움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도 주한미군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반미 시위를 억압하고 있다. 김대중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한결같은 공조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그는 남북 정상회담을 나흘 앞두고 한·미·일 도쿄회담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것이 김대중의 “자주”이다. 그는 미국에 맞서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북한 당국의 반미 입장은 흔히 매우 강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냉전 시절은 물론 그 뒤에도 미국으로부터 실재하는 전쟁 위협을 당해 왔으니 “반미”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반미 언사 이면에서 변화의 조짐들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주한미군에 대한 입장 변화를 들 수 있다. 이번 남북 공동성명은 주한미군 문제를 담고 있지 않지만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미 기자 문명자는 6월 30일 김정일과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에 대해 물었다.
문명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점을 설명해서 김 국방위원장께서 완전한 동의는 아니어도 일부 납득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정일: 그 동안 미군더러 나가라고 했지만 그들이 당장 나가겠습니까. 우선 미국 스스로가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들은 분단에 책임이 있는 만큼 통일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날 닉슨도 카터도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는데, 주한미군 문제는 우선 그들 스스로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방향에서 알아서 결정해야 합니다.29
매우 모호한 답변이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김정일이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알아서 결정하게 내버려 두면 과연 미국 스스로 개과천선해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김정일의 답변은 몇 년 전부터 간간히 보도돼 온 주한미군에 대한 북한의 현실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에 친북 좌파는 이런 보도를 거짓·조작으로 치부했다. 1996년에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북측대표 리찬복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서 주한 미군 문제를 바라볼 때 미군이 내일 당장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미군 철수 문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군이 조선반도에 계속해서 주둔할 것이라고 하는 상호 이해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평화보장체제를 만들자는 것이다.”30 올해 7월 7일치 〈교도 통신〉은 북한 당국이 지난 1992년부터 주한미군에 대해 ‘적대적 관계’가 아닌 ‘지역의 균형세력’으로서 일정한 의의를 인정해 주둔의 목적 및 역할을 변경하도록 미국에 제안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 당국은 최근 들어 미국·일본과의 수교에 더욱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북한이 미국에 대해 종종 말은 과격하게 할지라도 더 이상 미국을 일관되게 싸워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김정일은 문명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고위급에서 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일본과도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31고 말했다. 북한은 제국주의 열강과 투쟁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대신에 현재 세계 질서 속에 인정받는 세력으로 편입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 다른 열강인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를 끌어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김정일은 남북정상회담을 열흘 앞두고 중국을 방문한 바 있다.
남북 공동선언 2항 ― 통일선언?
남북 당국이 공동선언 2항에서 연합제 안과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것은 그것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아주 획기적인 일로 평가됐다. 냉전 우익들은 정부가 북한의 적화통일 방안인 연방제를 수용했다며 펄쩍 뛰었다. 한편, 범민련은 “국가연합제를 연방제로 끌어당겼다”면서 “사실상 연방제안에 대한 동의”라고 환영했다.32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남북한 당국의 통일 방안의 변화를 고려하면 두 해석 모두 과도한 것이다. 왜 그런지 남북 당국의 통일 방안에 대해 간단하게 비교해 보자.
김대중은 3단계 통일방안을 주장해 왔다. 국가연합은 이 방안의 1단계로서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과도기다. 남과 북의 현 국가, 즉 기존 주권과 권한을 그대로 둔 채 남북 협력을 제도화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1민족 2국가 2체제 2독립정부 1연합). 쉽게 말하면 통일은 시기상조이니 각기 외교·군사·내치권을 갖는 두 개의 국가를 연합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평화 교류와 협력이 강조된다. 국가연합 단계에서 북한 경제가 시장경제 체제로 이행하고 정치적으로 복수 정당제가 실시되는 상황에 도달하고, 남한 사회도 사회정의와 국민복지 향상 등에서 발전을 이룩하게 되면 2단계인 연방제로 이행한다. 이 연방제는 북한의 연방제 안(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과는 달리 1민족 1국가 1체제 2지역정부이다. 이 연방 과정을 걸쳐 최종으로 3단계인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로 나아간다는 것이 김대중 3단계 통일방안의 구상이다.
김대중 통일방안의 특징은 첫째, 북한 붕괴에 따른 급속한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동서독 통일을 “흡수통일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가르쳐 주는 교훈으로 보고 있다.”33 그는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이 경제에 끼칠 부담을 걱정한다. 골드만삭스 보고서는 남북한 통일비용이 8백55조 원에서 최대 3천9백40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34 영국 투자 은행 바클레이즈 캐피탈은 남북한 경제 격차가 동서독 통일 당시 5배보다 훨씬 더 큰 20배라며, 남북한이 통일해서 북한의 소득을 남한의 50%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대략 5천6백28억 달러가 들 것이라고 주장했다.35 둘째, 국가연합을 과도기로 설정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김대중은 통일을 10~20년 뒤 혹은 그보다 더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사실상 국가연합 이후 단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지금은 통일 단계가 아니라 화해와 협력, 평화 공존 단계’이며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다. 북한 당국의 연방제 방안은 처음에 국가연합제와 여러 모로 차이가 있는 통일 방안으로 제시됐다. 김일성은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안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해방 후 오늘까지 북과 남에는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제도가 존재하여 왔으며 거기에서는 서로 다른 사상이 지배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면 어느 한쪽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북과 남이 제각기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거나 그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불가피적으로 대결과 충돌을 가져오게 되며 그렇게 되면 도리어 분렬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합니다.36
1980년 이전에 북한 당국이 내놓은 연방제(‘고려연방공화국’)는 통일로 가는 과도적 형태였는 데 비해 1980년에 발표된 연방제는 통일 국가의 최종 모습으로서 제안됐다. 외교권과 국방권을 갖는 연방 국가 안에 사상과 제도가 다른 두 개의 지역 정부가 공존한다는 것이다(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
그런데 이 연방제 방안은 1990년대 들어 내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경제적 어려움,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고 있었다. 1991년에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잠정적으로는 연방공화국의 지역자치 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 이것이 공동선언에 등장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인데, ‘1국가’를 당장 수립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인식 아래 지역 정부가 외교·국방권을 보유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북한 지도자들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통일의 첫단계는 “수십 년 동안이나 유지될 수 있는” 국가연합이 되어야 함을 인정해 왔다고 한다.37
이런 변화에 대해 이장희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은 90년대 이후 명목상으론 하나의 조선 정책을 상징적으로 내세우지만, 실제적으론 두 개의 조선 정책을 인정하는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현실정책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된다. 북한은 체제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공개적으로 하나의 조선 정책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의 고려연방제도 그 이름과는 달리 사실상 국가연합제 모델로 기울고 있다는 얘기다.”38
이렇게 봤을 때 이번 6·15 공동선언의 2항은 그 동안 남북한 당국 통일 방안의 변화를 인정하고 공식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 제시하는 희망이 앞선 해석과는 달리 통일을 조속히 이루자는 합의가 아니라 상당 기간 남북한 국가의 온존을 전제로 교류·협력해 나가자는 얘기일 뿐이다.
민족대단결 사상과 계급 화해 주의
범민련과 한총련 그리고 전국연합은 6·15공동선언(특히 1항과 2항)을 통해 남북이 곧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공동선언을 구미에 맞게 해석 ― 1항은 주한미군 철수로, 2항은 연방제 합의로 ― 하고 ‘절대 선’으로 추앙하고 있다. 전국연합 《민》 지에서 한호석 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조국통일위업을 다음 세대가 맡아야 할 먼 장래의 일로 밀쳐놓고서 우선 남북이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여 두 나라로 평화공존을 하자는 양국론을 주장해 오던 김대중 대통령이 일국론을 지향하는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39 남북 정상회담은 “미국과 남(한국)이 공조한 화해협력 정책과 북(조선)의 자주통일정책이 한 판 맞붙은 정책 대결의 장”이었는데 여기서 “승리를 거둔 쪽은 자주통일정책이었다”40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공동선언 서명 당사자인 김대중이 1항은 반미가 아니라 당사자 원칙이요, 2항은 남북 두 지방정부가 외교·군사권을 각각 갖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고 범민련과 한총련, 그리고 전국연합 등이 ‘공동선언의 본래 뜻을 김대중이 퇴색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며 독립적으로 행동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김대중 정권이 공동선언 지지세력이라며 공동선언 실천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범민련과 한총련과 전국연합은 그 동안 연방제 방안을 일관되게 지지하며 김대중의 국가연합 방안을 “남북의 관계를 두 개 국가간의 관계로 합법화하고 그것을 끝없이 지속시키자는 분단고착화 방안”41이라고 비판해 온 만큼, 남북 정상이 두 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게 당혹스러울 만도 할 텐데 마치 바뀐 게 하나도 없는 양 계속 “연방제로 통일하자”고 외치고 있다. 국가연합이 분단고착화라면 그것과 공통성을 인정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도 분단고착화 아닌가? 국가연합을 반대하고 연방제를 지지하는 것은 공동선언 지지 입장과 모순되는 것 아닌가? 지도부는 북한 당국을 추종해 해명도 없이 입장을 바꾸고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지 몰라도, 학생들을 비롯한 지지자들은 매우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분단고착화 책동이라며 반대해 온 북한이 1991년 5월 급작스레 유엔에 동시가입했을 때도, 북한 당국이 1990년 범민족대회를 탄압한 바로 그 노태우 군사 정권과 며칠 뒤 고위급회담을 시작했을 때도 이런 혼란이 있었다. 당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남북 화해 국면으로서 통일의 주도권이 남북 당국에 넘어갔을 때였다.
어쨌든 지금[당분간]은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이 모든 모순을 압도하고 있는 듯하다. 범민련과 한총련, 그리고 전국연합은 통일을 가장 중요하며 최우선인 과제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하면 다른 문제들, 특히 계급 문제는 부차적인 일로 취급한다. 통일에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먼저 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사회변혁은 그 다음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 구성원 전체가 이를 위해 합심 단결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것이 바로 소위 “민족통일전선전략”이요 “민족대단결 사상”이다.
그런데 지난 50여 년 동안 남과 북은 각각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세계 중류 수준의 공업국이 됐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의 민족 안에 선명한 계급 분단이 생겼다는 것이며 계급 투쟁이 중요하게 됐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15년 동안에 남한의 계급 투쟁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높은 수준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민족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민족 전체가 단결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제국주의의 압력이 모든 계급을 밀착시키는 외적·기계적 압력으로 작용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제국주의는 계급 투쟁을 뚜렷하게 만드는 깊숙이 자리잡은 내적 동인이다.
남한 지배계급은 미국에 반대하기는커녕 미국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고 공유한다. 예컨대 주한미군의 주둔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통제에 의한 것인 동시에 남한 지배계급도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는 문제다. 김대중은 지난 6월 “미군이 없었다면 우리가 오늘날 살아남아 이런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는데, 남한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미국은 매우 고마운 존재였다. 용산 기지 앞과 매향리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할 때 우리 앞을 가로막은 것은 미국 군대가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경찰이었다. 김대중은 미국 제국주의와 맞서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는 미제국주의를 옹호해 반제투사들과 맞서 싸운다. 여야 정치인들, 국가관료들, 대기업주들 모두 그렇다. 그래서 미제국주의에 맞선 민족 전체의 투쟁은 불가능하다.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민족에 맞선 민족의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계급 투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오늘날 노동계급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 어떤 종류의 사회 변화도 노동계급이 동원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나 반제 과제를 성취할 수 있다(민족을 위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포기하고 종속시킴으로써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반공 독재 정권 아래서 통일의 ‘통’자도 꺼내지 못하다가 오늘날처럼 통일운동을 벌일 수 있게 된 것도 노동자 투쟁의 부상과 무관하지 않다. 남한의 통일 운동이 대규모로 부상한 게 1961년과 1988년이었는데 이것은 그 전 해 벌어진 1960년 4월혁명과 19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 덕분이었다.
그런데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입장은, 노동계급의 이익과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억누르고 계급 화해를 이루라고 촉구한다. 범민련, 한총련, 전국연합의 “민족대단결” 사상은 바로 이런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전국연합 기관지 《민》 지의 한호석 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광폭정치로 김대중과 손잡았다며 칭송했다. “김정일 총비서의 통일전선전략은 사상과 이념의 잣대를 치우고 공동의 민족적 과업인 자주통일위업을 위하여 지난 날 서로 반목하고 적대하던 상대라도 과거를 묻지 않고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42 원래 통일전선은 노동계급의 공동행동을 위한 것인데 이와 달리 “민족통일전선 전략”은 코민테른 7차대회의 반파시즘 민중전선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배계급과의 동맹을 추구한다.
한총련은 “민족통일전선전략”에 따라 김대중을 “통일운동을 함께 일구어 나갈 일주체”로 규정했다. 그리고는 “김대중 정권은 공동선언 이후 국가보안법과 한미행정협정 등에서 이전과는 다른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43고 환상을 부추겼다. 이런 환상을 갖고 있으면 김대중에 맞서 일관되게 투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나온 얼마 뒤 김대중은 통일한마당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던 한총련 대의원들을 줄줄이 잡아가 단국대생 네 명을 구속했고, SOFA 개정 촉구 집회를 아예 불허해 버렸다.
김대중은 남북 공동선언을 채택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롯데 호텔 노동자들의 파업 농성장에 ‘솔개’라는 특수진압 경찰을 투입했고, 이틀 뒤 사회보험 노조에도 경찰을 투입했다. 이런 마당에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노동자와 자본가가 따로 있을 수 없고, 청년학생과 정부당국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44고 생각한다면 결코 탄압에 맞서 일관되게 저항할 수 없다. 7월 내내 벌어진 민주노총의 항의 투쟁에서 한총련 학생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민주노총의 항의 투쟁이 한창 고조되고 있던 7월 중순 북한 평양방송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발표했다.
협소한 이해관계와 편견에 사로잡혀 지역적·계급적 이익을 민족적 이익 위에 올려 세우거나 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과 배치시킨다면 언제가도 통일을 이룩할 수 없다.45
이 논평은 민족주의가 언제나 계급보다 민족을 앞세우며, 노동자 투쟁을 민족적 단결을 해칠 우려가 있는 ‘종파적’ 행동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재야 통일운동 세력들은 이 논평을 김대중 정권이 노동자를 탄압할지라도 김대중과 동맹하기를 주저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재야 통일운동 세력들은 노동자를 탄압하는 정부 당국과 함께 ‘통 크게’ 통일대축전 행사를 치를 생각이었다. 범민련 공동사무국은 7월 12일 “남측 8월 통일행사에 6·15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모든 통일애국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특히 정부당국과 민화협,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운동단체들까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서한을 보냈다. 전국연합도 준비 여건이 부족하다면 15일 하루만이라도 민화협 등과 함께 행사를 하자며 공동행사에 열심이었다. 민주노총만이 롯데와 사회보험 파업을 폭력 진압 당한 마당에 정부 주도 단체인 민화협과 함께할 수 없다고 옳게 반대했다.46 8월 15일 민화협 행사가 있는 비슷한 시간에 민주노총은 노동자 대회를 열었다. 한총련 등은 민주노총이 이 날 노동자대회를 잡은 것에 못마땅해 했고, 이와 대조적으로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는 통일대축전이 열리는 한양대에서 노동자 대회 참여를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다. 통일대축전에 모인 한총련 학생 가운데 소수만이 이날 노동자대회에 참여했다. 한총련도 곤혹스러웠는지 깃발은 보냈지만, 유감스럽게도 한총련 학생들 다수는 민화협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갔다. 하지만 한총련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국연합 기관지 편집인 박세길 씨는 우리 나라 노동자 운동이 그 동안 조합주의적이었다며 노동자들이 통일운동으로 “정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떤 정치든 다 좋은 게 아니다. 만약 계급 화해를 촉구하는 민족주의 정치라면 그 “정치 세례”가 조합주의보다 계급 투쟁에 더 해롭다. 민족주의 정치는 계급을 민족에 종속시키고, 이것은 노동자 운동을 지배계급의 일부나 중간계급의 일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통일을 지지해야 하지만 민족을 위해 노동자 운동의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통일에 대한 태도
통일은 남한과 북한의 노동자들이 근본적 사회변혁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일환으로 이룩되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통일은 해결하지 못한 부르주아적 과제이므로 근본적 사회 변혁이 일정에 오르기 전에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다. 이럴 때 근본적 사회 변혁 없는 부르주아적 통일이라 해서 반대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입장이 아닐 것이다. 국민의 다수가 원한다면 비록 그것이 자본주의에 머무르는 통일일지라도 불가피하게 통일(자결) 열망에 타협해 그것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때조차 “민족대단결”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단결이라는 관점에서 통일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통일이 된다 해도 노동자들의 처지는 근본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근본적 사회 변혁은 여전히 이뤄야 하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한 노동자들은 북한 노동자들이 남한 노동자들과 대등한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은 남북한 노동자들이 근본적 사회변혁을 위해 단결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재야 통일운동 세력들이 지지해 온 연방제는 어떤가? 연방제는 남북이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는 통일이다. 남북한 당국은 “연방통일국을 건설한 뒤에도 끝까지 손잡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동행자”가 돼야 한다. 남북한 기성 권력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얘기다.
이 밖에도 여러 통일 방안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리영희 교수의 지적대로 통일 경로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우리는 국민 대중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때에 아래로부터 통일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지지한다. 그리고 당국간 협상을 통한 통일일지라도 대중이 전폭 지지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한 전술적 타협으로서 이 통일도 지지해야 할 것이다. 지난 세기에 분단 국가들은 어떻게 통일을 이루었는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째, 국민의 뜻을 거슬러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정복하려는 무력 통일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런 통일에 반대한다. 예멘의 2차 통일방식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우디 아바리아 남쪽에 위치한 예멘은 오랫동안 남과 북으로 갈려 식민 통치를 받았다. 남예멘은 1966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돼 예멘민주인민공화국이라는 스탈린주의 정권을 수립했고, 북예멘은 1918년 터키로부터 독립해 이맘 왕정으로 있다가 군사쿠데타로 1962년에 예멘 아랍공화국을 수립했다. 남북 예멘은 서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 남북 예멘은 통일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연방 형성을 위해 논의했지만 서로 자기쪽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1972년에 아랍 국가의 중재로 남북 예멘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통일원칙에 합의했다. 이것은 북예멘 우익 세력의 반발로 백지화되고 말았지만 그 후에도 지속적인 협상이 있었다. 결국 1989년 통일헌법안을 승인하고 1990년 5월 통일을 선포했다. 이것이 예멘의 1차 통일이다.
그러나 이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남북 예멘 정부는 1 대 1의 동등한 비중으로 정치통합을 이루었는데도 많은 부작용이 생겼다. 남북 예멘 관료들의 이해관계와 편의에 따라 정책이 혼선을 빚곤 했다. 특히 남북 예멘의 군대는 현지에 계속 주둔하여 기존 명령 계통에 따라 운영됨으로써 통일은 매우 불안한 요소를 안고 있었다. 남북 예멘 지배자들 간의 갈등이 계속되다가 남예멘의 지배자들이 집무를 거부하고 남예멘의 수도로 돌아갔다. 결국 1994년 4월에 내전이 일어났고 이 무력 충돌에서 북예멘이 승리해 재통일했다. 이것이 바로 무력에 의한 예멘의 2차 통일이었다. 이 무력 통일의 과정은 평범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둘째, 정부 주도의 정치 협상을 통한 통일이 있을 수 있다. 지금 남북한 당국도 이런 방식의 통일을 표방하고 있다. 이런 방식에 원칙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다. 지배자들간의 정치 협상을 통한 것일지라도 국민 다수가 원한다면 불가피하게 타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례로는 앞서 살펴본 예멘의 1차 통일이 있다. 그런데 예멘이 1차 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특정 조건 덕분이었다. 1989년 동유럽과 소련 격변의 영향으로 고르바초프가 남예멘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도 없었다. 또, 남북 국경지역에서 발견된 석유도 통일을 자극하는 한 요소였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 뒤에도 권력을 둘러싼 남북 지배자들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한 국가 안에서도 여야 정치인들 간에 싸움이 끊이지 않는데 서로 다른 국가에서 오랫동안 각자 권력을 구축해 온 두 세력들이 오죽했겠는가.
셋째, 대중 자신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 나서는 아래로부터의 통일이다. 이 사례로는 베트남 반제민족해방전쟁을 들 수 있다.
베트남의 통일은 무력 통일이긴 했지만 민중의 뜻을 거슬러서 하는 통일은 아니었다. 남북 베트남 민중 모두 미국을 물리치고 통일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매우 길고 가혹한 제국주의 피지배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58년부터 1941년까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겪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식민 지배 하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호치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수립됐다. 그러나 곧이어 프랑스가 식민지 재건을 시도해 1946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와 베트남민주공화국 간에 9년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항복으로 전쟁이 종결돼 제네바 협정이 맺어짐으로써 북위 17도선 이북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이남은 프랑스가 지배하다가 2년 뒤에 총선를 치르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2년이 되기 전에 철수해 버리고 총선거가 무산되자 미국이 남베트남에 베트남공화국(월남)을 세우고 고 딘 디엠을 대통령에 앉혔다. 디엠 정권의 독재와 폭력과 부패는 세계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1960년에 결성돼 내전상태에 돌입했다. 1964년에 미국의 통킹만 폭격을 선전포고로 미국과 북베트남(월맹)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1975년 월맹군에 의한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은 10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조건이 작용했다. 첫째, 월맹이 자체의 국가 권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베트남 지리가 게릴라 전에 유리했고 인민전쟁을 치렀다는 점이다. 셋째, 서방이 1968년 이래 격변을 겪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군 장교 가운데는 전쟁에서 죽은 수보다 미국 본토의 반전 분위기에 영향받은 병사들에 의해 살해된 수가 더 많았다.
넷째, 아래로부터의 통일과 위로부터의 통일이 결합된 사례다. 독일 통일은 단순히 동서독 지배자들의 정치 협상에 의해 이루어진 흡수 통일로만 규정되곤 한다. 그러나 독일 통일을 민중의 뜻과 무관한 통일로 얘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동독에서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일환으로 거대한 투쟁이 일어났다. 동독의 변화는 민중에 의해 아래로부터 시작됐으나 호네커는 개혁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달을 거듭하면서 시위는 수십만 규모로 확대됐고, 대량 이민 사태도 계속 확산됐다. 대량 이민 사태는 1989년 7월 헝가리로 휴가 왔던 일부 동독인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시작됐다. 8월 초에 1백 명이 체코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고, 9월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통해 1만 5천 명이 탈출했다. 10월에는 동독인 3천 명이 서독으로 가는 열차에 태워 달라며 드레스덴 역을 포위하기도 했다. 1989년 1월부터 10월까지 동독 탈출자와 이주자들의 수는 약 16만 7천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주로 숙련 노동자들이었다. 이런 일들은 동독 주민들이 동독의 개혁과 통일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준다.(이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체제 부적응자”들로 간단히 제쳐버려서는 안 된다. 탈북자에 대해서 잘못된 태도를 취하듯이 말이다.)
10월 초에 호네커가 베를린 장벽을 넘는 사람들에 대한 발포를 명령했는데, 이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1989년 10월경에는 시위대의 요구 가운데 통일이 등장했다. 재야 운동 단체인 신광장의 핵심 요구는 자유 선거와 여행 제한 철폐였다. 10월 23일에서는 라이프찌히에서만 30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런 투쟁의 결과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통일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1989년 11월 9일 집권당 당수는 여행의 자유화를 발표하면서도 “동독이 조만간 장벽을 허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가 그것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서독인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해 서독에 온 동독인들을 박수를 치며 환영해 동독 정권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독 정권도 원래 급속한 통일을 원하지 않았지만 사태는 두 정권의 계획을 앞질러 발전하고 있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통일을 낳았다고들 얘기하지만, 빌리 브란트의 정책은 동서독의 공존이었지 하나의 독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독일 통일은 동서독 대중 자신이 지지하고 나선 아래로부터의 통일이었다. 따라서 그것이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되는 방식의 통일일지라도 그것을 반대할 수는 없었다. 동독은 서독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체제였으므로 흡수통일을 ‘착취 체제의 확산’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동서독 노동자들의 단결을 이루는 계기로 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서독 노동자들은 동독 노동자들이 서독 노동자들 수준의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고, 동독 노동자들은 서독 노동자들이 동독 수준의 복지를 받을 수 있도록 지지해야 했다. 독일 통일 이후 동서독의 생활 수준 격차와 이로 인한 동서독 주민간의 반목은 이런 요구가 왜 중요한가를 보여 준다.
그 동안 많은 좌파들이 민족 통일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왔다. 계급을 민족에 종속시키려는 민족주의에 경도되거나 이와 정반대로 통일을 바라는 민족 감정을 아예 무시해 버리는 식이었다. 이 둘 모두 올바른 입장이 아니다. 민족통일을 지지하되 ‘민족의 영광과 이익’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단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면 복잡다단한 근본적 사회변혁 과정에서 민족문제에 관한 올바른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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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강만길 선생과 함께 생각하는 통일》, 지영사(2000년),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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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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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남북한 사이에 교전까지 일으킨 북방한계선은 애당초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남한 지배자들의 거짓말과는 달리 NLL은 남북이 합의한 국경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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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분단시대의 통일학》, 한울(1998),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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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235쪽. 같은 책 9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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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소련은 중소 분쟁 등으로 불편한 관계였고, 북한은 둘 모두와 가깝게 지내면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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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남북한 경제사회상 비교》, 199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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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오버도퍼, 《두 개의 코리아》, 중앙일보사(1998), 206~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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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천안문 항쟁 폭력 진압으로 중국의 아시안 게임 개최가 위태로워지자 노태우는 아시아 각국 스포츠 인사들을 상대로 중국에 불리한 결정을 내리지 말도록 막후 공작까지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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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앞의 책,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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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오버도퍼, 앞의 책,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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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북한 군사비는 미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미국의 군사비는 북한의 56배이다. 미국이 ‘깡패 국가’로 간주하여 군사 침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5개국(북한, 쿠바, 리비아, 이라크, 수단)의 군사비 합계 80억 달러는 미국 1국의 35분의 1에 못 미친다. 리영희, 《반세기의 신화》, 삼인(1999), 136~137쪽을 참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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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스클라, ‘신세계질서와 미국’, 《탈냉전과 미국의 신세계질서》, 역사비평사(1996),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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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백악관, ‘미국의 국가안보전략: 개입과 확장’, 《국가전략》 제1권 1호, 세종연구소(1995),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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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언 시걸,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사회평론(1999),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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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미국은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12월에 남한 대통령 노태우는 남한에 어떤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1989년 부시 정부가 출범할 당시 남한에는 약 1백 개의 핵탄두가 배치돼 있었고, 1972년경에는 무려 763개의 핵탄두가 배치돼 있었다.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남한의 핵무기 배치를 승인한 이래 30년이 넘게 남한에 핵무기가 존재했지만, 1991년 이전까지 남한 국민들은 남한에 철수해야 할 핵무기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핵무기 철수가 발표된 뒤에도 해마다 핵항모를 비롯한 미군 전력이 동원된 군사 훈련이 한반도에서 실시돼 왔다. 팀 스피리트 훈련은 대표적인 핵전쟁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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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모, 《새로운 세기를 위하여》, 한겨레신문사,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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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 Security Strategy for the East Asia-Pacific Region, 이삼성,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당대, 216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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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모, 앞의 책,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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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앞의 책,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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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오버도퍼,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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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다운스, 《북한의 협상전략》, 한울(1999), 386~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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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0년 7월 6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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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다운스, 앞의 책, 395~3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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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0년 6월 28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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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2000년 6월 29일자호(557호),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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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0년 7월 12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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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0년 7월 3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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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2000년 8월호, 59~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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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1996년 4월호,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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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2000년 8월호,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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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기관지 7월호, 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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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런던대 SOAS 초청 강연회 연설문’, 7쪽. 이종석, 앞의 책 269쪽에서 재인용. 물론 지향점이 시장경제 체제라는 점에서 넓게 보아 그의 통일 방안은 흡수통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통일 방안은 최종으로 단일한 국가, 단일 체제, 단일 정부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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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0년 4월 22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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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0년 7월 15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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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통일원 편, 《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제4집)》, 1988, 59쪽. 이종석, 앞의 책 100~101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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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앞의 책,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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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0년 7월 14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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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000년 7월호,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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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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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기관지 7월호,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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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000년 7월호,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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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련 통일축전 토론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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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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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0년 7월 14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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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