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주년 맞는 광주항쟁 — 군사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주주의 투쟁
〈노동자 연대〉 구독
윤석열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많은 사람들이 45년 전 광주항쟁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광주항쟁에 새롭게 관심이 늘고 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날 밤 9시 42분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국무회의가 열렸다. 중앙청 회의장 주변에는 계엄군 595명이 무장한 채 삼엄하게 도열했다. 노태우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중앙청에 배치했다.
그날 국무회의에서 국방부 장관 주영복은 북한 침공 운운하며 ‘계엄확대 선포’를 제안했다. 국무위원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찬반 토론도 없이 8분 만에 ‘계엄확대’를 의결했다. 마치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을 위한 국무회의가 떠오른다. 1997년 대법원은 그날 열린 국무회의, 국회 봉쇄 등의 행위를 ‘국헌 문란’으로 판결했다.


신군부는 5월 18일 새벽 0시 20분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계엄포고령 제10호’도 발령했다. 그 내용은 정치 활동 중지, 집회 및 시위 금지, 대학 휴교, 언론 보도 사전 검열, 파업 및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이었다. 윤석열의 ‘포고령 1호’의 정치 활동 금지, 언론 검열, 파업과 집회 금지 등과 거의 동일하다.
마치 시계가 45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많은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의사당 안으로 난입하는 것을 온몸으로 막았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우익은 광주항쟁을 왜곡해 왔고, 역사적 평가에 대한 ‘뒤집기’ 시도를 지속해 왔다. 전광훈을 비롯한 극우파들은 여전히 “5.18 광주 사태는 북한 간첩이 선동한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존재를 이용한 비방으로 저항 운동의 가치를 훼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2월 15일 광주에서 열린 극우 집회에서도 “5.18은 김대중 세력·북한이 주도한 내란, 북한군 투입설” 관련 유인물이 배포됐다. 그래서, 맞불 집회를 조직한 황현필 역사바로잡기연구소 소장은 “그 피가 뿌려진 이 금남로에! 비상계엄을 옹호하고 학살을 동조하는 자들이 집회를 한다니!” 하고 분개했다.
이렇듯, 45년 전 광주항쟁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부마항쟁과 12·12
광주항쟁은 사실 부마항쟁에서 시작됐다. 부마항쟁은 ‘유신정권 타도’를 기치로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시작된 민중항쟁이었다. 학생들과 경제위기로 고통받고 있던 노동자, 도시 빈민들이 주로 참가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시위는 이미 마산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부마항쟁의 불길이 서울을 비롯해 전국 5개 도시로 확산될 위험이 있자 박정희 정권은 마산과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3공수여단을 투입해 잔인하게 진압했다.
박정희 정권은 특수부대인 공수부대와 해병대 투입으로 잠깐이나마 민중 저항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지배자들의 분열을 낳았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이 대중 봉기의 성격이 있으며 전국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탄압만으로는 유신체제를 더 존속시키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정희는 한 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계속 밀릴 거라는 위기감에서 강경 노선을 고수하다가 10월 26일 죽음을 맞이했다. 10.26사건 발생 6시간 뒤인 10월 27일 새벽,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미국도 ‘데프콘 3’(3호 방어준비태세)을 발령해 항공모함과 유도미사일 순양함, 전투함 등을 한반도 주변에 집중 배치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최규하가 대통령이 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군부에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 정승화가 유신 완화 정책을 취하자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과 하나회 소속 군장성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박정희 피살 사태에 정승화가 연루됐다는 혐의를 씌워 정승화를 밀어내고 군권을 장악했다. 그날 밤 12.12 군사 쿠데타에는 병력 5,000여 명과 전차 35대가 동원됐다.
1997년 대법원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군사 반란’으로 판결했고, ‘정권 찬탈을 위한 내란의 시작’이라고 규정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은 군사 작전을 방불케 했다. 폐지됐던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의 ‘정보처’를 부활시키고, ‘K-공작계획’을 세워 언론 장악을 꾀했다. 신군부는 수도권 주위에 배치된 ‘충정부대’를 중심으로 강도 높은 폭동 진압 훈련을 실시했다.
서울의 봄과 5.17 비상계엄
1980년 봄이 다가오자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저항이 봇물 터지듯 터져나왔다. 그 밑바탕에는 매우 심각한 경제 위기가 있었다.
1980년 봄에는 노동쟁의 물결도 일었다. 보고된 노동쟁의 건수는 1979년 105건에서 1980년 407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절대다수의 쟁의는 체불임금·임금인상·공장폐쇄·해고 같은 경제적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3월 새 학기에 제적 학생 759명이 복학했고, 해직 교수 19명이 복직했다. 3월 말 서울대 총학생회의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중순까지 전국 주요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세워졌고 유신 정권이 세운 학도호국단은 폐지됐다.
저항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4월 30일 계엄사령부는 전군지휘관회의를 열어, “노동 문제, 학원 소요, 일부 정치인의 정치 집회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것”을 결의했다.

5월 초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고 정권 장악에 나섰다. 5월 9일 당시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을 만나 “미국은 시위 진압을 위한 군대 동원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학생들은 전두환의 집권 음모가 명백해지자, 5월 13일부터 전국적으로 “전두환 퇴진,” “계엄령 해제,” “직선제 개헌” 등의 구호를 내놓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 13일부터 시작된 서울지역 대학생 시위가 사흘째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24개 대학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35개 대학 학생 10만여 명이 모였다.
그날 밤 서울지역 총학생회 대표들은 시위를 계속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결국, 군 투입 가능성이 높아졌으므로 일단 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복귀하자는 안타까운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들은 “시위가 더 확산되면 신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하고 있는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야당 정치인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이미 14일 육군 본부 작전참모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소요 진압 본부를 설치하고 전군에 소요 진압 부대 투입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반면, 광주에서는 5월 16일, 사흘째를 맞은 민주화대성회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3만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했다. 집회를 마치면서 전남대 학생회는 만약 휴교령이 내려지면 그다음 날 오전 10시 전남대 교문 앞에 집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시위 주동자와 배후 세력 색출, 정치인 검거를 지시했다. 그날 밤, 무장한 계엄군이 각지의 보안 시설과 대학을 점령했다. 국회도 봉쇄했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자 37명을 포함해 총 2699명을 예비 검속했는데, 그중 광주의 검거 대상자는 전남대 1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직후 신군부의 최대 관심사는 시위가 지속됐던 광주·전남지역의 반응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이간질 통한 각개격파 전략에 따라 호남 지역은 차별받았고, 그로 인해 산업 발전도 영남에 비해 현저히 뒤처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부가 김대중을 체포한 것은 광주 시민들을 더 분노케 했다.
5.18 광주항쟁
5월 18일, 광주에서 저항이 시작됐다. 대학교 휴교령이 떨어지자 전남대 정문 앞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공수부대원들이 곤봉으로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기며 저항하던 학생들은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로 집결했다. 오후부터 시위대 숫자가 크게 불어났고, 공수부대는 시위 학생들뿐 아니라 구경하던 시민들도 남녀 가리지 않고 군홧발로 차고 짓이기며 진압봉으로 두들겨팼다. 공수부대는 마치 “살인 면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했다.
하루 동안에만 연행자가 대학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 시민 184명 등 모두 405명이었다. 이 가운데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 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였다. 물론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신군부는 부마항쟁을 떠올리며 강경한 조기 진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11공수여단 투입이 추가로 결정됐다. 광주로 향하는 군인들은 “북한 간첩을 소탕하는 것”으로 알았다.
5월 19일 시위대의 중심 세력은 학생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변화했다. 청년·학생뿐 아니라 일용직, 구두닦이, 영세 작업장 노동자, 택시 기사 등 평범한 노동계급 사람들이 다수였다. 시위는 4,000~5,000명에 달하며 시내 전역으로 확산됐다.
공수부대의 진압도 곤봉과 총 개머리판, 대검으로 때리고 휘두르고 찌르는 등 더 공격적이 됐다. 그날 이희성 참모총장은 “광주사태는 공산당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폭도들에 의해 계엄군의 생명이 위협받는 경우가 생기면 당연히 자위권을 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3년 10월 국방부는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북한군 침입설은 광주를 탄압하는 핵심 핑계였다.
광주의 시위는 매일 계엄군에 의한 시민 살육전과 같은 형태로 전개됐다. 전두환이 “3공수여단과 20사단을 함께 내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곧바로 그들이 광주에 투입된다. 부마항쟁 때도 출동한 3공수여단은 공수부대 가운데서도 최정예 부대로 꼽혔었다.
5월 20일, 2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함으로써 전면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당시 광주시 인구는 약 79만 명). 광주 시내 중·고등학교에는 전면적인 임시 휴교 조처가 내려졌다. 3공수부대는 대검뿐 아니라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사용했다.
저녁 7시쯤 금남로에서 벌어진 택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광주의 진상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에 대한 분노로 그날 밤 MBC, KBS 건물이 불탔다. 오로지 외신 기자들에 의해서 광주의 참상을 담은 생생한 영상이 독일은 물론 위성을 통해 유럽과 미국에까지 톱뉴스로 방영됐다.
그날 밤에는 치열했던 광주역 전투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가 발생했다.
5월 21일, 전날 밤 3공수여단의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분노한 시위대는 아침부터 광주 소식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광주 시내를 빠져나갔다.
당시 주미 대사 글라이스틴은 그때 광주 무력 진압 방안을 놓고 워싱턴의 고위 국무부 관리들과 심도 깊게 상의하고 있었다. 미국의 승인 아래 20사단이 이미 21일 새벽 광주에 도착해 있었다.
시위대는 30만 명으로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위대는 “계엄군 철수, 연행자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계엄군은 광주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그러자 그들은 야만의 강도를 높였다.
오후 1시 정각 도청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일제히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들로 금남로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해 버렸다. 그날 54명의 사망자와 500명의 총상자가 발생했다.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지, 누가 발사했는지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뻔뻔스럽게도 전두환은 발포 명령을 은폐하기 위해 ‘자위권 발동’이라는 계엄사령관 경고문을 발표했다. 2016년 말, 전일빌딩 총탄 흔적을 놓고 이루어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 결과는 헬기의 기총소사 흔적임이 밝혀졌다. 헬기에서 사격하는 것은 ‘자위권’이 아닌 의도적인 발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날 집단 발포는 광주 시민 모두에 대한 경고이자, 항쟁을 더욱 강경하게 진압하겠다는 신군부의 결의 표명이었다. 분노한 청년들이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한다”며 무기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무장 항쟁이 시작됐다. 평범한 시민들은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들어가서 군용 트럭과 장갑차 등을 몰고 오며 무장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나주, 담양, 영암 등 다른 전남 지역으로 가서 항쟁 소식을 전했다. 그 지역에서 무기고를 찾아내 총과 탄약을 입수해 광주로 반입했다.
시위대가 총기로 무장하면서 오후 3시경부터 시위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했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교전으로 바뀐 것이다. 무장 시위대는 특공대를 조직했는데 지원자들이 너도나도 참가하겠다며 몰렸다.
그런 상황 때문에 7, 11공수여단은 광주에서 일단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계엄군은 초기 진압 작전 실패 후 전면적인 외곽 봉쇄 작전으로 전환했다. 신군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시위가 서울로 확산되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무장 봉기의 전국적인 확산이 가장 두려웠다. 계엄군은 광주를 완전히 고립시킨 다음, 전남 지방의 무장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해남, 남평, 영광 등 곳곳의 전략적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날 밤 9시 계엄사령부는 20사단 60연대를 추가로 광주에 급파했다.
해방 광주
5월 22일, 항쟁 5일째. 자신을 ‘폭도’라고 몰아붙이던 자들이 쫓겨나면서 시위대는 해방감을 느꼈다. 대중의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자원봉사자와 헌혈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자발적으로 청소하고 밥과 반찬을 지어 날랐다. 우애와 협력이 넘쳐 흘렀다.
항쟁 기간 중 광주 시내 범죄 발생률은 평상시 정부의 통제 아래 있을 때보다 훨씬 낮았다. 평범한 대중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힐끗 보여 주었다. 시민군과 기동순찰대가 조직됐다. 대다수가 식당 종업원, 자개가구 노동자, 공장 노동자, 자취하던 대학생, 재수생 등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광주 인근 지역에서 전날 시위 차량에 탑승해 참가하게 된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정시채 전라남도 부지사가 주도하는 ‘5.18수습대책위원회’(이하 수습대책위)가 구성됐다.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위원회’도 결성됐다.
종교계를 비롯한 도시 중간계급 인사들 중심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는 계엄군과의 협상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무기 회수를 종용했다. 전두환이 24일을 기해 광주 시가전을 각오하고 대작전을 펴겠다며 유혈 진압을 강력하게 경고했는데도 말이다.
미 국방부는 미군의 작전 지휘권 아래 있는 한국군을 시위 군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에 동의했다.
시민군은 무기 회수를 둘러싸고 분열했다. 25일 밤 10시, 최후까지 싸우자는 항쟁 지도부가 새롭게 결성됐다. 그들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오늘 설령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해 사람들의 마음을 전율시켰다.
초강경 진압을 결정한 계엄군은 5월 27일 새벽 4시 도청 앞을 탱크로 완전히 포위했다.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졌다. 계엄군에게 점령당해 막다른 도청 사무실들로까지 몰렸지만 시민군은 사무실 방문을 잠그고 책상과 캐비닛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저항했다. 6시경에는 도청 앞 금남로에 탱크와 장갑차들이 진주했고,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날아다녔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며 도청을 접수하고 진압을 완료했다.
새벽에 도청에서 계엄군에 잡혀간 시민군이 약 200명이었으니, 사망자는 160명에서 400명 사이로 추정된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실제 주인공인 고등학생 문재학도 그날 사망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계엄 당국은 광주에 약 2만 명가량의 진압군을 투입했다. 당시 광주시 인구가 79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시민 40명당 1명의 무장 군인이 투입된 것이다.
27일 아침 도청, YWCA, 전일빌딩, 광주고등학교 등 접전 지역에서 생포된 시민군들은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끌려갔다. 구타와 고문은 물론이고 일명 ‘번개 딱, 돌림 빵’ 기합을 받았다. 그 후로도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있었다. 그리하여 5월 17일부터 7월 말까지 광주항쟁과 관련해 2,699명이 체포됐다.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 사태로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모두 170명이 사망했으며,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 등 380명이 다쳤다”고 공식 발표했다. 광주항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매월 평균 2,300명을 기록하던 광주시의 사망자 통계가 1980년 5월에는 4,900명으로 치솟았던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군부는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하고, 기자를 해직하고, 정기 간행물을 폐간하는 등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결국 전두환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총투표자 2,525명 중 2,524표의 찬성과 1명의 무효표로 제5공화국의 대통령이 됐다. 12월 12일에 시작한 그의 쿠데타는 광주항쟁을 잔인하게 짓밟고 매듭지어졌다.
광주항쟁의 계승
광주항쟁은 잔인하게 진압됐지만 학생과 (그보다 조금 더디게)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 급진적이 됐다. 영화 〈1987〉에서처럼 필자도 1990년대 초반 대학교에 입학해 광주항쟁 비디오를 처음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광주항쟁은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져 권위주의 정치 체제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을 촉진했다. 1987년 5월, 5,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5.18 기념행사가 열렸다. “5.18 진상 규명”은 1987년 투쟁에서도 중요하게 제기됐다.
1995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앞세워 주모들 모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명동성당 농성을 비롯해 전두환과 노태우 구속을 요구하는 투쟁이 벌어졌다. 필자도 그 투쟁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전두환과 노태우가 구속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1997년 대법원은 12.12 쿠데타를 ‘군사 반란’으로,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신군부의 행위를 ‘내란’으로 판결했다. 전두환은 무기징역(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김대중은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97년 12월 22일, “영호남의 해묵은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지름길은 전·노 사면을 통해 5.18 민중항쟁 문제를 깔끔하게 매듭짓는 것밖에 없다”며 그들을 사면했다. 광주항쟁 당시 김대중은 (“북한 측에 오판의 자료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저항을 만류한 바 있다.
광주항쟁은 미국 제국주의의 야만적 본질도 드러냈다. 한국 현대사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81) 시카고대학교 역사학 명예교수는 “광주의 비극은 서울과 워싱턴의 합작품”이라고 폭로했다. 그는 광주항쟁의 여파로 한국에서 반미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했다. 특히, 그는 1988년 한국 국회의 보고서가 “진압군이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비롯한 미국 함대가 한국 해역에 도달할 때까지 3일을 기다렸다가 광주로 진입했다”고 지적한 점을 강조했다.
오늘날 미·중의 제국주의 간 지정학적 갈등 속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미국의 한미일동맹 강화 노선에 동조하며 우클릭하고 있는데, 노동계급에게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이 중요하다.
광주항쟁은 전두환 군사독재의 잔인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한 위대한 민주주의 투쟁이다. 그 투쟁 정신, 영웅적 정신을 오늘에도 꼭 계승해야 한다.
*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항쟁의 저항을 현지 보고로 생생하게 보여 준다. 꼭 읽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