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120주년, 일본 제국의 한반도 점령과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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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120주년이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의미로 굴레 늑(勒) 자를 써서 ‘을사늑약’이라고 불린다. 이때부터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돼 사실상 식민 지배가 시작됐다.
당시 이에 맞선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1908년 일본인들이 추정한 무장 게릴라들의 수는 69,832명이며,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는 거의 1,500회의 충돌이 있었다”고 전한다.
을사조약은 러·일 전쟁 후에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후 체결됐다.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의 제국주의 맹주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메이지 유신과 ‘아시아의 공장’
19세기 후반은 아시아 역사에서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다. 서구 열강과 제국주의 국가들은 포함(砲艦)외교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다. 가장 먼저 일본이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했다. 영국은 인도와 미얀마를 차지했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점령했으며, 미국은 필리핀을 스페인한테서 빼앗았다.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여러 서양 열강들에게 조계지를 허락해야 했다.
1853년 미군 페리 제독이 전함 4척을 이끌고 일본 해안에 도착해 일본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다. 청나라의 아편전쟁 패배를 알고 있던 에도막부는 미국의 통상 압력에 굴복해 미·일화친조약(1854)과 미·일수호통상조약(1858년)의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19세기 일본은 비유럽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체나 후퇴를 모면해 20세기에는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그 출발은 1868년 위로부터의 혁명인 메이지 유신이 바탕이 됐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낡은 봉건제를 타파하고, 국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은 1860년대부터 불과 30년 사이에 아시아 제일의 경제력을 자랑하게 됐다. 《현대 일본의 역사》의 저자인 앤드루 고든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아시아의 공장’이라고 불렸다. 조선과 중국은 일본의 가장 큰 수출시장이었다.
1890년대부터 20년 동안 일본 경제는 공업화를 향해 한 단계 더 도약했다. 공업 생산은 해마다 5퍼센트씩 증가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전 세계 연평균성장률 3.5퍼센트를 크게 웃도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은 노동자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가능했다. 이에 맞서 1897년에 일본 최초의 근대적 노동조합인 철공조합이 결성돼 5,400명의 조합원을 거느렸다.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섬유산업에서는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32차례 파업이 벌어졌다.
당시 공업화의 종잣돈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3억 6,000만 엔의 배상금이었다. 이 배상금은 전쟁 전 일본 연간 국가 예산의 약 4.5배나 되는 돈이었다. 일본은 이 돈 대부분을 군비 증강과 관련된 중공업에 투자했다.
1895년 영국의 찰스 베리즈퍼드 경이 “다양한 단계의 통치를 체험하는데 영국은 800년, 로마는 약 600년이 필요했지만, 일본은 그것을 40년 만에 해치워 버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육군뿐 아니라 해군의 대폭적인 증강에 착수했다. 자본주의 팽창을 위한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음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홋카이도, 류큐 왕국(오늘날 오키나와)을 병합한 일본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타이완과 한반도의 지배권을 거머쥐었다.
청·일 전쟁 후, 공포의 균형
1870년대와 1880년대 일본의 대외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은 한반도였다. 미국이 에도막부에 가한 압력과 똑같은 방식으로, 1876년 일본은 포함외교로 조선에 강화도 조약을 강요했다.
조선은 불평등한 조약에 의해 부산을 비롯한 항구 3곳을 개항하고, 치외법권 지역의 거류지(조계)를 설치했다. 무관세 정책으로 일본의 공산품이 값싸게 들어왔고, 쌀을 비롯한 곡물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일부 지역은 방곡령[쌀 수출 금지]을 시행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 세력인 민씨들의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리면서 조선 민중의 불만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봉건 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면서 중앙 정부를 상대로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농민 봉기가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할 상황에 이르자, 조선 지배층은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갑신정변 이후 맺어진 청·일간의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들어왔다. 그들은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중국보다 더 많은 4,000여 명이 넘는 군대를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청나라와 조선 진출을 본격화한 일본 간의 갈등이 청·일 전쟁(1894년~1895년)으로 충돌했다. 주로 양국 함대의 교전으로 치러진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우세해졌다.
그러자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본에 맞서 다시 봉기했다.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는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패배했다. 일본은 잔인하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서야 청·일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일본은 수비대 1만 명을 조선에 배치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타이완과 펑후제도, 랴오둥 반도의 영유권을 획득하고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보장받았다.
타이완에서도 일본의 식민 점령에 맞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6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이로 인해 4,600명이 전사하거나 병사했다.
랴오둥 반도는 만주 진출을 꿈꾸고 있었던 러시아의 견제에 부딪혔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독일·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혀 추가로 3,000만 냥의 배상금을 받는 대신 랴오둥 반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고 뤼순과 다롄을 조차했다.
청·일 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배제되고,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그러나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개입이 강화되면서, 한반도는 일시적인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이 틈을 이용해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근대화 정책들을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러·일 전쟁, ‘폭풍의 중심’이 된 한반도
1900년 무렵에는 자본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각지에 자본이 끼친 영향은 불균등했다. 크리스 하먼이 언급한 것처럼, “1876년에 아프리카에서 유럽이 지배하는 땅은 10퍼센트도 안 됐다. 그러나 1900년에는 아프리카 땅의 90퍼센트 이상이 유럽 식민지”였다.
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했고, 중국은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의 저자 조너선 D. 스펜스는 당시 일부 중국인들은 이제 곧 조국이 ‘참외처럼 조각조각 잘릴’ 것이라는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부동항을 찾아 태평양을 향해 세력권을 확장하던 러시아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한반도에서 충돌했다. 아시아에서 20세기 최초의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미국 알렌 공사의 표현대로 한반도는 ‘폭풍의 중심’이었다.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제국주의 열강은 공동으로 군대를 파견해 진압했다. 일본은 연합군으로 가세해 최대 규모인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구축한 우월한 지위가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강한 위기의식을 가졌다.
1902년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영국은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 본토의 경제적 이권을 수호하려 했다.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두 제국주의 국가의 대립은 러·일 전쟁(1904년~1905년)으로 비화됐다.
1904년 2월 9일, 일본군은 개전과 동시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를 빌미로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고, 다케시마라고 했다.
러시아의 패권이 확장되는 것을 경계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다. 1905년 태프트-가쓰라 협약에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지지하기로 합의한다. 2차 영·일 동맹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보장하는 대가로 일본과의 동맹이 각각 체결됐다.
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흘러갔지만, 일본은 러시아가 항복할 때까지 전쟁을 끌고 갈 힘이 없었다. 러시아도 국내 혁명으로 전쟁을 더 하기 어려웠다. 1905년 9월 5일 미국 루즈벨트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빼앗겼던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과 창춘 이남의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다. 또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도 차지했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국에서 배타적 특권을 갖게 됐다. 이는 을사조약 체결로 명시화됐다. 이로써 일본은 한반도의 지배권과 만주 진출의 기반을 마련하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열강의 지위를 확립했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면서 식민지 점령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이 곳곳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1906년과 1911년에도 모로코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독일의 긴장이 고조됐다. 자본주의 경제적 경쟁이 영토 확장 경쟁으로 변했으며, 그 결말은 군사력에 좌우됐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은 이렇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을사늑약과 저항
1905년 11월 17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과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회의장을 포위하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 5명을 에워싸며 결정을 강요했다. 결국 이들은 조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치욕적인 을사오적으로 기록됐다.
이 조약에 대해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이라고 칭하지만, 그 강제성으로 볼 때 ‘을사늑약’이라 부를 수 있겠다. 위임·조인·비준 등 조약 체결의 기본적인 절차가 없었고, 외부대신의 인장을 강제 탈취한 이상 조약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1963년에는 유엔 국제법위원조차 “국가대표에게 가한 개인적 강압” 아래 체결됐기 때문에 무효가 되는 국제조약 사례 4개 중 하나로 을사조약을 거론했다.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됐다. 외교권 박탈은 1909년 일본이 청과의 외교권을 사용한 간도협약으로 나타났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내정 전반을 간섭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 의해 저격당했다.
을사조약에 대한 저항은 다양하게 전개됐다. 고종은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이 회의는 열강들의 군사적 경쟁을 외교와 법의 지배로 대체하는 것처럼 포장했다. 제국주의 힘 관계 속에서 열린 이 회의는 고종이 더 이상 한국의 대외관계에서 주권자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약 9,000 명의 군대를 해산했다. 군인들은 의병에 합세해 일본에 저항했다. 당시 의병들은 대부분 비정규군들과 게릴라들이었다. 의병운동은 해산된 군인과 함께 노동자, 상인, 학생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항일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907년 거의 1만 명의 병력이 서울 근처까지 침투했으며, 의병작전의 범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의 뿌리가 깊은 호남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의병 활동이 활발해 약 4,000여 명에 이르렀다.
매켄지는 《조선의 비극》에서 당시 저항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2개월 동안 일본군 보병 2개 여대와 해군함정까지 동원된 대대적인 탄압(남한대토벌 작전)을 자행한 후에야, 비로소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식민지로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 지배에 맞선 무장 투쟁은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해 지속됐다.
고종은 러·일 전쟁 직전, 열강의 세력균형과 그들의 공동보장에 의한 중립화를 열망했다. 청·일 전쟁 이후 러시아가 주도했던 삼국간섭과 같은 외교적 중재를 전망하면서 러시아에 기대하거나, 미국·영국·일본 3국의 공동 보호를 미국에 요청하기도 했다. 열강의 세력균형이 깨지고 러·일 전쟁이 다가오자, 고종은 각국에 ‘전시중립선언’을 타전했다. 그러나 당사국인 러시아와 일본의 외면으로 물거품이 됐다.
제국주의간 경쟁의 동학과 이로 인한 전쟁을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 협상이나 외교를 통한 해결이나 강대국들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몽상적이다. 역사적인 교훈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의존하는 전략이 러·일 전쟁을 통해 실패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첨예해지는 미·중 갈등 속에서 적당하게 ‘줄타기’ 하는 것으로는 민중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