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배고픈 자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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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12월에 이집트 최대의 공장에서 일어난 방직 노동자 2만 7천 명의 파업이었다. 파업은 곧 나일강 삼각지의 다른 방직 공장들로 확산됐다.
이집트에서 수십 년 만에 최대의 파업 물결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주로 20∼30대의 신세대 노동자들이 파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제 이 운동은 어용 노조에 도전하고 민주주의 억압, 부패, 탄압에 맞서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
개별 작업장의 파업은 종종 짧다. 노동자들은 공장 점거와 단식 투쟁을 하고 증오의 대상인 진압경찰과의 충돌 끝에 신속한 승리를 얻는다.
그러나 한 곳에서 파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곳에서 파업이 또 시작된다.
바야흐로 이집트에 '뜨거운 겨울'이 왔다. 어느 파업 지도자의 말을 빌리면 "배고픈 자들의 혁명"이 도래했다.
이번 파업 물결은 독재자 무바라크가 추진중인 신경제정책의 핵심을 강타하고 있다.
중동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인 무바라크는 1990년대 초부터 국가 폭력으로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해 왔다.
물가 인상, 임금 삭감, 사회복지 삭감 등을 수반한 무바라크 정부의 정책은 이집트를 경제 강국으로 만들기는커녕 이미 고단한 민중의 생활고를 더욱 가중시켰다.
이집트 통화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고, 사유화 정책으로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무바라크는 이러한 실패에도 아랑곳 않고 12월 26일, 34개 헌법 조항 수정을 발표했다. 그의 뜻대로 된다면 1950∼60년대에 이집트 노동자들이 얻은 성과들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판이다.
무바라크는 "1960년대에 이집트에 도입된 사회주의 원칙들을 제거하는 것뿐 아니라 외국 투자자들에게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헌법 수정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경제정책과 함께 제한적인 민주 개혁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개혁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혜택'과 마찬가지로 허상임이 드러났다. 무바라크는 제한적인 변화를 허용하면서도 더 많은 권력을 수중에 집중시켰다.
투사들
무바라크의 발표 후 이집트의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시험해보려 했다. 이 전쟁에서 최초의 전투는 이미 카이로 북부의 마할라 엘 쿠브라 시에서 치러졌다.
12월 초에 가즐 엘 마할라 공장의 방직 노동자들은 1년에 한 번 받게 돼 있는 두 달치 공공부문 임금 성과급 ― 월 22파운드[약 4만 원]라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그나마 벌충해 온 ― 의 지급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충격받은 노동자들은 사측과 어용 노동조합의 공장위원회에 문의했지만 이제부터 성과급은 정부가 고용한 직원들에게만 지급될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자 아침 근무조에 속한 일단의 젊은 투사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다음 근무조들도 공장에 도착하는 족족 투표를 통해 파업 참가를 결정했다. 2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대가 시 중심부를 장악했고, 짧은 충돌 끝에 진압경찰을 쫓아냈다.
그 후 닷새 동안 이어진 대중 집회와 투쟁적 발언으로 마할 엘 쿠브라 시는 독재 치하의 공포를 잊은 듯했다. 파업 소식이 카이로에 도달했을 무렵 공장주들은 한 발 물러서, 45일치 성과급을 제안했다. 노동자들은 타협을 수용하고 일터로 돌아갔다.
가즐 엘 마할 공장의 승리 소식은 차차 나일 삼각지의 공장들로 퍼져나갔다.
1월 30일 화요일, 카프르 엘 다와르 공장의 1만 1천7백 명의 방직 노동자들이 비슷한 요구를 내놓고 파업에 들어갔다. 일요일이 되자 파업은 점거로 발전했다.
카프르 엘 다와르는 수 세대에 걸쳐 이집트 노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1940∼50년대 혁명을 주도했던 공장이 바로 카프르 엘 다와르였다.
이집트의 지배 엘리트는 이 공장의 상징성을 두려워한다. 1984년과 1994년에는 전국의 진압경찰이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이 도시에 총집결하다시피 해 노동자와 그 가족 들에게 발포했다.
따라서 이번 파업은 정부의 배짱과 신생 운동의 결의를 모두 시험대에 올릴 터였다.
그 주 일요일 밤, 사측 보안 책임자가 노동자들과 협상을 시도했다가 거부당했다. 다음날 아침, 진압경찰이 공장으로 들어가는 문 세 곳을 봉쇄함으로써 안에 있는 8천 명의 노동자들을 가뒀다.
밖에서는 주로 여성인 2천 명의 노동자들이 진압경찰과 충돌하면서 공장 내로 음식을 반입하려 했다. 이렇게 시작된 충돌이 거대 시위로 발전했다.
요구 사항
곧이어 파업은 시내의 다른 두 공장으로 확산됐다. 인근에 있는 인조비단 공장의 경영진은 즉각 양보한 반면 엘 베다 공장의 사용자는 21일치 성과급을 제안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제안을 받아들여 업무에 복귀했지만 나머지는 파업을 계속했다.
카프르 엘 다와르 공장의 시위가 커지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제프타 공장에서 비슷한 파업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뛸 듯이 기뻐하는 노동자들이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행진하며 제프타의 승리를 경축했다.
이 지역의 노동자 투쟁 조율 위원회는 성명서에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노동자들은 방송을 통해 사측과 [어용]노조위원회의 사망을 선고했고 45일치 성과급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제프타의 동료들이 승리한 소식을 듣고 그들은 '죽을 때까지 파업하자. 돈 받을 때까지 파업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동료들의 승리를 축하했다."
제프타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지급될 성과급이 21일치뿐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파업에 들어갔다. 사측은 사내 경비 요원들에게 기계를 돌리게 했지만 노동자들이 "시위를 확대하겠다"고 위협하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장들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프타 노동자들은 일터로 돌아오면서 사측에 이렇게 통보했다. 제프타 공장에서 체결된 협약을 주말까지 탄타 시의 자매공장에도 적용하지 않으면 공장을 다시 점거하겠다고.
가즐 셰벤 엘 콤의 노동자들은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이 일하는 공장의 사유화 계약에 도전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인도인 경영진이 공장을 인수하기로 예정된 당일에 4천 명의 방직 노동자 가운데 3천 명이 공장을 점거했다.
사유화 전에 그들은 생산 목표 달성의 대가로 1백40일치 성과급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새 경영진은 구 경영진의 약속을 자신들이 이행할 의무가 없다며, 대신에 45일치 성과급을 "대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격분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한 채, 설비를 검사하러 온 새 기술자들을 못 들어오게 막았다. 1백 명의 노동자들이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2월 15일에 이르러 가즐 셰벤 엘 콤과 카프르 엘 다와르의 파업은 승리했다.
파업에 관한 소문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도 싸움에 가세했다. 카이로의 양계장 노동자들도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 조류독감 위험에 상응하는 위험수당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사측이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자, 카이로 외곽의 엘 사프에 위치한 농장과 사료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 다음 날에는 트럭 기사들이 톨게이트를 봉쇄했다. 정부가 통행료를 네 배 올린 것에 대한 항의였다. 톨게이트로 시위 진압 경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채석장 노동자들이 기사들 편에 합류했다. 오후가 되자 통행료 인상이 철회됐다.
이처럼 트럭 기사들이 행동에 나선 것은 전국을 거의 마비시킨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과 토라의 시멘트 노동자 파업, 그리고 카이로의 한 병원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민간부문 노동자들에게로 전염되는 식으로, 한 부문의 파업 승리는 다른 부문의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파업은 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고 있다. 제한적인 경제적 요구 사항들이 정치적 요구로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