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우석균 동지를 그리며
〈노동자 연대〉 구독
우석균 동지가 6월 7일 우리 곁을 떠났다.
2016년 열린 맑시즘 포럼에서 그는 ‘세월호 세대’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20대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문제지만 40대에도 사회주의자면 그것도 문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요즘에는 40대가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토록 많은 재난을 봤고 하나도 나아지지 않은 것도 봤을 테니 말입니다.”
그해 말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거대한 운동이 일어났다.
청년 시절 마르크스 사상을 접한 뒤 40년 동안 사회운동에 참여한 우석균 동지는 다른 자리에서도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사상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고 밝히곤 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다소 어렵거나 낡은 것으로 여겨지기 쉬운 마르크스의 사상을 오늘의 현실에 녹여 대중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 있었다. 특히 그의 주 활동 무대였던 보건의료 영역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 애썼다.
우석균 동지의 가장 큰 기여 하나는 의학 지식을 사회운동의 무기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는 광우병, 메르스, 코로나19, 후쿠시마 핵 오염수 등 전문 지식이 필요한 쟁점에서 정부와 기업의 주장을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반박했다.
동시에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부주의나 특정 민족, 집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대신 공공의료 부족, 병원 영리화, 노동 현장의 위험, 국제적 불평등, 자본주의적 농축산업과 생태 파괴까지 연결해 설명했다.
이렇게 우석균 동지가 운동을 조직하며 각종 매체에 쓴 칼럼과 여러 강연회·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을 선별해 묶은 저작선 《이윤보다 생명을: 실천하는 의사 우석균 저작선》(책갈피)이 지난해에 출판됐다.
우석균 동지는 전업 활동가처럼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환자 진료에 바친 의사였다. 이 사실을 빼놓고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는 24년 동안 “갈 곳 없고 돈 안 되는” 환자들을 품어 준 성수의원(서울 성동구) 원장이었다. 열악한 작업 환경에 놓인 내외국인 노동자와 장애인 가족, 노인과 성소수자 등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에게 성수의원은 따뜻한 피난처였다.
그 과정에서 얻은 현장 경험은 그의 사상을 더욱 단단하고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연설과 글 곳곳에 배어 있는 확신은 이러한 경험에서 다져진 결과물이다.
때로는 현대 의학을 급진적으로 비판했으나, 현대 의학의 근본인 과학적 원리와 이론을 경시하는 태도에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어린 시절 다소 유복한 편이었던 우석균 동지는 자신이 얻은 재능으로 사회에 최대한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간혹 의사이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두는 후배들이 눈에 띌 때면, 그는 사상뿐 아니라 실천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가 2000년 1월 한 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받던 무렵, 전날 응급실에서 환자를 처치하느라 힘들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인턴은 환자를 ‘처치’하지.”
사기가 떨어진 일부 활동가가 세간의 소문에 흔들릴 때도, 꿋꿋이 중심을 잡고 활동하는 그의 모습은 많은 후배에게 귀감이 됐다. 그는 주변 활동가들의 건강을 챙기는 일에도 늘 진심이었다.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데는 소홀해 지인들의 걱정을 자아냈지만 말이다.
투병 중에도 우석균 동지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참여해 집회 연설을 하고, 난민 처우 개선을 위한 활동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고(故) 우석균을 알고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위해 활동해 온 이들에게 그의 빈자리는 크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음악과 예술, 술과 담배를 즐기던 그의 유쾌한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그의 매력이 10년만 더 이 세상에 머물렀더라도, 사회운동과 그 속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의 삶은 그만큼 더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우석균 동지의 평온한 영면을 빈다.
2026년 6월 7일
장호종(노동자연대를 대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