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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 vs. 개혁주의

다음은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이 1983년에 발표한 소책자 Gramsci versus Reformism을 번역한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40년 전인 1937년 4월 27일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무솔리니 정권 교도소의 가혹한 조건 탓이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그는 사후에 더한 불운을 겪었다. 그의 혁명적 원칙과 어떠한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1916년부터 죽을 때까지 직업 혁명가였다. 그 시기 동안 그는 자본주의 국가의 전복을 통한 혁명적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일관되게 고수했다.

그런 대의를 위해 그람시는 여러 사회주의 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사회당(PSI)이 자본주의와 1916~1918년의 전쟁에 맞서 혁명적 행동을 벌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선두에 있었고, 1919~1920년의 토리노 공장위원회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의를 위해 그람시는 1921년 개혁주의적인 사회당에서 분리해 나와 진정으로 혁명적인 공산당을 창당하고, 1924〜1926년 동안 그 당을 이끈 것이다. 그 대의에 복무하다 그람시는 마침내 무솔리니의 감옥에 투옥되고, 거기서 남긴 노트에서 이탈리아 사회, 국가 권력을 향한 투쟁의 전략·전술, 혁명적 당의 건설, 혁명적 신문에 관한 고유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옥중수고》다.

그람시는 그 노트가 혁명적 목표를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저작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학술적이고 비혁명적인 탐구 분야로 만드려는 사람들에게 이용돼 왔다.

이것은 이탈리아 공산당(PCI)이 그람시 사상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면서 가능해졌다.

왜곡의 첫 번째 시기

왜곡의 첫 번째 시기는 그람시 사망 직후에 시작됐다. PCI 내의 스탈린주의 지도자였던 팔미로 톨리아티는 몇 주 만에 《옥중수고》를 입수했다. 그리고 이것을 10년 동안 출간하지 않고 방치해 뒀다.

1947년 《옥중수고》가 공개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여러 군데 생략되고 검열된 형태로 공개됐다. 살바토레 세키는 그람시가 옥중에서 보낸 서한들이 거친 검열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당시 톨리아티가 ‘파시스트’라고 일컬은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보르디가, 트로츠키, 심지어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언급을 삭제함.
  2. 그람시가 1931년에 공산당의 정치 노선과 결별했음을 은폐함.
  3. 그람시의 사생활을 이상화된 결혼에 기반한 것으로 묘사함. 이는 공산당이 핵가족의 결속에 헌신한다는 것을 구체적 사례로 보여 주는 데서 유용한 신화였는데, 이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공산당이 추구한 가톨릭과의 제휴를 위한 수단이었다.
  4. 트로츠키가 1929년 러시아에서 추방된 이후 그람시가 트로츠키의 견해를 접할 수 있는 책들을 얻으려고 거듭 시도했다는 사실을 은폐함. 1

이러한 왜곡의 목적은 그람시를 최상의 충성스러운 스탈린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어느 중요한 사회 사상가에게도 영감을 준 바가 사실상 없는 이데올로기에 매우 유용한 무기로 그람시를 이용하는 것이다. 즉, 다른 이탈리아 지식인들에게 PCI가 풍부한 이론적 유산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소련 지도부와 그 추종자들의 지적 빈곤을 은폐하고, 1945년 이후 기민당[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보수 정당]과 연립 정부를 운영해 온 PCI가 1921년 사회당 내 개혁주의 극좌파인 ‘최대강령파’와도 결별했던 시절과 똑같은 당임을 보여 주며 좌파를 공격하는 무기로 그람시를 이용한 것이다.

그람시 사상을 검열하고 왜곡하는 일은 그람시가 스탈린주의 신화에 부합하지 않았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람시가 투옥 전에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소련에서 스탈린이 좌익반대파를 상대로 자행한 관료적 조처에 관해 톨리아티에게 항의를 표하는 내용이었다. 톨리아티는 그 편지를 찢어 버렸다. 2

1931년 그람시의 형이 교도소에 있는 그람시를 접견하러 갔을 때, 그람시는 톨리아티가 수행하고 있는 스탈린주의의 초좌익적 ‘제3기’ 정책에 반대한다고 말했다.(톨리아티는 그 노선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중앙위원 세 명을 축출하고, 에르콜리라는 필명으로 트로츠키의 비판에 맞서 그 노선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람시의 형은 그람시의 입장을 톨리아티에게 전달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랬다가는 파시스트 교도소에 있는 동생을 당이 더는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그람시는 다른 공산당원 수감자들과 토론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부가 톨리아티의 노선을 앵무새처럼 외면서 그람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당시 공산당은 개혁주의자들을 “사회파시스트”로 규정하고 그들과의 어떠한 협력도 배제했다.)

그람시가 죽기 전 동지들에게 한 마지막 정치적 진술 하나는 모스크바 재판에서 제시된 지노비예프 유죄 증거들에 불신을 표하는 것이었다. 물론 톨리아티는 모스크바에서 그 재판에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3

그람시가 죽은 후 톨리아티는 자신을 그람시의 오랜 정치적 동반자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19〜1920년과 다시 1925〜1926년에 긴밀하게 함께 활동했지만, 그 외의 시기에는 혁명적 전략·전술 문제를 둘러싸고 갈라설 때가 많았다. 특히, 그람시가 투옥된 1926년 이후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유러코뮤니즘의 왜곡

그러나 검열되지 않은 그람시의 서한과 노트들을 출판해 이전의 왜곡이 드러나는 것을 허용한 것은 결국 톨리아티였다. 이것은 다른 나이 든 공산당원들이 그람시의 진짜 사상에 관해 실토하면서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그람시가 현재와 멀리 떨어진 덜 위험해진 인물이 된 탓도 있다. 그러나 그람시의 서한과 노트를 공개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람시 사상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의 시기를 열기 위해서였다. PCI는 서구 공산당들이 모스크바로부터 절연하고, 훗날 ‘유러코뮤니즘’으로 불리는 노선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1960년대 초부터 PCI는 소련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PCI 지도자들은 1947년 그들을 쫓아낸 이탈리아 부르주아 정부에 다시 들어가기를 꿈꿨다. 그 목표를 성취하려고 그들은 자신들이 더는 소련 지도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당들에게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1930년대에 스탈린의 주요 협력자였던 톨리아티는 1956년 이후 스탈린의 주요 비판자가 됐다.

노선 전환은 세계 곳곳의 스탈린 옹호자들, PCI 내 충성스런 스탈린주의자들과의 첨예한 논쟁을 낳았다. 이는 두 전선에 걸친 싸움이었다. 하나는 소련에 있는 스탈린의 상속자들로부터 PCI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PCI의 정부 참여가 국가 기구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검열됐던 그람시의 스탈린 비판이 첫 번째 전선의 무기가 됐다. 또한 국가에 대한 그람시 사상의 왜곡은 둘째 전선에 유용했다.

한때 이탈리아 스탈린주의의 수호 성자로 삼았던 그람시를 재빨리 유러코뮤니즘의 수호 성자로 만든 것이다. 그람시의 사상은 PCI의 ‘역사적 타협’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됐다. 영국에서는 영국 공산당 내 우파 지식인들이 그람시를 차용했다. 그는 심지어 ‘소득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인용됐다! 4

유러코뮤니즘은 곧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러코뮤니즘이 조장한 그람시 해석은 계속 지속돼 왔다. 《마르크시즘 투데이》와 같은 저널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학술서들에 의해, 5 그리고 갈수록 노동당 좌파 지식인들의 공통된 흐름의 일부로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6

그러나 그람시만큼 개혁주의로부터 거리가 먼 기백을 가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는 드물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이 ‘봉기주의’, ‘노동자주의’, ‘자생성주의’, ‘일반조합원주의’라고 혹평하는 관념들에 기반한 것이었다.

‘봉기주의’

사회주의 운동 참여 초기부터 그람시는 의회주의자들을 지독하게 경멸했다. 1918년 5월에 그는 의회주의자들을 “블라망제[젤라틴 따위에 우유나 향료를 섞어 만든 푸딩—역자]에 날아들고 들러붙어서 더럽게 말라 죽는 파리떼”에 비유했다. 오늘날의 이탈리아에도 해당할 만한 지적으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계급 협력이 낳는 정치적 타락은 부르주아 정당의 발작적 확장에서 비롯하는데, 그 부르주아 정당이 국가를 장악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국가에 적대적인 정당[사회당—하먼]까지 이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7

1919년 그람시가 공장위원회 건설을 강조한 것은 비의회적인 새로운 기구들을 통해서만 노동계급이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주도력이 만들어 낸 역사적 현실을 그저 받아들여 왔다. 그들은 민주주의 국가 기구들의 영속성과 근본성을 의심치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민주주의 제도의 형태들은 교정되거나 이리저리 손볼 여지가 있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존중돼야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의 조직들에 내재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 사회주의 국가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이어야 한다. 8

개혁주의에 대한 그람시의 적개심은 이후 더욱 커졌다. 그 적개심은 투라티를 위시한 사회민주주의 우파뿐 아니라 세라티가 이끄는 사회민주주의 극좌파(이른바 ‘최대강령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오늘날 좌파 개혁주의자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이 개혁주의자들은 먼저 1920년 4월 대파업 때 뒤로 멀찌감치 꽁무니를 빼서, 토리노 노동자들이 고립되고 사용자들에게 패배하도록 했다. 그리고 1920년 10월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어난 공장 점거를 낳은 거대한 투쟁성의 고양에 혁명적 지도를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배신들 때문에 그람시는 1921년 사회당에서 분리해 나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는 데 동참한 것이다.

많은 주류 그람시 해석자들은 개혁주의 내 좌우 모두에 대한 그람시의 적개심을, 그가 이후에 극복했다는 ‘정치적 미성숙’의 징후로 든다. 9 그러나 그 적개심은 수감 전 공산당을 지도하기 위한 그의 마지막 주요한 노력, 즉 1926년 PCI 리옹 대회에 제출한 테제에 뚜렷이 남아 있다.

〈리옹 테제〉 10 는 그람시의 출간 저작 중 가장 성숙한 저작이다. 그 문서는 그때까지 PCI에서 우세했던 초좌파적인 보르디가 일파를 주로 겨냥했다. 핵심 쟁점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 특정 쟁점들을 둘러싸고 공동전선을 제안함으로써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그람시의 강조였다. 동시에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강조했다.

사회민주주의는 노동계급 내에서 사회적 기반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지만,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기능 면에서 노동계급 운동의 우파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좌파로 간주돼야 하고, 그런 만큼 대중의 눈앞에서 그 실체가 드러나야 한다. 11

이는 레닌이 개혁주의 정당들을 “부르주아적 노동자 정당”으로 규정한 것과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리옹 테제〉가 그람시가 남긴 가장 뛰어난 분석들의 하나임에도 가장 나중에 널리 출판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개혁주의에 대한 그람시의 적개심은 무장 봉기의 필요성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조응하는 것이다. 그는 〈리옹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 결정적 시기(1919〜1920년)에 혁명적 노동계급이 패배한 것은 노동자 정당의 정치적·조직적·전술적·전략적 결함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계급은 자신을 주민 대다수의 봉기의 선두에 위치시키지 못했고, 노동자 국가를 창출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행동을 마비시키는 다른 사회계급들의 영향에 종속됐다.(강조는 인용자의 것) 12

따라서 “부르주아 국가에 맞선 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한 투쟁이라는 문제를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의 동맹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는 공산당이 필요한 것이다. 13

물론 파시스트 교도관의 감시 아래서 쓴 《옥중수고》는 무장 봉기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이뤄진 한 대담에서 그람시는 봉기를 고집하는 ‘미성숙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권력을 무력으로 정복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노동계급은 군사적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 조직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모든 부문에 구석구석 이식돼, 투쟁의 결정적 시기에 거기에 균열을 내고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어야 한다. 14

‘노동자주의’

그람시에게 권력을 향한 투쟁의 핵심은 노동계급이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나 마오주의에서 유래한 신비화되고 이상화된 노동자가 아니라, 토리노의 공장들에서 분투하는 살아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람시는 1919년에 이렇게 썼다. “자본의 집중은 그에 상응하는 노동 대중의 집중을 낳는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혁명적 테제들이 기본 전제로 하는 사실이다.” 15

노동계급의 중심적 역할에 기초해 그람시는 1919년〜1920년 토리노 공장위원회 운동에 관여했다. 노동계급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리옹 테제〉에서도 나타난다.

당 조직은 생산의 기초, 즉 일터(세포)를 기반으로 건설돼야 한다. 이 원칙은 ‘볼셰비키적’ 당을 건설하는 데 꼭 필요하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 생산 과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뭉치는 노동계급의 대중 운동을 당이 이끌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조직 기반을 생산의 장소에 둠으로써 당은 자신이 기반을 둔 계급이 선택하는 행동을 수행한다. 당은 자신이 계급 정당이자 단일 계급, 즉 노동계급의 정당임을 드러낸다.

당 조직의 기반을 생산에 둬야 한다는 원칙에 반대하는 주장은 모두 노동계급과 동떨어진 계급들과 관련된 이해로부터 도출되며 … 프티부르주아 지식인의 반(反)노동계급적 정신의 표현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상의 소금이라 믿으면서 노동자들을 의식적이고 지적인 혁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물질적 도구로 여긴다. 16

당은 지식인과 농민을 포괄해야 한다. 그러나,

당을 이질적 요소들의 ‘종합’으로 만들려는 구상 일체를 반혁명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맹렬히 맞서 싸워야 한다. 당은 이러한 구상에 타협을 일절 허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노동계급의 일부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이라는 각인을 그 당에 남겨야 하고, 노동계급이 그 당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17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혁명에서 결정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노동계급이기 때문이다.

공장 운동(1919〜1920년)의 실천은 생산 현장과 생산 체계에 단단히 뿌리 내린 조직만이 노동자 대중의 상층과 하층(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 단순 노동 종사자들) 사이의 연결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18

그람시는 토지 없는 농업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혁명의 편으로 획득하는 것의 결정적 중요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또, 중간계급 일부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노동계급에게 크게 이로울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그람시에게 그것은 노동계급에 주도권을 부여하는 것이었지, 사회주의적 목표를 감추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혁명가들은 더 민주적인 제헌의회 요구와 같은 사회주의에 훨씬 못 미치는 슬로건을 가지고 비(非)혁명가들과 함께 싸울 태세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혁명의 가능성은 없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성취할 수 있는 계급은 노동계급밖에 없다. 19

이런 관점에서 그람시는 보르디가의 초좌익주의와 결별한 후에도 타스카가 이끄는 공산당 내 우파 조류(이들의 정치는 오늘날의 좌파 유로코뮤니즘에 가까울 것이다)에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비관주의’이자 ‘일탈’이라고 강조한다.

… 노동계급이 지배 체제를 금방 전복할 수 없기 때문에 최선의 전술은 헌정 질서 내의 방식으로 파시즘을 축출하기 위한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의 실제 동맹을 구축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당면 정치 투쟁에서 혁명적 전위가 수동적 태도를 취하고 공산당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을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표 부대로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령은 공산당이 파시즘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모든 반대 세력들 내에서 ‘좌파’가 돼야 한다는 공식으로 표현된다. 20

그람시는 공산당이 부르주아 야당이 채택한 것과 같은 민주주의적 슬로건의 일부를 제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정당들이 실제 행동이라는 시험대를 통해 대중 앞에서 가면이 벗겨지고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도록” 21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람시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이탈리아 공산당과 영국 공산당 내의 자칭 그람시 숭배자들이 그에게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모든 ‘반독점’ 세력의 ‘민주대연합’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비난하듯이 말이다.

‘자생성주의’

그람시 사상에서 단연 가장 발전된 분야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에 관한 부분이다.

그람시의 출발점은 노동계급이 투쟁을 위해 군대처럼 기계적으로 훈련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규율은 그들의 의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은 실제 투쟁 경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

이 주제에 관한 그람시의 사상은 제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첫 1년 사이에 이탈리아 좌파에서 나타난 세 주요 조류에 맞선 논쟁 속에서 발전했다.

세라티가 이끄는 가장 큰 조류는 사회당을 계급 의식의 구현체로 보았다. 세라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사회당의 독재”일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계급의식은 질서정연하게 천천히 당을 건설하는 과업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류는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한 초좌파적 혁명가들의 것인데 이들은 세라티의 당이 결코 권력 장악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그들도 의식을 당(고도로 훈련되고 규율 있는 간부들로 이뤄진 소규모 정예 그룹으로서의 공산당)을 통해 구현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는 당이 계급을 위해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야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봤다. 22 세 번째 조류는 타스카가 주도한 공산당 내 우파로, 이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과 ‘좌파’ 노조 지도자들과의 협약을 강조했다. 세 조류는 서로 달랐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계급의식을 마치 참새에게 던지는 빵부스러기처럼 당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내려 주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람시는 자생적으로 발전하는 노동자 투쟁과 조직이 갖는 성격과 주동성이 그들 의식의 성장을 결정한다고 봤다. 레닌·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그람시도 소비에트를 적절한 시기에 당에 의해 세워지는 추상물이 아니라 일터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투쟁의 기구로서 탄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일견 사소한 쟁점들을 둘러싸고 탄생할 수도 있다. 1920년의 준(準)봉기적 공장 점거는 전국 수준의 금속 산업 임금 협상이 깨지면서 점화됐다. 23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의 숙련도나 노동조합 조직 또는 심지어 노동조합 가입 여부를 불문하고 그들을 통일시키는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생산 과정에서 그들과 연관을 맺고 있는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시키는 조직, 노동자들의 단결, 세력, 생산 통제 능력에 대한 자각의 증대를 표현할 수 있는 조직에서 발전해 나와야 한다. 24

토리노의 공장위원회들은 허공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영국의 직장대표위원회와 여러 모로 비슷하게 기능하는 공장 ‘내부위원회’에서 출발했다. 그람시와 그의 동지들이 토리노에서 발행한 신문 〈신질서〉에서 그람시는 자신과 그의 동지들의 역할을 이러한 자생적 발전을 고무하고, 내부위원회들을 일반화하고, 이들의 기반을 넓히고, 이들이 경영진으로부터 더욱 많은 권력을 획득하도록 북돋고, 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으로 봤다. 그람시가 썼듯이,

내부위원회의 발전은 〈신질서〉의 사상을 이루는 중심 문제, 그 사상 자체가 됐다. 그것은 노동자 혁명의 근본 문제로 여겨졌고, 프롤레타리아의 ‘자유’ 문제였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지지자들에게 〈신질서〉는 ‘공장위원회의 언론’이 됐다. 노동자들은 〈신질서〉를 사랑했다. 왜 그랬을까? 그 기사들에서 자신의 일부, 최상의 일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기사들이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가?” 등 그들이 경험한 내면의 갈구와 똑같은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기사들이 차가운 지적 구성물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노동자들과의 토론에서 솟아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사들은 토리노 노동계급의 실제 정서와 목표, 열정을 구체화했으며, 우리는 이로부터 고무되고 검증됐다. 〈신질서〉가 사랑받은 것은 그 기사들이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내적 해방과 자기표현 과정의 계기가 된 실제 사건들을 ‘받아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신질서〉를 사랑했던 이유이며 〈신질서〉의 사상이 ‘형성된’ 과정이다. 25

1920년에 위 글을 쓰고 있을 때 그람시는 여전히 사회당 당원이었다. 같은 해 얼마 후 점거가 패배한 뒤 그람시는 좌파 개혁주의와 단절하고 동질적인 혁명적 당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공장위원회에 관한 그의 저술들에는 혁명적 당이 어떻게 그 안에서 활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명시적 논의가 없다.

그러나 그 저술들은 공산주의 조직과 의식의 맹아적 요소들이 자생적으로 나타날 때 혁명가 개인들과 혁명적 신문이 어떻게 그 요소들을 일반화하고, 결합시키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각하게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1923년 그람시는 보르디가의 교조주의 아래서 자신이 3년 동안 자신의 견해를 덮어 둔 것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며 동일한 문제로 돌아간다.

우리는 당을 혁명적 대중의 자생적 운동과 중앙의 조직적·지도적 의지가 수렴하는 변증법적 과정의 산물로 이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당을 그저 허공에서 홀로 자체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대중의 조건이 유리해지고 혁명의 물결이 최고조에 이를 때 대중이 도달할 무언가로 이해했다. 26

혁명적 당의 건설은 추상적 선전으로 노동자들에게 사상을 주입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경제 위기의 효과로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행동할 때까지 기다림으로써 이뤄지는 것 또한 아니다. 혁명적 당의 건설은 모든 자생적이고 부분적인 투쟁들과 관계를 맺고 거기서 일반화를 시도하면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더 추상적인 용어로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룬다. 당의 임무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이 암묵적으로 품고 있는 ‘이론’의 요소들을 추출해서, 그 ‘이론’을 노동자들의 머릿속의 다른 모든 후진적인 기존 ‘이론들’과 대립시키는 일이라고 그람시는 썼다.

우리는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이론을 구성할 수 있으며, 그 이론을 실천 자체의 결정적 요소와 만나게 하고 일치시킴으로써 실천의 모든 요소들을 더 일관성 있고 더 동질적·효율적으로 만들어 실천의 잠재력을 최대로 발전시키고, 그럼으로써 진행 중인 역사적 과정을 가속시킬 수 있다. 27

이는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을 국회의원들과 노조 관료의 적당한 연합에 투표하도록 노동자들을 교육시키는 점진적이고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과정으로 보는 유러코뮤니즘이나 영국 노동당 좌파 일부의 개혁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다.

‘일반조합원주의’

그람시는 미리 정해 놓은 협소한 틀에 계급투쟁의 발전을 가두고, “인위적으로 미리 도출해 놓은 결론으로 계급 투쟁의 명백한 진로를 차단”하려 하는 개혁주의 정치인들에게 경멸을 보냈다. 28 그람시는 1919년에 이러한 차단의 원천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사회당의 의회 정치인들과 노조 관료에서 찾았다. 그람시는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 노조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조명하며 이러한 현상의 기원을 분석한다. 그 기원은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내에서 개혁을 얻어 내기 위해 작동하며 그에 따라 간부들과 구조가 형성된다는 사실에 있다.

노동조합은

자본이 지배하는 역사 시기에 고유한 모든 노동계급 조직 유형이다. … 그 시기에 개인들은 얼마나 상품을 소유하고 자산을 거래하는지에 따라 평가되며,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유일한 재산, 즉 그들의 노동력을 통해서만 거래자가 된다. … 이들은 산 노동을 집중시키기 위한 이러한 거대한 기구들을 만들어서, 가격과 시간을 책정하고 시장을 규율한다. 노조는 본질적으로 경쟁적이지, 공산주의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 노조는 사회를 급진적으로 개편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29

따라서 노조 간부와 언론인들의 진정한 계층이 생겨나고, 그들의 집단 심리는 노동자들의 집단 심리와 완전히 어긋나게 된다. 30

이러한 분석과 토리노 공장위원회의 경험을 통해 그람시는 노조 관료를 계급투쟁의 능동적 파괴자로 보게 됐다. “노조 관료는 노사관계의 합법성을 불변하는 조건으로 여긴다. 너무도 자주 노조 관료는 소유주와 똑같은 시각을 옹호한다.” 31 1920년의 배반 이후 그람시는 노조 지도부의 반혁명적 역할을 완전히 깨닫게 된다.

토리노와 피에몬테의 총파업은 노조 조직들의 사보타주와 반대에 부딪혔다. … 이는 노동조합 기구의 관료적 메커니즘 일체와의 전투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선명히 보여 줬다. 그 메커니즘은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 주도력을 모두 질식시키려는 의회 정치인들과 개혁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행동을 보호하는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벽 구실을 한다. 32

〈리옹 테제〉에서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노동조합총연맹(CGL)을 지도하는 집단을 이러한 시각에서 살펴봐야 한다. 즉 그들을 노동자에 대한 여타 계급들의 해체적 영향을 매개하는 집단으로 봐야 한다. 33

《옥중수고》에서도 그람시는 이러한 ‘미성숙’하고 ‘노동자주의적’이고 ‘일반조합원주의적’인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1930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른바 ‘자생적’ 운동들을 방치하고, 더 나쁘게는 멸시하는 것, 즉 의식적 지도를 제공하지 않고, 그 운동들을 정치에 연루시킴으로써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않는 것은 흔히 매우 심각한 후과를 낳을 수 있다.

그람시는 1922년 무솔리니의 쿠데타를 가능케 한 1920년의 패배는, 세라티·보르디가·타스카 등의 지도자들이 노동자·농민의 자생적 운동들에 그러한 지도를 제공하지 못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하위 계급[노동계급—하먼]의 ‘자생적’ 운동은 그 운동과 관련있는 이유들로 인해 지배계급 우익의 반동적 운동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경제 위기는 한편으로는 하위 계급들의 불만과 자생적 운동들을 자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동 집단의 음모도 부추긴다. 그들은 정부의 객관적 약화를 이용해 쿠데타를 기도하려 한다. 쿠데타의 가장 중요한 원인 하나는 책임 있는 집단들[사회당—하먼]이 자생적 반란들에 의식적 지도를 제공하지 못하고 그 반란들을 능동적인 정치 요인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34 (강조는 인용자)

물론 그람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자주의자’, ‘자생성주의자’, ‘일반조합원주의자’가 결코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람시는 계급투쟁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개입을 통해 할 수 있는 역할을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1919〜1920년과 1924〜1926년의 활동은 (비록 아무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개입의 빛나는 사례였다.

핵심 주장

그람시 사상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왜곡은 다음과 같은 논증에 기초한다.

개혁주의자들에 따르면, 그람시는 서구 사회가 제정 러시아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줬다고 한다. 서구 지배계급의 권력은 군사·경찰 기구를 통한 물리적 통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침투하는 자발적 제도들(‘시민사회’)—정당, 노동조합, 교회, 매스미디어 등—을 통해 행사되는 이데올로기적 지배에 주로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억압적 국가기구는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방어 수단들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가들의 핵심적 투쟁은 국가 권력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람시가 ‘헤게모니’라고 부른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위한 투쟁이라고 개혁주의자들은 주장한다. 헤게모니는 노동계급의 끝없는 인내와 희생이 요구되는 장구한 과정을 통해 획득된다고 한다. 특히, 노동계급은 지식인과 그들이 대변하는 계급들의 주요 부분들을 설복함으로써만 ‘대항헤게모니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기구들을 운영하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노동계급은 자신의 단기적 경제적 이익을 희생할 태세가 돼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업을 이루고 ‘헤게모니적’ 계급이 되기 전까지는 국가 권력 장악 시도가 언제나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35

이러한 주장은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두 가지 형태의 전쟁을 구분했다는 얘기로 정당화된다.

  1. 기동전: 서로 싸우는 군대들이 상대방과 상대방의 도시를 공략하기 위해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전쟁.
  2. 진지전: 1914〜1918년의 참호전처럼 양 군대가 전쟁 중에 교착돼 어느 쪽도 좀처럼 전진하지 못하는 지구전.

산업적·사회적으로 더 발전한 나라에서는 기동전을 전략적 기능이 아닌 전술적 기능으로 축소해서 사고해야 한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말한다. … 적어도 가장 발전한 나라들에서는 똑같은 고려가 정치의 기술과 과학에 적용돼야 한다. 그런 나라들에서는 ‘시민사회’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고, 그 구조가 즉각적인 경제적 요소들의 파국적 ‘침입’(위기, 불황 등)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36

기동전, 즉 국가에 대한 정면 공격이 적용된 최후의 성공 사례는 1917년 10월 혁명이었다.

일리치[레닌—하먼]는 1917년 동구에서 성공적으로 적용된 기동전에서, 서구에서 가능한 유일한 형태인 진지전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이해한 듯하다. 37

이러한 전략 전환의 근거는 제정 러시아와 서구의 사회 구조 차이에 있다.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이었고 시민사회가 원시적이고 무정형적이었다. 반면 서구에서는 … 국가가 동요할 때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는 외호였을 뿐, 그 뒤에는 요새와 보루의 강력한 체제가 버티고 있었다. 38

연속혁명 공식은,

대규모 대중 정당과 대규모 경제적 노동조합이 아직 없던 시기, 말하자면 사회가 여러 측면에서 아직 유동적인 상태였던 역사적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 1870년 이후의 시기에는 … 국가의 국내적·국제적 조직적 관계들이 더한층 복합적이고 거대해지며, ‘연속혁명’이라는 1848년적 공식[1848년 혁명 이후 마르크스가 채택한 슬로건—하먼]은 정치학에서 ‘시민적 헤게모니’라는 공식에 의해 확장되고 극복된다. 39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람시의 공식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개혁주의적 결론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먼저 분명히 해야겠다.

첫째, 진지전은 전쟁이다. 이는 PCI가 오늘날 추구하는 것과 같은 계급 협력이 아니다. 계급 협력을 설교하는 개혁주의자들에 대한 그람시의 경멸은 옥중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파시즘에 직면해 개혁주의자들이 보인 수동성을, “비버의 고환으로 약재를 만드려는 사냥꾼에게 쫓기다 목숨을 구하려고 스스로 고환을 뜯어 내 버리는 비버”에 비유했다. 40 (오늘날의 일부 ‘좌파’ 노조 지도자들이 주목할 만한 말이다!)

둘째, 혁명적 정치가 많은 시간을 ‘진지전’에 할애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다지 놀라운 얘기가 아니다. 사실 레닌과 트로츠키는 1921년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서 러시아 볼셰비키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계급의 다수를 공산주의 편으로 설득할 목적으로 개혁주의 정당들과의 공동전선을 주장했다. 그들은 당시, 특히 독일 공산당에서 매우 유행하던 초좌파적 ‘공세 이론’—공산당이 계급 다수의 지지 없이 봉기라는 모험을 거듭해서 권력 장악으로 간단히 돌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에 반대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람시는 코민테른이 공동전선 전술로 전환하는 데서 트로츠키가 한 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41 또한 그는 명시적으로 ‘진지전’을 ‘공동전선 공식’과 동일시한다. 42

〈리옹 테제〉에서 그람시는 공동전선 전술을 이탈리아에 적용하려 했다. 이러한 전술(이전까지는 보르디가를 따라 반대했던)을 채택했다고 해서 개혁주의에 대한 그람시의 적개심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공동전선 전술은 대중적 기반이 있고 노동계급적이고 혁명적임을 자처하는 정당들과 단체들의 실체를 들춰내기 위한 정치 활동”이라고 썼다. 43 이 전술은, “노동계급을 혁명적이도록 준비시키는 데서 장애물이기 때문에 공산당이 투쟁 대상으로 여기는 중간적 조직들”을 상대로 채택된 것이었다. 44

셋째, 헤게모니를 위한 싸움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아니다. 노동자의 경제적 조건 악화가 자동으로 혁명적 의식을 낳을 것이라는 견해를 그람시가 계속 거부한 것은 사실이다.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이를 강조한 것은 세계적 위기가 곧 세계 혁명을 낳을 것이라는 당시 스탈린주의의 ‘제3기’ 테제를 반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기계론적 일탈을 교정하려고 막대를 구부렸다.

그러나 그람시는 정치 생활에서 경제가 하는 결정적 역할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면한 경제 위기가 자동으로 근본적인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낼 가능성은 고려할 필요도 없지만,” “그러한 위기는 이후 국민 생활의 변화 전반에 관한 특정 사고 방식과, 그런 문제들을 제기하고 해결하는 특정 방식이 확산되는 데 유리한 지형을 만들 수 있다”고 썼다. 45 그는 경제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대규모 이데올로기적 요인들은 항상 대규모 경제 현상에 뒤처진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경제적 요인에 의한 자동적 추진력이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에 의해 완화되고, 차단되고, 심지어 일시적으로 분쇄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경제에 뒤처지기 때문에 혁명적 당이 노동자들을 개혁주의자들로부터 떼어내어 견인하려면 반드시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 대중의 전통적 지도부의 정책과 충돌할지도 모르는, 대중의 경제적 처지에서 비롯하는 당면 요구가 이해되도록 하기 위한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투쟁이 있어야 한다. 전통적 정책들이라는 무거운 하중으로부터 경제적 추진력을 해방시키려면 적절한 정치적 주도력이 언제나 필요하다. 46

《옥중수고》의 한 주요 구절에서 그람시는 1919〜1920년의 토리노 공장위원회 운동 경험을 돌아본다. 그곳에서 일어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자생적 노동자 투쟁의 수렴을 협소하고 부문적이며 ‘사회적 합의주의적인’ 경제투쟁과 대비시키고, 노동자들 외부로부터 정치를 설교하는 순전히 지적이고 ‘주의주의적인’ 방식과도 대비시키려는 취지였다.

토리노의 운동은 ‘자생성주의적’이라는 비난과 ‘주의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 이러한 모순적 비난을 분석해 보면, 그것은 그 운동에 주어진 지도가 추상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뿐이다. 그 지도는 과학적 또는 이론적 공식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것도 아니었고 정치, 즉 실제 행동을 이론적 논의와 혼동하지도 않았다. 그 지도는 현실의 인간들에게 적용됐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돼 특정한 정서, 관점, 단편적 세계관 등을 갖고 있는 현실의 인간들 말이다. 그들의 정서와 관점, 세계관은 주어진 물질적 생산 조건과, 그 안의 이질적 사회 요소들의 ‘우연적’이고 ‘자생적인’ 결합의 결과였다. 이러한 ‘자생성’의 요소는 무시되지 않았고 하물며 경시되지도 않았고, 그 요소에 대한 교육과 지도, 외생적 제약의 제거가 이뤄졌다. 목표는 그 요소를 현대 이론[마르크스주의 — 하먼]에 부합하게 하고, 그것을 살아 있고 역사적으로 실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지도자들 자신이 운동의 ‘자생성’을 얘기했으며, 그것은 옳은 일이었다. 이러한 선언은 자극제이자 강장제였으며 심오한 통일의 요소였다. 무엇보다도 그 운동이 작위적인 모험이 아님을 보이고 그 운동의 역사적 필연성을 부각시켰다. 이는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이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가치들의 창조자, 국가의 창건자가 된다는 ‘이론적’ 의식을 지니게 해 주었다. ‘자생성’과 ‘의식적 지도’, 즉 ‘자생성’과 ‘규율’의 통일이야말로 하위 계급들의 진정한 정치 행동이다. 47

넷째, 다른 피억압 계급들(또는 노동계급의 더 후진적 부문)을 설복하기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이 자기 이익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주의’ 방식과 ‘헤게모니적’ 방식을 대비시키면서 48 그람시는 개혁주의적 노조 운동가들처럼 그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투쟁을 모든 천대받는 집단의 해방의 열쇠로 전망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려 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이탈리아에서 헤게모니적 방식은 지주·성직자에 의해 수탈당하는 남부 농민들의 빈곤을 묵인함으로써 북부 노동자들에 대한 양보를 얻어 낸다는 오랜 개혁주의자들의 전략과 단절하는 것을 뜻했다. 49 당시 노동계급은 그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싸우는 것은 물론, 농민에게는 땅을 제공할 전망을, 지식인들에게는 더 가치 있는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야 했다.

노동계급의 의식을 위한 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농민을 설복하는 데서도 열쇠는 실제적 요구들을 정치 문제들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람시는 19세기에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극단적 급진파들(행동당)이—이들을 통해 그람시는 20세기의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을 암시한다—남부의 반동 세력과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분쇄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 즉 농민들 사이에서 대토지를 분할하는 투쟁을 일으키지 않은 것을 거듭 비판한다. 행동당은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을 순전히 지적인 투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에 따라 교권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50

노동계급은 다른 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정한 경제적-사회적 합의주의류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과 타협이 본질을 건드릴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헤게모니는 윤리적·정치적이지만 또한 경제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경제 활동의 결정적 핵심부에서 지도 집단[노동계급—하먼]이 하는 결정적 기능에 바탕을 둬야 한다.” 51

그람시가 〈리옹 테제〉의 입장을 《옥중수고》에서 버렸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리옹 테제〉에 따르면, 노동자는 농민을 설복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이는 오직 공장 노동자들의 경제적 위치에 기초한 노동자 위원회를 설립하고 그 위원회들을 통해 농민위원회의 형성을 자극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흥미롭게도 그람시는 ‘지배 블록’을 언급하고, 노동계급이 농민을 설복할 필요성도 언급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노농블록’이라는 스탈린주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는 중간계급 지식인들을 노동계급과 동등한 수준의 동맹자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지식인들은 투쟁 과정에서만 노동계급의 지도를 따르도록 견인될 수 있었다. 52

다섯째이자 마지막으로,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 그 자체로 국가 권력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결코 시사하지 않는다. “진지전”이 우세한 시기에조차 그람시는 “운동의 ‘부분적’ 요소”, 즉 “전략적 기능보다는 전술적 기능”을 하는 “기동전”에 관해 얘기한다. 53

다시 말해, 대부분의 시기에 혁명가들은 개혁주의자들로부터 지도권을 획득하려고 부분적 투쟁에서 공동전선 전술을 구사하며 이데올로기 투쟁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정면 공격으로 적군 참호를 돌파하려고 하는 폭력적 충돌의 순간도 때때로 있다. 그람시가 옥중 대담에서 명백히 밝혔듯이, 그람시는 여전히 무장 봉기를 “투쟁의 결정적 마디”로 여겼다.

‘진지전’에 대한 《옥중수고》의 강조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정치적 요점을 강조하려고 고안한 은유다. 즉 위기의 시기에 겨우 혁명가 몇 천 명의 의지만으로 봉기가 성공할 전제 조건이 마련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전제 조건들은 정치적 개입과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오랜 과정으로 준비돼야 한다. 1930년대 초반의 톨리아티나 다른 ‘제3기’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정반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정신 나간 생각이다. 그람시는 무장 봉기의 필요성을 논증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사실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가망 없는 무장 봉기를 조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레닌이 1917년 6월에 강조했듯이, 또는 1921년 독일의 경우에 다시 그러했듯이, 봉기가 노동계급 다수의 능동적 지지가 수반돼야만 성공할 수 있음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은유를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보편 타당성을 갖는 것처럼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순전히 군사적 측면에서도 정태적인 ‘진지전’이 언제나 적절한 것은 아니다. 1940년에 독일 탱크들이 마지노선을 돌파하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프랑스 장군들이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람시 공식의 불명료함

그람시의 ‘진지전’, ‘기동전’ 구분처럼 오해를 낳기 쉬운 모든 은유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한 흥미로운 글에서 페리 앤더슨은 그람시의 은유가 많은 불명료함과 모순, 개념적 ‘미끄러짐’을 포함하고 있어서 개혁주의자들이 그람시 저작의 혁명적 본질을 왜곡할 수 있게 한다고 지적한다. 54

확실히 그람시의 ‘기동전’과 ‘진지전’의 대조는 다소 모호하다. 어떤 곳에서는 정치적 ‘진지전’으로의 전환이 1871년 이후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1920년대 초반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사후 안정화에서 비롯한다고도 말한다. 시점을 둘러싼 이러한 혼동은 중요한 문제인데, ‘진지전’이 상시적 전략인지 아니면 특정 시기에만 적용되는 것인지를 모호한 채로 남겨 두기 때문이다. 그람시의 어떤 공식들은 전자를 시사한다. 그러나 그람시가 혁명적 당과 계급의 ‘자생적 투쟁’ 사이의 상호 작용을 거듭 강조하고 무장 봉기가 필요하다고 봤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해석을 배제해야 한다.

두 번째 혼동은 러시아와 서구의 대조에 있다. 이러한 대조는 러시아 혁명 운동에 대한 오해를 포함한다. 사실, 최초의 ‘기동전’ 시도들—1820년대에 12월당이 차르 지배 체제를 상대로 감행한 무력 공격과 1881년 차르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 나로드니키(민중주의자들)—은 실패했다. 이후 혁명가 세대들은 다른 전략을 채택해야 했다. 전제정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지구전인 ‘진지전’이 필요했다. 10년간의 마르크스주의 토론 서클 시기, 그리고 1905년에 대중 정당이 등장하기 전 10년 동안의 ‘경제주의적’ 선동의 시기, 1905년 이후에는 12년간의 세력 회복기가 있었다. 1905년과 1917년의 ‘기동전’을 위한 기반을 닦는 데서 이러한 ‘진지전’은 필수적이었다.

그람시의 은유를 확장하자면 군사적 진지전은 상대편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가 발명되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위험한 것이 된다. 제1차세계대전 끝무렵과 제2차세계대전 초기에 탱크가 그런 무기였는데(다만 제1차세계대전의 경우에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정치에서 탱크의 등가물은 1917년 2월 레닌조차 놀라게 한 대중의 갑작스럽고 자생적이고 혁명적인 “아래로부터의 추진력”(그람시의 용어)이다. 혁명가들이 그 투쟁의 파고를 지도하고 영향을 미치려고 방어 태세에서 새 ‘기동전’을 위한 태세로 재빨리 전환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돌연한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 레닌의 위대함은 ‘진지전’에서 ‘기동전’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기를 포착하는 능력에 있었다.

레닌이(트로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해했듯이 혁명 운동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는 헤게모니를 위한 지구전, 즉 세력의 조직화와 견고화를 위한 오랜 투쟁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험도 있다. 투쟁의 특정 단계에서 거둔 조직상의 성공이 대중 정서가 변화하는 시기에 보수주의를 낳는 것이다.

사실, 제1차세계대전 개전 전 유럽에서 ‘진지전’을 벌이는 정당의 전형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이었다.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 사회 안에 거대한 ‘보루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수많은 신문, 수십만 명의 당원, 지역 협동조합과 클럽, 여성 운동, 강력한 노동조합 기구, 기성 체제 내의 지식인들 일부마저 경탄케 했던 이론지 등.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이러한 ‘진지들’을 고수하려는 시도는 사회민주당을 반정부 운동이 아니라 계급 협력으로 이끌었다.(흥미롭게도 1912년 카우츠키는 SPD의 개혁주의 지도부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에 맞서 ‘진지전’과 ‘기동전’이라는 그람시의 용어와 매우 유사한 은유를 사용했다.) 55

러시아, 이탈리아, 서구

그람시는 이탈리아를 ‘진지전’이 필요한 사회의 초기 형태로 봤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이탈리아는 전형적인 선진 자본주의 사회와 거리가 멀었다. 그람시가 ‘시민사회’의 특징으로 여겼던 것들—교회, 도시의 정치·문화 결사체들, 다양한 부르주아 및 프티부르주아 정당들, 교사·변호사·신부 등의 ‘기능적 지식인들’의 영향력 등—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농민과 룸펜프롤레타리아, 프티부르주아지가 수적 우위에 있었던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탈리아의 후진성을 나타내는 일시적 역사적 현상으로 보인다. 실제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시에 기반을 둔 정치·문화 결사체들도 중요성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에서 두드러진 것은 ‘정치적 무관심’이었다. 이는 다른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영국 노동당이나 노동자교육협회(WEA) 같은 정치·문화 결사체에 대한 대중의 참여가 줄고, 리버풀과 글래스고 오렌지 로지(개신교 수련원)의 정치적 영향력도 줄었다. 열성적 교회 회중의 규모도 10년 동안 반토막 났다. ‘기능적 지식인들’—변호사, 교사, 신부, 의사 등—은 더는 지역 여론 형성에서 주요한 구실을 하지 않는다.

선진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집중시키고 대중을 원자화시키며—일터의 노동조합 조직은 중요한 예외다—구래의 정치·문화 결사체들을 약화시킨다.

한편으로는 노동 과정 변화에 따른 노동 강도 강화가 일정한 구실을 했다. 예컨대 교대제는 지방의 정치·문화 결사체들의 조직을 어렵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생활의 상업화,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출현, 매스미디어에 대한 통제 집중 등이 다른 ‘여가’ 활동의 매력을 약화시켰다. 개인과 국가 사이의 실질적인 ‘시민사회’ 구조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갈수록 매스컴이 직접적 매개 구실을 한다. 그와 동시에, 일터 기반의 노조 조직은 원자화에 의해 전복되지 않은 ‘시민사회’ 제도의 하나로서 그 중요성이 극적으로 증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배계급이 위기 시기에 이용할 수 있는 ‘참호망’은 노동자들이 일단 실제 행동에 돌입하면 매우 취약한 것이 된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을 저지하기 위해 결정적으로는 노조 관료, 이보다는 좀 덜한 정도로 개혁주의 정치 조직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를 침식하고 그들도 통제할 수 없는 자생적 분출을 낳는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이 혁명적 의식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국가와 직접 충돌하는 진정한 ‘기동전’이 발전할 수 있다.

토니 클리프가 1968년에 발표한 중요한 글에서 지적했듯이 선진 자본주의는 ‘사사화(私事化)’와 ‘정치적 무관심’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무관심이라는 개념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개별적 개혁의 길이 막히면 무관심은 그 대립물, 즉 직접적 대중 행동으로 바뀔 수 있다. 전통적 조직에 대한 충성을 상실한 노동자들은 스스로 극단적이고 폭발적인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된다.” 56

그람시의 은유들은 45년 전에 구체적인 전략 문제를 다루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토론을 차단하려고 이러한 은유들을 조야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사회가 중요한 측면에서 변화했음을 간과한다. 이는 마르크스와 레닌, 트로츠키의 사상을 끌어다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교조주의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그람시의 약점

그람시가 살고 저술했던 조건은 그의 사상에 특정한 내재적 한계를 부과했다. 《옥중수고》의 경우 그 제약들은 그의 사상에 가해진 왜곡의 기반이 됐다.

첫째이자 가장 뚜렷한 제약은 그람시의 어깨 너머에서 그가 쓴 모든 구절을 감시한 파시스트 국가였다. 교도소의 검열을 피하려고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날카로운 개념들을 모호하게 언급해야 했다. 그는 교도관뿐 아니라 종종 마르크스주의 독자들,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까지라고 생각될 정도로 자신의 진짜 생각을 감추는 불명료한 이솝 우화식 언어를 사용했다.

중요하게는, 그람시는 봉건제에 맞선 부르주아지의 권력 투쟁을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자들의 권력 투쟁의 은유로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위험하리만치 오해를 낳기 쉽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출발점인 상품 생산, 즉 시장을 위한 재화 생산은 봉건 사회 내에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봉건제 내에서 키운 경제적 지배력을 이용해 이데올로기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을 집단적으로 지배함으로써만 경제적으로 지배적일 수 있고, 그러려면 국가 권력을 무력으로 장악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노동계급은 자본가들이 정치적으로 지배적이기 오래 전부터 경제력을 통해 구입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윤전기나 대학 등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다. 그람시는 불가피하게 이 점을 불명료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명료함은 오늘날, 실제로는 자신의 학계 경력을 쌓을 뿐이면서 ‘이론적 실천’이나 ‘지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으로 계급 투쟁을 수행하는 척하는 지식인 지망자들의 핑계거리가 되고 있다.

더욱이 그람시는 무장 봉기를 대놓고 언급할 수 없었다. 《옥중수고》의 이러한 공백 덕분에 그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자들은 그람시를 옥죄었던 국가 권력의 냉혹한 현실을 외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비물리적 한계들도 있다. 그람시는 스탈린이 소련에서 막 전권(全權)을 강화하고 있을 때 투옥됐다. 그 과정을 잘 알지 못한 것은 그의 사상에 겉보기보다 훨씬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람시는 1925년에 결성된 스탈린-부하린 블록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그는 농민에 대한 양보를 통해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국제적 ‘진지전’의 일부로 수용한 듯하다. 그래서 그는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반대를 공동전선에 대한 초좌익적 거부로 여겼다. 트로츠키가 공동전선 전술의 주창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람시는 스탈린주의의 숨막히는 관료주의를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부하린-스탈린식 ‘일국사회주의’(1925〜1928년)를 수용함에 따라 그는 소련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분석할 수 없었다. 그는 《옥중수고》에 이렇게 썼다. “진지전은 무수한 인민 대중에게 막대한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전례 없는 헤게모니의 집중이 필요하고, 그래서 반정부 세력들에 공세를 취할 ‘개입주의적’ 정부가 필요하다.” 57

그러나 전체주의화 경향에 대한 이러한 준(準)옹호론에 이어 그람시는 마르크스를 인용하며 경고를 덧붙인다. “포위된 진지에서 지나치게 장기화되는 저항은 그 자체로 사기를 저하시킨다. 그러한 저항은 곧 고통과 피로, 휴식의 상실, 질병, 상시적 압박을 수반한다. 이는 저항을 단련시켜 주는 첨예한 위험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고 마는 만성적 위험이다.”

그람시는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올바른 전략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 듯하다. 이러한 모순은 그의 이론의 다른 측면들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1919〜1920년에 그는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일터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노동자 국가의 요소들을 창출하는 것의 상호 관계를 이해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노동자 민주주의의 발전과 그 추진제인 혁명적 당의 변증법적 상호 작용을 간파했다. 이러한 이해는 《옥중수고》의 많은 부분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을 다른 곳에서 모방할 ‘진지전’의 방법으로 여기는 경향에 의해 이따금 약화되기도 한다.

스탈린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람시만이 아니었다. 그가 수감돼 국제 운동과 접촉을 상실할 당시 스탈린주의의 본격적 공포는 아직 미래의 일이었다. 안드레아스 닌에서 제임스 P. 캐넌에 이르는 미래의 저명한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당시에는 트로츠키에 맞서 스탈린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그람시의 경우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해 결여는 그의 이론에 혼동의 요소를 남겼고, 이것이 오늘날 개혁주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람시에게는 좀 더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 그람시는 경제와 정치의 관계에 관해 추상적으로는 정확하게 설명했지만, 다른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구체적인 경제 분석을 자신의 정치 저술들에 통합시키지 않았다. 이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의 저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자의성을 낳는다. 예컨대 1925년에 그람시는 파시즘이 곧 몰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옥중수고》에서는 파시즘이 오래 지속될 것처럼 썼다. 또한 그는 노동계급이 ‘사회적 합의주의’ 식으로 체제에 통합될 위험에 관해 썼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조건을 다루지는 않았다.

대체로 보아 그람시는 특정 경제 상황과 그것에 영향받는 개인들의 정치·이데올로기 투쟁의 실제 상호관계를 보여 주지 못했다. 1918〜1926년에 그는 계급투쟁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최상의 저술들은 노동자들과 섞여서 그들을 지도하려 하는 가운데 당시 벌어지던 투쟁의 핵심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쓴 것들이다.

그러나 1926년에 파시스트 국가는 그람시를 대중과의 접촉으로부터 차단했다. 그람시는 그것이 뜻하는 바를 너무도 잘 알았다.

책과 잡지들은 일반화된 관념들을 담고 있고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진행 과정을 최선을 다해 스케치할 뿐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톰과 딕, 해리의 삶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살아 있는 인식을 갖게 하지는 않습니다. 실재하는 개인들을 이해할 수 없다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들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58

이는 경제 상황과 이에 대한 개인들의 정치적 반응의 구체적 상호관계를 체험하지 못하고 따라서 포착할 수 없었던 그람시에게 해당하는 얘기였다. 그러나 망명지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저술할 수 있었던 마르크스나, 튀르키예에 갇혀 있으면서 베를린의 매일의 사태 전개를 심층적으로 다룰 수 있었던 트로츠키는 그렇지 않았다.

《옥중수고》는 무엇보다도 이처럼 추상적 개념에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야말로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과 거리를 두는 개혁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원하는 관료나 학자들에게 매력을 줬다.

그러한 기획이 그람시의 생애와 사상의 핵심 줄기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구체성의 결여에서 비롯하는 《옥중수고》의 약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통찰들이 무엇이든 간에 《옥중수고》는 마르크스·레닌·트로츠키의 최상의 저술이 갖는 위대성을 갖지는 않는다.

그람시의 공판에서 파시스트 검사는 “이 두뇌의 활동을 20년 동안 정지시키도록” 투옥을 요청했다. 파시스트들은 그의 두뇌를 정지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람시를 계급투쟁에 직접 관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마르크스주의가 〈신질서〉와 〈리옹 테제〉에서 보인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시키는 것을 막는 데는 성공했던 것이다.

출처: Chris Harman, Gramsci versus Reformism, 1983, SWP Pamph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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