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제국주의 극우 이재명 정부 팔레스타인과 이란전쟁 이주민·난민 긴 글

한국에 다시 미국 핵무기가?:
미국은 왜 철수했던 핵을 재배치하려 하는가

미국 전쟁부가 새로운 핵전략을 검토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동맹국과 해외 주둔 미군기지를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해 전술핵의 역할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자세한 내용은 본지 지난호에 실린 ‘전술핵 확대 검토하는 미 전쟁부: 동아시아를 핵전쟁의 전장으로?’를 보시오.)

한국과 일본이 전술핵 전진 배치의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된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부 유럽 회원국(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튀르키예)에는 이미 미국의 전술핵이 배치돼 있다.

미국이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면 이는 처음이 아니라 재배치다. 미국의 전술핵은 1957년 한국에 처음 배치됐다가 1991년 12월 철수했다. 이 기간에 미국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기조를 유지했다. 미국은 한국 대통령에게만 핵무기의 종류와 위치를 보고했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를 지낸 돈 오버도퍼는 한국 정부 관리의 말을 빌려 당시 상황을 전했다. “미국의 전술핵무기에 대한 일말의 언급조차 금기사항이었다. 핵무기는 너무나 가공할 무기였으므로 논의조차 금지돼 있었다.”(《두 개의 한국》, 길산, 387쪽)

한국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는 소련 극동군과 북한을 겨냥했다. 고(故) 리영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남한의 영토, 즉 지상 배치의 핵무기는 소련 영토 자체를 직접 공격한다는 것보다도, 소련의 극동군에 대한 견제 역할이 하나 있었지요. … 주목적은 남한에 미국 지상군이 주둔하는 한, 주한미군에 대한 북한의 재래식 무기공격을 핵반격으로 예방하기 위한 방패 역할을 한 것입니다.”(《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두레, 212쪽)

이에 따라 핵탄두는 비무장지대 부근에 집중 배치됐다. 주한미군은 훈련 때마다 이 위험천만한 무기를 헬리콥터로 수송했다.

소련 붕괴

미국은 1991년까지 한국에 핵무기를 반입했다. 1991년 9월 27일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는 전 세계에 배치된 미군의 지상·해상 발사 전술핵무기를 전면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노태우 정부도 이에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한국 내 핵무기 철수가 완료됐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 요인은 지정학적 대변동이었다. 1989년부터 동구권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는 1991년 8월 중순 소련에서 일어난 제도 붕괴였다. 공산당 보수파가 동유럽 정권의 붕괴, 소련 내 소수 민족 운동의 분출, 노동자 투쟁의 부상에 맞서 고르바초프를 감금하며 군사 쿠데타를 기도했다. 그러나 대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쿠데타는 실패했다. 이제 권력은 고르바초프의 당시 라이벌인 보리스 옐친에게로 넘어갔다. 이로써 소련 해체가 본격화했다.

미국 권력자들은 통제력을 잃은 소련의 전술핵이 ‘테러 집단’이나 제3국으로 유출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에 전 세계에 배치한 미국의 전술핵을 철수하고 폐기하겠다고 선제적으로 선언했다. 소련이 자국 전술핵을 회수하고 폐기하도록 유도하려는 포석이었다.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는 이러한 글로벌 전략의 일환이었다.

경제적 요인도 작용했다. 미국은 군비 경쟁을 통해 소련이 대적할 수 없는 무기를 개발하는 한편, 소련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고자 했다. 실제로 미국은 군비 경쟁으로 소련권의 경제 구조를 무너뜨렸지만, 미국 경제도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 다른 서방 경쟁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약화됐다.

여기에 한국 내 주한미군 철수 운동의 고조로 발생한 정치적 문제를 피하고, 북한과의 핵 협상을 촉진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요동치는 탈냉전 질서

그러나 탈냉전 질서는 다시 요동치게 됐다. 소련 해체 이후 한동안 미국은 이렇다 할 적국의 도전에 직면하지 않은 채, 전 세계 금융·기술·동맹 네트워크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미국은 더는 1991년에 누렸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누리지 못한다. 오늘날 이란 전쟁은 미국이 가진 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로 인해 미국 힘에 대한 신뢰성의 위기가 생겨났다. 로버트 페이프 시카고대 정치학 교수는 “탈냉전 질서는 미국의 강압 능력보다 신뢰성의 힘에 더 크게 의존했다”고 썼다(‘Iran and the New Rules of Global Power’, 《포린 어페어스》, 7월 24일 자).

이제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 지배자들도 미국이 자국 안보를 지켜 줄지 의문을 품는다. 전술핵으로 핵우산을 강화하겠다는 미국의 구상은 이 같은 상황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1970년대 초중반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1970년대 초 남베트남이 패망 위기에 처하자 박정희는 안보 불안에 휩싸였다. 이에 따라 ‘자주국방’, 즉 군사력 증강을 추진했다. 핵심은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계획이었다. 미국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만약 핵무기 생산 계획을 고집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체의 안전 보장을 백지화하겠다” 하고 통고했다.

동시에 미국은 박정희 정권을 달래고자 한국 내 핵무기 배치를 대폭 확대했다. “핵무기 전문가인 윌리엄 어킨이 입수한 미국 정부의 문건에 따르면 72년 남에 배치된 핵탄두는 총 763개로 사상 최고 규모였다.”(돈 오버도퍼, 위의 책, 384~385쪽)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을 안심시키고자 북한을 상대로 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공식 언급했다. 1975년 6월 국방장관 제임스 슐레진저는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전술핵무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 실제 그 사용 여부를 신중하게 고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와 현재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으나, 당시에는 경제적·군사적 능력이 급성장하는 지정학적 경쟁국이 없었다. 당시 소련은 ‘정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과 중국은 서로 소규모 전쟁을 벌일 정도로 관계가 악화돼 있었고 대립하는 관계였다(중소분쟁).

오늘날 중국은 미국의 유일한 필적 상대로 부상했다. 북한은 핵무장국이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중국·러시아·북한의 밀착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구도 변화로 인해 미국의 전술핵 전진 배치가 한국 지배자들의 안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핵군비 경쟁을 가속해 전쟁 위협을 심각하게 고조시킬 공산이 크다.

한국이나 일본에 미국 핵무기가 재배치된다면 동아시아 핵군비 경쟁 격화로 이어질 것이다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카카오톡 채널, 이메일 구독,
매일 아침 〈노동자 연대〉
기사를 보내 드립니다.
앱과 알림 설치
앱과 알림을 설치하면 기사를
실시간으로 받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