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9월 총파업·10월 항쟁 80주년:
아래로부터 분출한 거대한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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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8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노동자·민중대회’가 대구에서 열린다. 대구는 9월 총파업이 10월 항쟁으로 확대되는 데 기폭제 구실을 한 지역이다.
우파 진영에서는 10월 항쟁을 ‘대구 폭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대구 폭동’이라는 명칭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저항을 대구라는 특정 지역에 한정하고, 당시 미군정이 ‘공산당이 주도한 폭동’으로 규정했던 것처럼 소수 집단의 폭력 행위로 왜곡하는 문제가 있다.
일부에서는 10월 항쟁을 ‘추수봉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명칭 역시 농민 봉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 민중적 항쟁의 성격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당시 남한의 상황은 매우 첨예하고 심각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남한을 ‘끓고 있는 화산’, ‘화약 상자’에 비유할 정도였다.
해방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쌀값은 10배 이상 치솟았다. 80퍼센트 이상의 초등학생이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식량난이 심각했다. 〈영남일보〉에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9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여러 산업과 도시 노동자들로 투쟁이 확산됐다. 10월에는 농민들의 봉기가 결합하면서 저항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항쟁은 12월까지 경상남북도를 비롯해 충청남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남도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해방 이후 처음으로 계엄령까지 선포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봉기가 발생한 지역과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의 세력 분포가 상당 부분 겹친다는 점에 주목했다. 경상도에서도 해방 직후 여러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됐고, 특히 대구와 경북 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농민운동의 전통이 존재했다.
일제 식민 지배의 유산이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식량난과 물가 폭등, 실업과 빈곤, 미군정 정책에 대한 불만이 중첩됐다. 이런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의 9월 총파업은 농민과 도시 민중의 저항과 결합하며 10월 대규모 항쟁으로 확대됐다.
“쌀을 달라”
해방 당시 철도와 전기를 비롯한 공공시설과 주요 산업의 93퍼센트가 일본인 소유였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상당수 공장의 가동이 중단됐다. 북한에서 생산되던 화학 제품과 전력, 비료 등 중화학 공업 제품의 남한 공급도 사실상 끊겼다.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고, 노동자들은 공장 자주관리 운동을 전개했다.
농민들의 처지도 열악했다. 1946년 당시 남한 전체 농민 가운데 39퍼센트가 자작 겸 소작농이었고, 45퍼센트가 소작농이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은 여러 지역의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농민 조직인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을 건설하는 데도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전평은 1946년 2월 조합원 수가 57만 명에 달했고, 전농의 조합원은 약 330만 명으로 알려졌다.
노동자와 농민의 삶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미군정의 시장주의 경제 정책은 민중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매점매석과 통화량 증가로 인플레이션이 심해졌고, 쌀값이 폭등하면서 도시의 식량 위기도 심각해졌다.
그러자 미군정은 1946년 1월 25일 미곡수집령을 공표하고 미곡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에 들어갔다. 공출한 쌀로 배급을 실시했지만, 배급량은 일제강점기 전시 총독부가 지급하던 양의 절반 수준인 하루 1홉에 불과했다.
쌀 공출 감독권은 경찰에 돌아갔다. 일제에 협력했던 전력 때문에 이미 대중의 반감을 사고 있던 경찰에 다시 공출 업무를 맡긴 것은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1946년 봄부터 식량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한 달 사이에 세 배로 오르다가, 두 달 사이에 열여덟 배로 뛰어올랐다”고 묘사하며 폭등한 쌀값에 허덕이는 민중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렸다. 전평은 실업자 운동과 연계해 전국 곳곳에서 “쌀을 달라”며 긴급 쌀 요구대회를 열었다.
실업 문제도 심각했다. 1946년 1월 남한 인구는 약 1,940만 명으로 추산됐고, 실업자는 약 105만 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절반가량은 일본 등지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이었다.
곡물 가격이 폭등하고 통화량이 급증하는 가운데 임금 인상은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했다. 1946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해방 전인 1939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저항도 확산됐다. 1946년 6~8월 노동쟁의가 잇따랐으며, 9월 총파업 이전에만 그해 107건의 파업에 5만 7,000여 명이 참가했다. 서울에서도 철도 파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24건의 파업에 약 3,000명이 참여했다. 전평 지도부가 산업협력 방침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파업 자제를 요구하는 지령을 6월부터 7월까지 세 차례나 내려야 했을 정도로 아래로부터의 불만과 저항은 거셌다.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 아래 조선인 경찰은 약 8,000명이었는데, 미군정 아래에서 다시 경찰 조직에 편입되면서 불과 3개월 만에 약 1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미군정은 우익 세력과 경찰력을 동원해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지역 인민위원회를 해체해 나갔다. 일제에 협력한 전력이 있는 경찰의 억압과 관리들의 부패에 대한 대중의 반감도 커졌다.
해방은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곧바로 개선해 주지 못했다. 식량난과 실업, 물가 폭등이 삶을 짓눌렀고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불만도 누적됐다. 이렇게 쌓인 불만과 분노는 결국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으로 폭발했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신전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승전국들은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국제적 협력을 필요로 했다. 한반도에서는 이러한 협력이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로 나타났다. 이런 정세 속에서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은 1945년 8월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소련과 미국 등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해방 직후 노동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됐던 공장 자주관리 운동에 대해서도 미군정과 충돌하기보다 산업 건설에 협력한다는 방침을 취했다.
그러나 1946년 들어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점차 표면화하면서 냉전의 기운도 짙어졌다. 그해 2월 스탈린은 미국의 도전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고, 3월 윈스턴 처칠은 ‘철의 장막’을 언급하며 소련의 영향력이 동유럽으로 확대되는 것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반도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3월 20일~5월 6일)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휴회에 들어간 것도 이처럼 심화하던 미·소 갈등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소공위가 교착 상태에 빠진 뒤 미군정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46년 5월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었다. 정판사는 일제강점기 근택인쇄소라는 이름으로 조선은행권 등을 인쇄하던 곳으로,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사용하면서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관계자들이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인쇄했다는 혐의로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이후 관련자들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조선공산당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으로 규정했다. 정판사 사건을 전후해 미군정의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은 한층 강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은 1946년 여름 기존 노선을 바꾸기 시작했다. 박헌영은 북한과 모스크바 방문을 마친 뒤 기존의 미군정에 대한 협력적 태도에서 벗어나 이른바 ‘정당방위의 역공세’를 내세웠다. 1946년 7월부터 본격화한 이 노선은 흔히 ‘신전술’이라고 불린다.
미군정의 압박도 거세졌다. 9월 6일 미군정은 좌익계 신문들에 정간 조처를 내리고 조선공산당 간부 이주하를 체포했다. 이튿날에는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는 등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따라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은 식량난과 실업, 물가 폭등 같은 경제적 불만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교착과 냉전의 심화, 미군정의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 그리고 이에 맞선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전환이라는 정치적 맥락도 함께 작용했다.
철도 파업과 9월 총파업
총파업의 직접적인 발단은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1946년 5~8월 남한에서는 물가가 급등했고, 철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1945년 10월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노동조건도 열악했다. 철도 침목의 노후화와 태평양전쟁 당시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노선, 석탄 부족과 차량 수리 공장의 조업 중단 등이 겹치면서 사고도 잦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8월 20일 ‘적자 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를 명분으로 철도 노동자 4만 3,257명 가운데 25퍼센트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전환하려 했다.
이에 9월 13일 서울 용산의 철도 노동자 3,000여 명은 미군정청 운수부 철도국장에게 일급제 반대와 기본급 인상, 가족수당 지급, 물가수당 인상, 식량 배급 확대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인들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은가” 하고 말해 노동자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9월 23일 부산에서 약 8,000명의 철도 노동자들이 같은 요구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9월 총파업의 시작이었다. 몇 시간 만에 철도 파업은 서울로 확산됐고 남한의 철도 수송은 사실상 마비됐다. 철도 노조 18개 지부에서 노동자 4만여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은 며칠 만에 인쇄와 전기, 전신·우편 등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로 확대됐다. 경기고등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학생들도 수업을 거부하고 파업 지지 행동에 나섰다.
전평은 24일 ‘남조선 총파업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이어 26일에는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남조선 4만 철도 노동자를 선두로 사생존망의 일대 민족투쟁을 개시한다”는 요지의 총파업 투쟁선언서를 발표했다.
파업은 노동자들만의 고립된 투쟁이 아니었다. 당시 미군 서울방첩대(CIC)는 “쌀 사정 때문에 인민은 철도 파업자들에게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심각한 식량난과 물가 폭등으로 고통받던 대중의 불만이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파업을 공산주의 세력이 일으킨 혼란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9월 25일 군정장관 러치는 라디오 특별 담화를 통해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고, 이튿날부터 노조 간부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철도 노동자들은 열차 운행의 핵심 시설인 용산기관구 등에서 농성을 벌였다. 용산기관구에는 노동자가 약 800명에 불과했지만, 전평 핵심 조합원들이 집결해 파업의 주요 거점이 됐다. 9월 30일 새벽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 대한노총원들이 농성장에 진입하면서 유혈 충돌이 벌어졌고, 용산 농성 노동자 가운데 1,700명이 검거됐다.
미군정 운수국장은 당시 상황을 두고 “그것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전쟁하듯이 파업을 진압했다”고 표현했다. 철도 파업에 대한 강제 진압은 오히려 저항을 더욱 확대했다. 9월 30일 이후 서울에서는 철도 노동자뿐 아니라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강제 진압에 항의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서울에서만 295개 공장에서 파업이 벌어졌고 노동자 3만 명과 학생 1만 6,000명이 참가했다. 남한 전역에서는 약 25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총파업 과정에서 1만 1,624명이 검거됐다.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9월 총파업은 광범한 대중의 불만과 결합했고, 미군정과 경찰의 강경 진압은 저항을 잠재우기보다 확대시켰다. 이제 저항의 중심은 서울에서 대구로 옮겨 갔다.
총파업에서 10월 항쟁으로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강제 해산했다고 해서 총파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파업이 지방으로 확산되고 지역의 인민위원회와 노동조합, 좌익 세력의 활동이 결합하면서 저항은 대중 봉기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곳이 대구였다.
대구는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해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빠르게 성장해 일제 말에는 서울·평양·부산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가 됐다.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돼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늘면서 대구·경북에도 약 30만 명이 유입됐다. 해방 전 대구 인구가 약 20만 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급격한 인구 증가는 커다란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했다.
식량 사정도 악화됐다.
10월항쟁80주년행사위원회가 발행한 소책자 《10월 항쟁 이야기》에 따르면, 미군정은 곡물 강제 수집에 나섰지만 전체적으로는 목표량의 7.3퍼센트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경북의 수집량은 남한 각 도 가운데 가장 많았다.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전남에서 약 4만 섬을 수집한 데 비해, 생산량이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경북에서는 약 21만 섬을 거둬들였다. 그만큼 경북 농민들에게 미곡 수집이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덮쳤다. 1946년 5월부터 콜레라가 유행해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군정이 콜레라 확산을 막으려고 대구 주변의 교통을 통제하면서 식량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9월 24일 대구역 철도 노동자들도 일급제 반대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26일에는 대구우편국 노동자 700여 명과 전화국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에 나섰다. 파업은 남선전기를 비롯해 섬유·금속·출판·교통·화학 등 여러 산업 부문으로 확산됐다. 27일에는 ‘남조선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노동자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쌀을 요구하는 민중의 시위가 결합하기 시작했다. 10월 1일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발포해 사망자가 발생했다.
경찰의 발포와 사망자 발생은 다음 날인 10월 2일 대규모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전날의 소식을 듣고 격분한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비롯한 경찰 시설을 공격하거나 점거하고 경찰관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식량난과 물가 폭등으로 누적된 불만에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경찰에 대한 반감이 결합하면서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대규모 민중 항쟁으로 발전했다.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 병력과 장갑차를 비롯해 경찰, 국방경비대와 우익 청년단체 등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한 국제 통신사는 당시 대구의 상황을 ‘전쟁터’에 비유해 보도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경북의 농촌 지역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경찰서와 관공서가 공격받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미곡 수집과 관련된 장부와 기록들이 파기됐다. 이는 항쟁의 배경에 농민들의 미곡 수집에 대한 강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항쟁은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됐다. 전남에서는 10월 말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화순 탄광의 생산량은 남한에서 세 번째였지만 해방 이후 생산량이 절반 아래로 줄면서 많은 광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10월 30일 화순 광원들이 광주를 향해 행진했고, 이튿날에는 약 3,000명의 광원이 다시 광주 진입을 시도했다. 같은 날 목포에서는 전화 교환원들이 파업에 들어가 통신이 중단됐다.
항쟁은 12월까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이어졌다. 참가 규모는 약 300만 명으로 추산되기도 하며, 진압 과정에서 1,000명 이상이 숨지고 수만 명이 체포됐다. 9월 총파업으로 시작된 노동자들의 저항이 식량난과 미곡 수집, 경찰과 미군정에 대한 광범한 불만과 만나면서 해방 직후 최대 규모의 대중 항쟁 가운데 하나로 발전한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약점
서울의 철도 총파업이 다른 산업 부문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전평의 조직력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전평은 9월 24일부터 총파업에 공식적으로 개입해 산하 노동조합들의 참여를 조직했고, 26일에는 전국적 지도 기관인 ‘남조선 총파업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조선공산당도 ‘남조선 노동자 제군에게 격함’을 발표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앞서 언급했듯이 해방 직후 노동자들의 투쟁을 미군정과의 전면적인 충돌로 발전시키기보다 일정하게 자제시키는 정책을 펴 왔다.
조선공산당이 미군정과의 협조 속에서 산업 건설을 강조하는 동안 미군정은 노동자들이 자주관리하던 사업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 결과 1946년 9월 총파업이 일어날 무렵에는 해방 직후 활발하게 전개됐던 공장 자주관리 운동도 상당 부분 약화돼 있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휴회에 들어간 상황에서 소련은 남한에 자신에게 유리한 세력과 여론을 형성하고자 총파업을 이용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협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으므로 남한의 대중투쟁이 미군정과의 전면적인 충돌로 발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침은 조선공산당의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한 뒤에도 미·소 협조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평과 인민위원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에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미군정으로부터 권력을 쟁취하는 투쟁으로 발전시키기보다 미군정의 정책을 압박하고 미·소공위 재개에 유리한 정치적 조건을 조성하는 투쟁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 대가는 컸다. 해방 직후 노동자·농민의 거대한 투쟁과 인민위원회의 등장으로 좌파에 유리하게 형성됐던 세력관계는 10월 항쟁이 진압되면서 크게 달라졌다. 그 결과 해방 직후 아래로부터 분출했던 급진적 변화의 가능성도 크게 후퇴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해 식량난과 실업, 미곡 수집, 경찰에 대한 불만 등 민중의 분노와 결합하며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한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은 아래로부터 분출한 거대한 저항이었다. 그 역사적 의미를 80년이 지난 오늘 다시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