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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역사가 주는 교훈:
‘국제 사회’의 개입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버마 정권의 야만성에 몸서리치는 많은 사람들이 “국제 사회”가 버마 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버마에 대한 외세 개입의 역사는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이 항상 버마인들의 상황을 악화시켰음을 보여 준다.

단연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세력은 영국 제국이었다. 19세기 내내 영국은 인도에서 버마로 꾸준히 침투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버마의 서부를 점령하더니 나중에는 이라와디 강 하구의 삼각주 지역도 점령했다.

마침내 1885년에 영국은 버마 영토 전체를 점령하고 국왕을 퇴위시키고 버마를 인도에 합병했다. 영국의 침략은 군대가 마을을 불태우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대거 처형하는 등 철저하게 야만적이었다.

버마를 지배하게 된 영국은 지체없이 버마의 경제와 환경을 약탈했다. 이라와디 강 삼각주의 망그로브 숲을 베어버리고 논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독점 기업들은 버마의 석유·티크나무·루비를 약탈했다.

그 뒤 20여 년 동안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만행으로 버마 사회는 해체되고 갈갈이 찢겨졌다. 영국은 버마의 다양한 소수민족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드는 ‘이간질시켜 각개격파하기’ 전술로 지배권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버마의 독립 운동은 20세기 초에 서서히 등장했다. 처음에 그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승려와 학생 들이었다. 그들의 평화 시위는 씨알도 안 먹혔고, 1930년대가 되자 타킨(Thakin)이라는 새로운 급진적 학생 운동이 등장했다. 아웅산, 우 누, 네 윈 등이 그 운동의 지도자였고, 그들은 이웃 강대국들의 도움을 받아 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터지자 아웅산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는 버마독립군을 결성했다. 버마독립군은 일본과 손잡고 영국에 맞서 싸웠다.

버마국민군

1942년 일본이 버마를 점령하고 형식적 독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버마인들은 곧 새로운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옛 제국주의 지배자들과 거의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기 시작하자, 버마국민군으로 이름을 바꾼 아웅산의 부대는 이제 영국 편에 붙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버마나 아웅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했다. 일각에서는 반역죄로 아웅산을 처벌하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아웅산의 인기와 강력한 버마 민족주의 운동 때문에 그렇게 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영국은 협상에 나섰고 버마의 독립을 승인했다. 1948년 1월 마침내 버마는 독립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회담장에 난입한 무장 세력이 아웅산과 그의 각료 대다수를 총으로 살해했다.

아웅산 살해는 서로 경쟁하는 버마 정치인들의 소행으로 돌려졌다. 비록 많은 사람들은 아웅산 살해 음모에 영국군 장교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루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누구 소행이든 간에, 아웅산이 죽은 뒤 버마의 민족 운동은 급속하게 분열해서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우 누가 신생 독립국 버마의 지도자가 됐고, 네 윈은 군대의 우두머리가 됐다. 군대는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을 상대로 한 전투에 투입되거나 중앙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다양한 소수민족들을 탄압하는 데 동원됐다.

1960년대 초에 우 누는 버마에 대한 통치권을 급속하게 상실하고 있었다. 1962년 네 윈이 미국과 영국의 승인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지금까지 지속된 군사 정권의 시대를 열었다.

버마 군부는 처음에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군장성들이 경제를 책임지고 그들 스스로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다는 것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나라에 의존해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 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서방 정부들은 버마의 끔찍한 인권 탄압 전력을 거론하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들의 전략적·경제적 이해관계와 맞을 때는 그 지역의 독재 정권들을 아주 기꺼이 지원했다. 버마 민중이 서방의 도움으로 자유를 쟁취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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