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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크 알리가 진단하는 파키스탄 비상사태의 배경과 전망

파키스탄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어제[11월 3일] 군부의 비상사태 선포에 결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파키스탄에서 계엄령은 이제 항생제가 돼 버렸다. 즉, 똑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복용량을 갑절로 늘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제 일어난 일은 쿠데타 속의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은 민간인인 척하며 파키스탄을 통치했지만, 그의 권력 기반은 군대로 국한돼 있었다. 그리고 어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73년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관영 방송 이외의 방송 송출을 모두 중단시키고, 이동통신망을 차단하고, 무장 폭력배들을 동원해 대법원을 포위하고, 대법원장을 해임하고, 변호사협회 회장과 파키스탄인권위원회 활동가들을 체포하고, 그래서 파키스탄 역사에서 또 다시 수치스런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람도 육군 참모총장[무샤라프]이었다.

왜 그랬는가? 그들은 다음주로 예정된 대법원 판결이 무샤라프의 선거 출마를 불가능하게 만들까 봐 우려했다.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로 한 결정은 몇 주 전에 내려졌다. 베나지르 부토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파키스탄을 떠났다. 언론 보도는 부토가 귀국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부토가 이끄는 정당의 고위 지도자인 아이트자즈 아산이 쿠데타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체포됐음에도 아직까지 부토는 새 계엄령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권력의 향에 취해 있었던 부토는 이제 권력을 잡기가 여전히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지 모른다.

희망

만약 부토가 이번 계엄령을 지지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가 될 것이다. 만약 부토가 장군[무샤라프]을 버리기로 결심한다면(부토는 무샤라프가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으므로 독재자와 계속 동맹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부토는 미국 국무부 ― 그동안 부토와 무샤라프의 동맹을 종용해 온 ― 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차기 미국 국무장관으로 거론되는 제임스 루빈은 최근 디츨리 파크(영국 외무부 산하 연구소)의 비공개 모임에서 파키스탄측 인사들이 자신의 견해 ― 파키스탄 서부의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부토가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 에 이의를 제기하자 신경질을 부렸다.

비상사태의 표적이 된 두 기관은 사법부와 독립 TV 방송국들이다. 이 방송 기자들은 정치인들한테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방송인 지오TV(Geo TV)는 외국으로 방송을 계속 내보냈다. 지오TV의 가장 날카로운 기자 중 한 명인 하미드 미르는 어제 오후에 자신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대사관이 이번 쿠데타를 사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대법원장을 “탈레반에 동조하는” 성가신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1년 내내 무샤라프 정권은 심각한 정당성 위기에 시달려 왔다. 올해 초 무샤라프 장군이 대법원장 이프티카르 후세인 초드리를 해임하자 이에 항의하는 대중 운동이 6개월 동안 지속돼 결국은 정부를 물러서게 만들었다. 초드리의 일부 판결들은 “실종된 재소자들”, 여성 성희롱, 졸속 사유화 등의 주요 쟁점을 둘러싸고 정부의 입장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정부는 초드리가 군인의 대선 출마를 불법이라고 선언할까 봐 우려했다.

국가와 사법부 ― 항상 취약했던 ― 간의 권력 분립을 요구하는 투쟁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과거에 파키스탄의 법관들은 대체로 정부에 순응했다. 군부 지도자들에게 저항한 법관들은 회유·협박·공갈·설득 끝에 법복을 벗곤 했다. 파키스탄 법관들의 출신 환경은 다른 지배 엘리트들과 다르지 않다. 대법원장의 저항이 그토록 놀랍지만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저항을 통해 그는 엄청난 존경을 받게 됐고, 최고 인기 ‘상품’이 됐다.

대법원장

세계 언론에 비치는 파키스탄의 모습은 군장성들, 부패한 정치인들, 수염이 텁수룩한 광신도들의 나라이다. 대법원장의 복귀를 요구하는 투쟁은 파키스탄의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헌법상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이 운동으로 사람들의 희망이 되살아났다. 대다수 사람들이 체제로부터 소외되고, 지배자들을 냉소하고, 그들의 부정 축재와 허영심으로 말라비틀어진 얼굴을 보며 한없는 불신을 느끼고 있던 때에 말이다.

어제 대법원은 특별회의를 열어 새 계엄령을 “위법·위헌”으로 선언하는 영웅적인 결정을 내렸다. 서둘러 임명된 새 대법원장의 본질, 즉 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곧 드러날 것이다. 만약 헌법이 3개월 이상 정지된다면 그 때는 무샤라프조차 군부에 의해 제거되고 새로운 독재자가 등장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번 비상사태가 대법원을 숙청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도 있다. 무샤라프가 대국민 담화 방송에서 밝힌 내용이 그것이다. 어느 경우든 내년 1월 선거가 총체적 부정선거가 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어느 경우든 암흑의 끝을 향한 파키스탄의 오랜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 타리크 알리는 파키스탄 출신 사회주의자이고 《신좌파 평론》 편집자이자 버소출판사(verso) 대표이다. 국내에는 《근본주의의 충돌》(미토)등이 번역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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