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연방공화국 논쟁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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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연방공화국”이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내세울 국가 비전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이 비전은 당을 결속시키기보다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애초 “코리아연방공화국”은 당내 예비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권영길 후보가 내세운 구호였다.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도 권영길 후보는 “코리아연방공화국 시대를 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코리아연방공화국”은 당 내에서 충분한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했고, 당 밖에서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0월 29일 민주노동당 선대위 회의에서 “코리아연방공화국”이 표어(“메인 슬로건”)로 채택되지 못한 것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게다가 권영길 후보도 “현재의 정세와 대선 국면에 [코리아연방공화국이] 적절치 않으며 당 내에 논란이 있는 만큼 신중하게 결정돼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선대위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의 일부 지도자들은 메인 슬로건으로 채택되지 못한 “코리아연방공화국”을 이번에는 “국가 비전”으로 다시 들고 나왔고 결국 11월 12일 선대위 전체회의에서 표결로 확정됐다.
물론 절차상의 문제는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내 경선으로 당선한 후보가 내세운 공약이었고, 선대위에서 표결을 통해 정해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당내 의견그룹들의 이견을 고려하고 특히 당 밖의 진보단체와 인사 들까지 폭넓게 대변하고 결속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다수일지라도 특정 안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표결에서 승리한다 해도 그것은 단결을 저해하는 ‘상처뿐인 영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이한 정파(의견그룹)들로 이뤄진 민주노동당은 공동전선 방식으로 운영돼야 한다.
더구나 당내 토론도 설득 과정도 거의 없었다. 경선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었지만, 그 투표가 “코리아연방공화국”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도 아니었고 당원들은 후보의 경력 등을 더 중요하게 봤을 수도 있다. 또, 논란이 되는 쟁점들은 대선을 앞둔 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 모두에서 토론 주제로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권영길 후보가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자 당내 일부 의견그룹들(의 구성원들)은 대선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잘못된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데 관료적으로 밀어붙여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통일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선전하겠다는 자민통 경향 지도자들의 종파적 행태는 안타깝게도 또 다른 종파적 태도에 빌미를 제공하고 격화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계급투쟁
“코리아연방공화국” 비전이 제시하는 “10대 시정방침”은 대부분 훌륭한 내용들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가구 1주택 등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제시해 온 대표적 정책들을 망라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을 실현하는 “나라다운 나라”가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고 규정한 데 있다. 여기에는 통일이 돼야 무상의료, 무상교육, 1가구 1주택 등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강력한 전제가 깔려 있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을 주창해 온 이용대 정책위의장은 “통일국가가 되지 않고는 민중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 “분단구조를 타파하는 통일국가 건설이 아니고서는 기득권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올해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코리아연방’ 건설을 통해 분단된 한국사회를 ‘민중이 잘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진보정치〉 343호)
과연 그저 통일만 되면 “민중이 잘사는 나라”가 될까? 통일을 통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노동대중의 정서와 괴리된 한 무리 사람들의 믿음인 듯하다. 엄청난 빈부격차의 남한이 가난에 시달리는 북한과 통일해 시너지 효과를 얻으리라는 대중적 기대는 거의 없다.
물론 강령이 대중 정서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므로, 분석이 옳다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분단에서 찾는 분석은 억지로 꿰어 맞추기이다. “재벌과 외국투기자본의 배를 불리는 경제구조[는] 분단구조의 산물”이 아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대기업과 외국 투기자본이 배를 불리는 나라가 분단 한국만이 아닌 것만 봐도 그렇다.
물론 분단으로 남북 민중은 단일 국가를 건설할 기회를 빼앗겼고 전쟁을 비롯한 여러 수모와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 뒤 남한과 북한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영항권에 편입돼 그 국가들의 모습을 좇아 건설됐다. 지난 60년 동안 남북은 자체의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급속한 공업화를 이룬 것이다. 그 결과 두 개의 코리아 안에 각각 선명한 계급 분단이 생겼고, 계급투쟁이 중요해졌다. 그동안 남한 사회를 이끈 변화의 동력은 바로 계급투쟁이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 일반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코리아연방공화국” 비전이 제시하는 “10대 시정방침”의 성취도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같은 민족인 지배계급에게 양보를 강제함으로써 말이다. 분단을 해소한다고 해서 이런 일이 자동으로 성취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분단 해소를 위해 계급을 초월한 단결이 강요되면 노동자·민중의 이익은 침해될 수 있다.
사실, 낮은 단계든 높은 단계든 “상호 체제 인정”을 전제로 하는 연방제는 남북의 사회 변혁과 아무 관계가 없는 개념이다. “주어진 현실에 진실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그럭저럭 분단이 만족스럽고 통일의 필요성조차 아득”하며 노동자·민중이야말로 통일이 필요하다는, 통일/반통일 세력 식의 얘기는 현실과 괴리된 교조적 주장일 뿐이다. 소위 반통일 세력이어야 마땅한 남한의 정권과 자본이 1990년대 이후 내내 남북관계를 주도하지 않았는가. 통일되기 전이든 후이든 근본적 사회변혁의 과제는 통일과는 별개이며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군사력 등 강제에 의한 것(병합)이 아닌 한은 통일은 지지해야 마땅하다. 모든 통일이 다 변혁적이라고 ‘빨간칠’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변혁적이지 않은 통일은 지지하지 않겠다는 조건부적 태도도 잘못이다. 민족문제이니만큼 국민의 다수가 통일을 원한다면 비록 이상적인 방안대로의 통일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지지하고 그 과정에서 남북 노동계급 대중의 단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북한 문제
통일 문제는 통일 상대인 북한 문제를 제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는 통일국가 비전은 북한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이용대 정책위의장은 “연방통일국가를 건설하자면 북쪽 사회 비전은 북쪽 정부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상대방 체제의 존중과 불간섭”이라는 신성동맹 속에서는 어떤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 만약 한반도 전체에 대한 비전이 없다면 북한 대중의 열망은 물론 남한 대중의 열망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남한은 “10대 시정”을 하는 반면 북한은 계속 가난하고 억압적인 사회로 남는다면 통일은 매력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무상교육·무상의료를 내세우며 북한은 경제만 살아나면 변할 게 없다는 암묵적 가정을 하곤 한다. 하지만 북한의 학교 복도에 나붙은 성적 등수표를 보면 입시 경쟁에 찌든 남한의 학생들은 동병상련을 느낄 것이다. 심지어 대학도 성적표를 복도에 공개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입학 경쟁률은 30대 1이고, 대학 본고사를 치를 때는 북한의 엄마들도 교문에 엿을 붙인다. 경제난으로 기본적인 의약품과 장비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무상의료는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심지어 개인들이 약을 구해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런 무상교육·무상의료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통일 국가 비전은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노조를 결성할 권리와 이를 통해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투쟁할 권리, 조선로동당과 다른 의견을 표현할 권리, 그리고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등 기본적 권리를 모두 일관되게 옹호해야 한다.
장애인 차별 철폐와 이주자·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 권리 보장 같은 “10대 시정” 내용도 북한에 적용돼야 한다. 북한은 전후에 장애인을 평양에서 쫓아낸 바 있고,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다인종, 다민족문화’론에 대해 “민족의 단일성을 부정”하고 “남조선을 잡탕화하려는 민족말살론”이라고 비난했는데, 이런 관점으로 이주자를 환영하고 권리를 보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비전을 북한 노동자·민중에게 제시하는 ‘진보 개입’은 제국주의의 대북 압박과 개입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강화해야 할 아래로부터의 계급 연대이다.
민생이냐 통일이냐?
당내 의견그룹 ‘전진’과 일부 개인들은 “민생”이 대선의 최대 쟁점이기 때문에 “코리아연방공화국”이 국가비전으로서 적절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그토록 협소하게 정의해서는 안 된다. 빈곤을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쟁과 군국주의라는 제국주의의 군사적 측면과 한 쌍이다. 국가보안법 등의 억압 장치들도 결국 착취 강화를 위한 수단이다. 민생을 이런 문제들과 대립시킨다면 협소한 의미의 민생조차 지킬 수 없다.
또, “코리아연방공화국”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해서 선거운동 못 한다는 결론(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장)으로 이어지는 것도 옳지 않다. 일각에서는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는 표어가 지지율 하락을 가져올까 봐 우려하지만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공약과 비전을 제시하느냐, 후보가 누구냐보다 민주노동당의 예상 득표치 안팎의 근소한 표차로 승부가 가려질 것 같은 객관적 선거 구도가 가하는 압박이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 요인을 지나치게 크게 보는 사람들은 후보가 문제다, 공약이 문제다, 비전이 문제다, 선거운동 방식이 문제다 하며 참을성 없이 속죄양을 찾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문제들을 둘러싼 분열 양상이 당 지지 결속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진보 염원 세력을 결집시키기는커녕 내부 단결도 돼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사람들은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서 분당 얘기마저 꺼내고 있다.
비판을 규율 조처로 억누르려는 것(얼마 전 조승수 소장이 쓴 표현 ― “군사왕조 집단인 북한” ― 에 경고를 줄 것을 주문하는 안건이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에 올랐다)도 잘못이지만, 비판과 지지가 결합될 수 없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다. 비판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코리아연방공화국”이 잘못된 관점을 담은 표어이지만, 다른 정당 후보들의 정책에 비해 월등히 나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앞서 지적했듯이, “10대 시정방침”에는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제기해 온 대체로 훌륭한 정책들이 담겨 있다.
다만 이런 정책을 실현하는 힘은 통일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나온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강조하고 싶다. 민주노동당은 통일이 “나라다운 나라”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처럼 말하기보다 반전·반신자유주의 진보 운동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더욱 힘 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