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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뿐인 수능등급제가 혼란과 부작용을 낳았다

노무현 정부가 “1~2점 차로 줄을 세우는 관행을 없애겠다”며 올해 새로 도입한 수능등급제로 학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수능 성적 발표 후 창원에서 쌍둥이 자매가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행 수능등급제는 입시 부담을 없애는 데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한나라당, 보수 언론, 주요 명문 대학 당국 등은 “평등주의에 매몰된 교육정책이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며 대학의 학생 선발 자율화 등 우파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명박도 수능등급제 폐지와 대학입시 완전 자율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수능등급제라는 구상 자체가 지금의 혼란과 부작용을 낳은 게 아니다. 진보적 교육단체들이 2004년에 ‘수능 5등급제’를 제안한 것은 0.1점 차이로 당락을 결정하는 치열한 입시지옥을 완화해 황폐화된 교육을 되살리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보수 언론과 주요 대학 당국 등은 “변형된 대학평준화”라며 게거품을 물고 등급제를 반대하다가 결국 수능 15등급제를 요구했다. 우파의 압력에 타협한 노무현 정부는 9등급제 도입으로 후퇴했다. 진보적 단체들의 애초 요구보다 등급이 세분화돼 입시 경쟁을 완화한다는 취지가 사라진 껍데기뿐인 등급제가 된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는 ‘수능에 변별력이 없으면 본고사를 막을 수 없다’며 1등급을 7퍼센트로 하자는 보충안마저 거부하고 4퍼센트로 결정했다. 결국 누더기가 된 수능등급제가 입시지옥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예상됐던 일이다.(격주간 〈다함께〉 42호 ‘기만적인 대입제도개선안’ 기사를 참고하시오.)

이번 수능 결과에서 보듯, 언어·수리·외국어·탐구 등 4개 영역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학생은 전국에서 6백44명밖에 안 될 정도로 9등급제 수능의 ‘변별력’은 아주 높았다. 높은 변별력은 치열한 입시경쟁을 뜻한다.

누더기

보수 언론들은 수능등급제를 흠집내려고 “등급제는 ‘불공정’하다”는 부당한 비난까지 하고 있다.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바뀌는 것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결국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지 못하면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대학에서 A부터 F까지 등급으로 학점을 주는 제도도 ‘불공정’한 것이다. 게다가 우익들은 대학의 선발 자율권을 주장하며 ‘3불 폐지’(대학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허용)를 요구하는데, 고교등급제나 기여입학제야말로 강남의 부유층 학생이나 특목고 출신 학생에게 특혜를 주는 ‘불공정’ 제도다.

또, 우익들은 “무슨 과목 성적으로 당락을 결정하는지, 가중치를 무슨 과목에 더 주는 지도 대학마다 계열마다 다르다”며 수능등급제를 탓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은 주요 대학들이 내신을 무력화하려고 수능 점수에 복잡한 가산점을 주는 등 ‘자율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 수능등급제 때문이 아니다.

주요 대학들이 자율권을 갖고 있는 편입학 시험에서 은밀히 기여입학제가 시행됐다는 것이 최근 드러난 데서 보듯이, 대학이 완전한 자율권을 얻는다면 온갖 비리가 제도화될 것이다. 이를 통해 부자들은 손쉽게 명문대학에 진학하겠지만, 가난한 학생들은 더 치열한 입시경쟁에 시달리면서도 명문대 진학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사교육비 부담도 전혀 줄지 않을 것이다.

현행 수능등급제의 실패는 어지간한 개혁도 효과를 낼 수 없을 만큼 입시경쟁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보여 줬다. 또, 노무현이 “그 학교들의 힘이 세긴 세더라. … 국립대학 공동학위제는 꺼내보지도 못했다”고 말한 것처럼 미미한 껍데기 개혁마저 우익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는 점도 보여 줬다.

한편, 전교조 등 진보적 교육단체 일부가 우익의 공격에 반발해 현행 수능등급제를 옹호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노무현 정부의 기만적인 수능등급제가 실패한 만큼 더 진보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데 말이다.

물론 수능등급제의 등급수를 줄이는 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수능이 5등급제가 되고 입시가 내신 위주로 바뀌더라도 대학서열체제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내신 점수를 따기 위한 사교육이 번창할 것이고 학생들의 입시 부담도 별로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대학입학자격고사를 도입하고 즉각적인 대학평준화를 추진해야만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과 학생들의 입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우익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대중 투쟁이 필요하다. 이런 투쟁은 경쟁과 이윤의 논리와 체제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교육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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