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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와 쿠바

지난주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직에서 사임한 피델 카스트로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들 중 한 명이다.

거의 50년 동안 카스트로는 강대국 미국의 의사를 거슬렀고, 쿠바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미국의 경제 제재에 맞서 살아남았다. 쿠바는 수많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반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쿠바는 다른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쿠바는 냉전 시대 옛 소련과 동맹 관계에 있던 국가들 가운데 1990년대 초 소련 블록 붕괴를 이겨낸 극소수 국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카스트로의 사임에 대한 반응에서도 이 점을 볼 수 있었다. 언론들은 쿠바가 현재의 정치적·경제적 길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카스트로의 사임과 함께 변화가 올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지난 50년 동안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여긴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카스트로의 쿠바를 찬양해 왔다. 그러나 쿠바는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원래 카스트로는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카스트로는 쿠바의 포퓰리즘적 민족주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정통주의당[1947년 창당된 쿠바 민족주의 정당]의 당원이었다. 카스트로를 비롯한 이 당의 청년 당원들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동안 미국이 지원하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의 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급진화했다.

카스트로는 무장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1953년 카스트로는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 소재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다. 이것은 무모한 행동이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카스트로가 이끈 게릴라 단체 ‘7·26운동’은 다른 반(反)바티스타 단체들처럼 잔혹하게 탄압당했다. 카스트로는 법정에서 감동적인 변호 연설을 했지만 투옥됐고 나중에 멕시코로 추방됐다.

쿠바 망명객들은 망명지에서 또 다른 공격을 계획했고 군사 훈련을 했다. 나중에 아르헨티나 출신 순회 의사인 에르네스토 체게바라가 여기에 동참했고, 그들은 1956년에 고작 수십 명의 병력으로 쿠바를 침공했다.

이 게릴라군은 산으로 들어갔지만, 7·26운동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사보타지[파괴공작], 암살, 선동을 통해 저항했다.

그러나 도시에서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 이 운동의 축은 점점 게릴라전으로 옮겨갔다. 특히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게릴라 전략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곧 바티스타에 맞서는 급진 반정부파들 사이에서 지배적 세력이 됐다.

게릴라

1958년 말에 이르러 대중적 불만이 크게 고조되면서 당황한 미국 후원자들은 바티스타를 내버렸다. 카스트로의 군대가 산에서 내려와 도시들을 포위하자 쿠바 군대는 게릴라들과 싸우기를 거부했고 와해돼 버렸다.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는 쿠바를 떠났다. 카스트로의 군대는 의기양양하게 수도 아바나로 진입했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승리한 이유는 게릴라 전략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후에 ‘쿠바 모델’을 확산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두 재앙으로 끝났다.

당시에 카스트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애써 강조했다.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이 적색이 아니라 황록색(게릴라 위장복의 색깔)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카스트로가 소련과 가까워진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 때문이었고, 그 후로 미국 정부에게 카스트로는 눈엣가시였다.

물론 당시 쿠바 대중은 게릴라 군대를 지지했고, 이 군대가 위로부터 건설한 국가 기구도 지지했다. 그러나 7·26운동은 토지 점거를 비난하고 노동조합을 철저히 통제하는 등 조심스런 행보를 했다.

그 정부는 ‘민중의 정부’가 아니라 ‘민중을 위한 정부’였다. 정치 권력은 7·26운동의 수중에 있었다. 7·26운동은 강철 같은 규율과 위계를 강조했는데, 이런 조직 방식은 이 운동이 비밀 군사조직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비록 쿠바 민중은 1959년 혁명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지 못했지만, 초기 카스트로 정부는 의료, 교육, 문맹, 실업 문제 등에서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다.

쿠바의 부자들은 이런 개혁들을 참을 수 없었고, 미국 플로리다의 마이애미로 도망갔다. 그들은 미국이 곧 카스트로를 몰아내 자신들이 쿠바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 신생 쿠바 정부를 승인했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바티스타가 쫓겨난 것은 아쉽지 않았지만, 코앞에 있는 정부가 미국 자본가들의 이익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두고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들은 쿠바에서 사용되는 석유의 정제를 거부했다. 쿠바 정부는 이 기업들을 국유화했고, 다른 쿠바 기업들도 곧 국유화했다.

1961년 CIA가 지원한 피그만(灣) 침략은 실패했고,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더 굳건해졌다. 미국 정부의 사주를 받아 시작된 미국 기업들의 경제 보이콧은 나중에 완전한 경제 제재로 확대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카스트로는 냉전 시대 전 세계 모든 국가 지도자들이 택한 길을 따랐다. 즉, 그는 하나의 초강대국이 자신을 위협하자 다른 초강대국인 소련에게 접근했다. 그러면서 카스트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이고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카스트로의 움직임을 환영했다. 미주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할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바에 대한 소련의 ‘의무’는 철저히 소련의 이익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쿠바와 소련의 이익이 충돌하면 쿠바가 일방으로 양보해야 했다. 많은 쿠바 지도자들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종결시킨 미국과 소련 정부 사이의 협상에서 쿠바가 무시당했다고 느꼈다.

의존

카스트로의 동료 지도자들 사이에서 쿠바 경제가 나아갈 방향과 구조에 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이르면 이 논쟁은 종결됐다. 쿠바는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에 의존해야 했다.

쿠바는 경제 다변화 계획을 포기하고 전통적 수출 상품 ― 특히 사탕수수 ― 에 다시 의존하게 됐다. 쿠바는 소련의 공식 위성국가가 됐다. 심지어 아프리카 몇몇 곳에서 소련 대신 대리전을 치르기도 했는데, 어떤 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공산당 지도자들의 비교적 높은 생활수준과 그들만을 위한 시설 등 공산당 일당 국가에 존재하는 특징들이 모두 쿠바에서도 나타났다. 그럼에도 과거 독재 정권의 만행과 1960년대 초반 개혁 조처들을 기억하는 쿠바 민중은 여전히 카스트로 정권을 방어하고 지지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쿠바는 경제·정치 위기에 빠졌다. 쿠바인들은 쿠바 경제 구조가 변화하고 쿠바가 세계시장의 경쟁에 노출되면서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다.

관광업 같은 특정 산업은 호황을 누렸지만, 다른 산업들은 그러지 못했다. 또, 관광업으로 일부 쿠바인들은 외환을 얻을 수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러지 못했다. 사회 불평등이 심해졌고, 많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하락했다. 오늘날 쿠바 경제는 이른바 ‘사회주의 천국’과 한참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암시장이 번성하고 관광업과 연관돼 성매매 행위가 광범하게 벌어지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쿠바를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쿠바가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쿠바 같은 정권들은 ‘위로부터’ 다양한 진보적 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대체할 수도 없다.

수많은 위기와 모순을 겪고 카스트로 정권은 살아남았다. 쿠바 체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이것이 정권의 생존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카스트로 정권의 안정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카스트로가 진정한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인들은 막강한 미국의 온갖 공세를 이겨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의 저항 ― 비록 아직 개별적이거나 소규모인 저항에 한정돼 있지만 ― 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령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 익숙한 이 위계적 정권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카스트로의 쿠바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한때 식민지적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대표했지만, 이제는 작은 섬이 세계시장의 규칙을 거스르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 주고 있다.

카스트로와 그 동료들은 한때 대중적 지지를 받는 ― 대중이 능동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 혁명을 일으켰지만, 이제는 권위주의적으로 통제하는 정체된 관료들이 됐다.

쿠바의 현 지배자들이 1990년대 경제 이행기를 감독했다. 일부는 중국과 가까워지고 싶어하고, 다른 자들은 유럽을 우방으로 보고 있다.

쿠바 정권이 추구하는 또 다른 전략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등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경제들과 무역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여전히 주권과 자주의 상징이다. 문제는 카스트로의 후계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길을 고수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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