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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

4월 10일 오전 10시 남북 당국은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동시에 발표했다. 여론 조사 결과 국민의 90%가 정상회담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상회담에 기대를 거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90년대 들어서만 두 차례나 전쟁 위기를 겪은 나라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평화 정착을 열망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런 일이다.

이런 마당에 안보를 들먹이며 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측 요구를 얼마나 들어 줬는지 밝히라는 냉전주의적 주장은 소름이 끼칠 따름이다. 자유민주민족회의 이철승은 “우리 경제와 안보 사태가 해체 직전에 있음에도 천문학적인 경제 지원을 뇌물로 바쳐 정상회담을 구걸하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로 국민 앞에 소상히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민국당을 비롯한 보수 야당들도 비록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엇비슷한 논평을 내놓았다. 이들은 진정한 평화 정착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들이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들어 총알받이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북한 위협’을 앞세운 정치적·시민적 권리의 억압도 바라지 않는다. 사회의 진정한 변화를 원하는 사람치고 이런 심정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북의 정상이 만나면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한총련 학생들도 “남북의 반목과 대결을 극복하고 … 민족화해와 조국통일의 전환적 계기”가 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남북 정상회담을 적극 환영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정략적 이용

지난 반세기 내내 팽팽한 긴장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었지만 남북 사이에 당국자간 회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북간 대화, 특히 정상회담은 역대 모든 정권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것은 정통성 없는 독재 정권들의 위신을 세워 줄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남북간 평화 무드는 전쟁 위협 못지 않게 남북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뒤 곧 냉기류로 이어지곤 했다.

대표적인 예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들 수 있다. 최근에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받들자”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을 천명한 뜻깊은 성명으로 알려져 있는 7·4 남북공동성명은 사기극에 불과했다.

1972년에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이 성명은 1971년에 미국이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국과 비공식 동맹을 맺으면서 형성된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 간첩 잡는 중앙정보부 (안기부의 전신) 부장 이후락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고, 이어서 북한 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를 만났다. 〈한겨레〉 논설위원 이원섭 씨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분단 장벽이 허물어지고 민족자결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지리라는 벅찬 희망이 한때 감돌았다.” 7·4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세 차례나 열렸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해 10월 남북 대화 무드가 절정에 이른 시점을 택해 그리고 민주화 운동 세력이 반신반의하며 평화 무드에 취해 있는 틈을 타서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 자체를 없애고 영구 집권의 길을 닦는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박정희에 따르면 유신헌법은 “남북 대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체제 정비”였다. 북한에서도 흡사한 일이 벌어졌다. 북한도 헌법을 새로 제정하고 국가권력을 주석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최고인민회의에서도 소환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지위와 권한을 갖는” 주석 지위에 올랐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뒤 채 4년도 되지 않아 한반도는 전운에 휩싸였다. 1976년 ‘도끼 만행사건’으로 알려진 판문점 미군 병사 피살 사건이 벌어지자 북한 인민군은 전투태세에 들어갔고, 주한미군은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해 핵항모, 전폭기 등을 증파했던 것이다. 전운 속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은 질식해 갔고 북쪽에서도 김정일 후계체제에 대한 비판이 사그러들었다.

휴지 조각이 된 남북기본합의서

남북의 정권이 남북 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사례는 이 밖에도 무수히 많지만1),남북간 평화 무드가 한냉 기류로 급속히 바뀌곤 했던 이유가 남북 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남북 정권의 술수 때문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남북 정권은 제국주의 세계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그것을 정권에 유리하게 이용하는 등의 운신의 폭을 정할 수 있었다.

이 점을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남북기본합의서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냉전 해체의 분위기 속에서 채택됐다. 노태우가 1988년 “북한이 미국, 일본 등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7·7선언을 발표한 이래 남북간 접촉이 계속 이어지다가 1990년 9월 4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고위급회담이 성사됐다. 남북고위급회담은 남북의 총리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2년 동안이나 8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채택된 것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1991. 12. 13. 이하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1991. 12. 31. 이하 비핵화선언)이었다.

1990 ∼ 91년 동안 남북통일축구팀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경기를 벌였고, 북한 정무원 부총리 김달현이 남한 산업시설 곳곳을 둘러보고 다녔다. 정주영과 김우중도 북한을 방문해 경협을 논의했다. 금강산 관광 개발이 확정된 것도 이 때였다. 한반도에 평화가 무르익은 듯했다. (물론 통일운동·학생운동 세력은 이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막상 1993 ∼ 1994년에 고조된 한반도 긴장과 전쟁 위기 앞에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1994년 5월 26일 미 국방장관 페리가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를 한반도 주변 해역에 출동하도록 명령하고, 6월 16일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과 주한 미대사 제임스 레이니가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 철수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는 등 작전 명령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그것은 글자 그대로 쓸모 없는 종이 조각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완연한 듯했던 남북간 평화 무드는 왜 점차 냉기류로 변하게 됐을까? 이것은 냉전 해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및 제국주의 세계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살펴봐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냉전 해체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평화의 개막이 아니었다.

1992년부터 미국은 IAEA (국제원자력기구)를 사주해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으로까지 몰아갔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 여부는 순전한 꼬투리였을 뿐(미국은 자기 우방에게는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지원까지 해왔다) 미국은 그 전부터 북한을 타겟으로 삼고 있었다. 1991년 걸프전이 끝난 뒤 당시 미 합참의장 콜린 파월은 “순찰중인 경찰[미국]이 다음번 임무를 수행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좀더 골똘히 생각해 보시오. 대적할 악마가 사라졌소. 나는 이제 카스트로와 김일성에게 가볼 생각이오.”

걸프 전쟁이 냉전 해체 이후 미국의 세계적인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세계의 지배자들 (특히 미국의 지위를 넘보고 있는 일본과 독일 지배자들)에게 재천명하는 수단이었듯이, 북한은 동아시아판 이라크로서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재천명할 수단이었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후 동아시아에서 자신을 대체할 패권국이 등장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동아시아에 불안정 요인을 제공할 수 있는 북한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은 미국 [의 군사력] 뿐임을 보여 줌으로써 특히 경제적 경쟁자인 일본이 미국의 날개 아래로 조용히 들어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불안정한 세계 정세

올해 6월로 예정돼 있는 남북 정상회담의 운명도 전에 열렸던 여러 회담들과 근본에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항구적 평화 체제를 정착시키지 못한 채 여러 모순을 드러내면서 별볼일없는 것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첫째, 남북 관계는 불안정한 세계 정세와 동아시아 정세에 연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의 남북 정상회담 합의는 지난해 하반기 이래 시작된 북미간 유화 국면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이 유화국면은 1998년 상반기부터 약 1년 반 동안의 험악한 긴장 고조 국면 뒤에 찾아왔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북한에 대해 군사적 제재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이 신문 지상에 공공연히 실렸고 서해교전을 비롯해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기가 한반도를 감싸고 있었다. 1990년대 들어 두 번째 겪는 전쟁 위기였다.

긴장이 완화되는 쪽으로 사태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 일본이 미국의 전역미사일방위체제 (TMD) 참여를 확정한 때부터인 듯하다. 이제 미국은 전역미사일방위체제(TMD) 덕분에 일본의 안보가 미국에 달려 있음을 손쉽게 일본인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게 됐다. 아마도 이것은 미국이 지난 몇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거둔 가장 만족스러운 성과일 것이다. 그 뒤 북미 고위급회담이 타결되고 대북제재 완화가 발표되는 등 유화 기류가 흘러 왔다.

그러나 이 유화 국면은 매우 불안정하다. TMD는 삐거덕거려 왔던 미일 동맹을 다지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재확인하는 것인 동시에 장차 중국·러시아와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 나토 전쟁은 러시아와 중국의 군비 증강을 자극했고 상호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됐다. 동아시아는 불안정 요소가 산적해 있는 지역이다. 최근에 주목받는 양안 (중국과 대만) 관계는 동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넣을 수도 있는 발화점의 하나 일 뿐이다.

둘째,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와 미사일 등을 빌미로 북한을 압박해 왔던 미국의 동의 아래서만 남북한 합의의 폭이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김대중이 미국의 도움 없이 남북대화를 성사시켰다 해서 “민족문제를 남북이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라며 추켜세웠다. 그러나 남북간 협상이 미국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얼마 전 미 국무부는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주한미군 지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주한미군 위상에 관한 아무런 변화 계획이 없다”고 주한미군 문제가 의제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미국은 대량살상무기와 … 핵확산문제를 가장 우려하고 있다”고 사실상 의제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정부는 어떻게 했는가? 김대중 정부의 외교통상부장관과 국방장관은 주한미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을 만나 “정상회담에 따른 협조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한총련 학생들은 “남북 정상회담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공동 이익을 위해 진행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김대중에게 미국의 이익을 거슬러 행동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김대중은 1998년 인공위성 발사와 금창리 지하시설을 빌미로 한 대북 압박에서부터 미국과 한편이었고, 지금껏 대북 압박을 위한 한·미·일 공조를 거부해 본 적이 없었다.

김대중 정부의 위선

셋째, 김대중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과 국내정치 사이의 모순에 봉착해 우왕좌왕, 좌충우돌할 것이다. 벌써부터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상호주의냐 아니냐 등의 해묵은 대립점들이 불거지고 있다.

김대중은 남북 정상회담이 국내 정치에서 역효과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 비전향 장기수 북송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했다가 사임당한 민주당 정책위원장 이재정의 사례는 우리에게 정상회담의 효과가 얼마나 보잘것없을지를 미리 보여 주고 있다.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 같은 우익 언론인은 비전향 장기수 북송과 공안사범 사면·복권을 거론하는 “너무 앞서 나가는 증후군”이 회담을 망치지 않도록 단속하라고 여권을 은근히 압박하고 있다.

남북 지배자들의 정상회담은 순전한 위선이다. 김대중이 북한에 ‘잠입, 찬양·고무’할 것이 뻔한 마당에 국가보안법은 버젓이 살아 학생과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있고, 김대중은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쓴 김정일을 만나 포옹을 하겠지만 한총련 탄압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발표되기 하루 전 날에 한총련 대의원대회는 원천 봉쇄돼 학생들이 다치고 연행됐고,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자동차 4사 파업 지도부에게는 수배가 떨어졌다.

더 나아가 김대중은 남북 정상회담 분위기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김대중은 4월 24일 영수회담에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초당적·범국민적 지원을 호소하며 “집단 이기주의 근절“을 주장한 바로 다음 날 대우 자동차에 경찰을 투입해 노조 집행부를 연행해 갔다.

위선이기는 김정일을 포함한 북한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남한과 교류·협력하겠다는 마당에 자유왕래를 원천 봉쇄하고 그저 식량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탈북자를 처벌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북한 통치자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을 회담 제안과 결렬을 위한 명분용으로만 사용해 왔다는 것은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전제 조건 수락 없이도 남북 당국자간 회담이 수십 차례 넘게 진행됐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남과 북의 통치자들이 손잡는 동안 통일을 위해 싸워 왔던 사람들은 찬밥 신세가 되곤 했다. 1990년 범민족대회가 정부 탄압으로 무산된 뒤 불과 며칠 만에 남북 총리회담이 성사됐고, 남북의 국가 관료와 기업인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융성한 만찬을 즐길 때 통일운동가들은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살이를 하곤 했다.

남북 정상들이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여 남겨놓고도 300km 미사일 보유를 허가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한반도 평화 정착을 기대하는 것은 숫소에게 젖을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국가간 경제적·군사적 경쟁에 몰두하며 군비 증강에 여념이 없는 통치자들에게서 독립한 노동자 운동이 필요하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위해 대북 압박을 계속해 온 미국의 영향력을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통치자들 사이의 협정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힘이다.

1) 남북 지배자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남북 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1996년 4·11총선에서 여권에 유리하게 작용하게끔 남북이 합동해 조작한 판문점 총격 사건은 이른바 ‘짜고 친 고스톱’의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이런 사례를 더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원섭, 《새로운 모색》, 한겨레신문사.

정상모, 《새로운 세기를 위하여 ― 남과 북, 그 공생의 비밀》, 한겨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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