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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와 계급투쟁 (Ⅳ) ─ 2001년 아르헨티나 공황:
미친 체제의 대안을 힐끗 보여 준 아르헨티나 항쟁

2001년 말 아르헨티나에서 금융 위기로 촉발된 경제 공황이 발생했다. 직접적 원인은 미국의 IT 거품 붕괴가 낳은 충격이었다. 아르헨티나는 1천3백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대외 부채를 지고 있었고 1990년대 신자유주의 탈규제 정책으로 외부 충격에 취약한 상태였다.

원래 1990년대 아르헨티나는 IMF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모델이었다. 아르헨티나 재무장관은 전 세계를 순회하며 사유화, 노동유연화가 경제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강연했다. 그러나 공황이 닥치자 지배자들이 찬양한 체제의 모순이 만천하에 폭로됐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낙농업국이자 식량 수출 국가였지만, 사람들은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공장 가동이 돌연 중단됐고, 멀쩡한 원자재에는 먼지만 쌓였다. 노동자들은 일하고 싶은 생각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지만 갑자기 오늘부터 일할 수가 없었다. 중간계급 다수도 생계가 막막해졌다.

탈규제와 사유화를 노래한 모든 기성 정치 세력들이 환멸의 대상이 됐고 대중은 빠른 속도로 급진화했다. 거리 시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호는 “모두 꺼져라”였고, 한 의사가 토론회에서 “모든 은행과 석유 기업을 (보상 없이)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폭발적인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모두 꺼져라”

분노한 대중은 12월 19~20일 유혈 사태를 낳은 정부의 강경 진압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벌여 결국 델라루아 대통령 정부를 몰아냈다. 그 뒤로 한 달 동안 대통령이 3번이나 교체되는 폭발적 투쟁이 벌어졌다.

이런 엄청난 대중운동의 원동력은 세 방향에서 나왔다.

먼저, 1990년대 중반 탄생한 실업자 운동인 ‘피케테로스’가 있었다. 공황 이후 실업률이 순식간에 25퍼센트로 치솟으면서 이들의 가두시위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피케테로스는 전국 주요 도로를 봉쇄하고 싸우면서 분노한 대중에게 투쟁의 초점을 제공하는 구실을 했다.

또 다른 움직임은 공장점거 운동이었다. 2001년 말 위기를 전후로 많은 공장이 부채를 갚을 수 없어 문을 닫았고, 일부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했다. 이 운동이 정점에 달한 2001년 12월에는 2백여 개의 공장들을 노동자들이 운영했다. 비록 접수된 기업들이 아르헨티나 경제 규모의 0.7퍼센트에 그치고 대부분 고정자본이 낡은 중소기업들이었지만, 이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했다.

이 운동은 삶보다 사적 재산과 이윤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에 도전했고, 노동자들이 기업주와 관리자 없이도 얼마든지 민주적으로 생산을 조직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원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이었지만, 곧 먹을 것도, 일자리도 보장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본주의를 대신할 사회의 맹아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가 됐다.

셋째는 ‘주민위원회’였다. 이것은 주거지에 기반을 둔 대중 모임으로 2001년 말~2002년 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1백여 개 이상 존재했다. 이 모임의 일차적 목표는 물물교환을 포함해 당장의 고통을 줄일 방편들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경우에는 실업자, 공장점거 노동자, 빈털터리가 된 중간계급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공동의 저항을 계획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민위원회의 논의에 관심을 기울였고, 2002년 초 한 여론조사를 보면, 주민위원회에 대한 지지는 50퍼센트를 넘었다. 심지어 이 모임을 실황 중계한 TV 프로그램이 시청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 앞에서 당시 아르헨티나 주류 언론들은 “혁명 직전 상황”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고, 정부·사장과 IMF를 위시한 국제 자본은 해결책은커녕, 외채 상환 문제를 놓고 서로 다투면서 위기를 심화시켰다. 무능한 체제를 대신할 대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온갖 재료들이 갖춰졌고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곧 일어날 것 같았다.

혁명 직전

그러나 당시 반란에는 이 재료들을 결합시켜 혁명으로 발전시킬 힘을 가질 사회세력 ─ 노동계급 ─ 의 참가가 저조했다. 물론 피케테로스 시위 대열에서, 주민위원회에서,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모임에서 노동조합원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은 상대적 소수였다.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벌여 피케테로스 운동에 대한 지배자들의 공격을 무력화하고, 공장점거 운동을 주요 대형 작업장들로 확대해 대안적 생산 체제의 틀을 만들고, 이 틀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진정한 대안 권력으로 주민위원회를 발전시키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체제를 지양한 대안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기업이 도산하고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모습을 보면서 위축됐다. 그래도 불만은 광범했고, 일부 노동자들은 저항에 결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대형 노동조합연맹 지도자들이 조합원들의 운동 참가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지도자들은 노동계급과 ‘산업자본’ 간 계급협조주의 ─ 페론주의 ─ 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금융자본’이 초래한 경제 위기의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불행히도 아르헨티나 좌파들은 노조 지도자에 도전하고 노동자들을 획득하는 활동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좌파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지만 좌파들은 공동전선 활동을 통해 다양한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을 연결시키며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보다는 다른 좌파 조직을 공격 ─ 때로는 물리적으로 ─ 하는 데 더 열심이었다.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한 피케테로스 운동 내 자율주의자들도 대안적 정치를 보여 주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정치 정당을 거부하며 다른 좌파들과 협력을 배제했고, 특히 노동조합원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보수적 노조 지도자들은 다수 노동자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2003년 노조 지도자들의 지지를 업고 페론주의의 부활을 내건 구체제 인사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에 당선해 상황을 ‘정상화’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는 2003년부터 연평균 8퍼센트 이상 성장했지만 이것은 계급협조주의 때문이 아니라 중국 경제의 호황으로 원재료 수출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2007년 노동자들의 임금은 2001년보다 30퍼센트가량 낮았다.

일자리 창출에도 실패해 2007년 말 실업률이 15퍼센트나 됐다. 반면 기업의 연평균 이윤증가율은 절정에 달했을 때 77퍼센트(2005년)였다. 이것은 체제 내에서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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