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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밤 10시부터 14일 새벽 4시까지:
국민은행 농성 숨막히는 16시간(2)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의 국민은행 노조 지지 방문자들 25명은 13일 오후 8시경 국민은행 본점에 도착했다. 본점에 도착하기 직전 국민은행 본점 취재중이던 동지로부터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노조 위원장이 은행장과의 협상 결과를 발표하자 조합원들이 빗발치는 항의성 질문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본점 앞에 도착하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은행 노동자들이 로비와 건물 밖에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본점 건물 입구 유리 문에 씌어진 빨간 스프레이 글씨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금감원의 개 김상훈은 자폭하라"

우리 25명의 지지 방문자들은 7층 상황을 알려 주기 위해 내려오고 있는 한 동지를 기다리며 1층 로비에서 배너 2개와 팻말을 들고 있었다. 잠시 후 노동자들이 7층에 발딛을 틈이 없다며 1층 매장으로 농성 장소를 옮겼다.

8시 30분경, 재빨리 1층 매장으로 갔지만 이미 꽉 차서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2천은 좋이 돼 보였다. 매장으로 들어오지 못해 로비와 6층과 7층, 그리고 건물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3천은 넘을 것이라고들 했다. 우리는 잘 보일 만한 곳에 배너 두 개를 세우고 계단 쪽에 팻말을 들고 섰다. 노동자들은 "국민은행 노동자들의 합병 반대 투쟁을 지지합니다"라고 씌인 큼직한 배너를 흐뭇하게 쳐다 봤다.

국민은행 노조 지지 방문자들은 이 때부터 새벽 4시까지 농성장을 지켰다. 이 글은 주로 13일 본점 농성 10시 이후 상황을 다루고 있다.

합병 논의 중단, 그러나 성에 안 찬 노동자들

10시쯤 됐을 때 7층은 은행장실에 들어간 위원장을 기다리는 노동자들로 어느 때보다도 빼곡했다. 은행장실에 들어간 노조 위원장은 함흥차사였고 노동자들의 흥분은 더해만 갔다. 한 조합원은 "위원장이 우리 목을 치면 죽여!" 하고 절규했다. 7층에 모인 노동자들의 표정에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갑자기 한 노조 간부가 "불 났어! 모두 피해" 하고 소리쳤고, 놀란 조합원들은 비상구로 피하려 했다. 한 노동자가 분신 자살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7층은 신나 냄새로 진동했지만 다행히 불이 붙지는 않았다.

11시경 노조 위원장이 은행장실 밖으로 나와 '주택은행과 합병 논의에 합의한 바 없다'는 내용의 은행장 친필 사인 문건을 발표했다. 하지만 채 몇 줄을 읽지도 못한 상태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조합원들은 "뭐야? 그걸 믿으라고?", "은행장 데리고 나와", "은행장이 나와서 직접 얘기하라고 해." 하고 화가 나서 말했다. 은행장과 노조 위원장은 다시 쫓기듯이 은행장실로 밀려 들어갔다.

자정이 가까웠을 때, 은행장이 노조 위원장과 함께 문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행장 김상훈은 "합병 논의를 일단 중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일단'이 얼마 동안이냐?", "합병 자체를 취소해라"하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7층 은행장실 앞과 로비는 후끈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성난 조합원들의 고함이 여기저기서 터졌고, 발 디딜 틈도 없는 탓에 조합원들의 와이셔츠는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됐다. 1층 매장에 있는 조합원들도 마음은 7층에 가 있었다. 너무 비좁아 다 들어가지 못해서 1층 매장에 내려와 있을 뿐이었다.

합의문 발표 소식이 곧 1층에도 전해졌다. 처음엔 일부 조합원들이 박수를 쳤다. 그런데 한 조합원이 앞에 나가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합병 논의 중단이 아니라 합병 취소다. 합병 논의를 중단하겠다는 것은 우리를 속이려는 술책이다." 하고 정확히 지적했고 큰 박수를 받았다. 합병 논의를 중단한다고 말해 노동자들을 안심시켜 놓고 실제로는 합병을 추진하려는 의도를 꿰뚫어 본 것이다. "7층으로 올라가자" 하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동시에 상당수가 7층으로 이동했다.

1층 매장에서 발언하는 조합 간부들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웠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조합원들의 성난 반발과 야유에 부딪혔다. "합병 중단이 아니라 합병 취소와 은행장 퇴진이 우리의 요구다" 하고 말해야 환호를 받을 수 있었다.

조합 간부들은 가끔 한 명씩 나와 별 진전도 없는 상황을 보고하고 계속 "기다려 달라"고만 말했다. 계속 시간이 흘렀지만 노동조합 지도부는 프로그램을 전혀 진행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매장 밖에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성이는 조합원들이 늘어났다. '시간 끌어 김빼기'라는 사용자와 정부측의 단골 메뉴가 이용되고 있었다.

시간 끌기

노조 대구 지부장은 시간 끌기에 끌려다닌 노조 지도부의 책임을 엉뚱하게도 조합원들의 의지가 부족한 탓으로 돌리려 했다. "처음에는 매장이 꽉 차고 '총파업'을 연호하고 위원장을 야유하고 몰아붙이더니, 지금은 자리가 뻥 뚫렸다. 조합원들이 밖에 많이 있기나 하나? 파업까지 불사하겠다던 사람들은 어디 있는가?"

그랬더니 한 여성 조합원은 '지금 누구를 탓하려 드느냐. 당신이 그렇게 말하려는 속셈을 다 안다'는 투로 이렇게 소리쳤다. "밖에 많이 있어요, 많이 있어." 여기저기서 "많다, 많다" 하는 말이 터져나왔다. 대구 지부장은 금세 뉘앙스를 바꿔 "밖에 많이 있다. 밖에 있거나 주변에 서 있지 말고 안쪽으로 와서 앉아 달라."고 얼버무렸다.

처음에 금세 꼬리를 내렸지만 그 뒤에도 여러 간부들이 흩어지는 조합원들을 탓하며 '그러면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간부들이 가끔씩 나와서 7층 상황을 보고하는 내용과 말투는 결코 의지를 갖고 남아 있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아 있을 마음이 싹 가시게 만드는 것이었다. "7층 상황은 아직도 아무 발표가 없었고 발표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협상에 목숨을 거는 말만 하니 누가 투지를 다지며 남아 있고 싶겠는가.

일부 조합원들은 "시간만 끌겠지. 기다려 봤자 파업에 들어가겠어?" 하며 자리를 떴다. 또, 일부 조합원들은 꼬박 밤을 새고는 다음 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스러워하며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이것이 투쟁 의지가 부족함을 보여 주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출근 걱정 때문에 자정경에 자리를 뜬 한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 안 온 조합원들도 파업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 동참할 거다. 이런 데는 안 와도 점포 문 닫게 만들자는 분위기다. 그런데 노조 지도부는 투쟁을 이끌지는 않고 오히려 지금 파업에 들어가면 불법이라는 얘기만 하고 있다."

일부 조합원들이 밖을 서성이거나 자리를 떴지만 파장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분위기는 여전히 긴장되고 심각했다. 조합원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생각이었는지 누군가 나와 "남행 열차를 부르자"고 제안해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한 조합원이 뛰어나와 발언했다. "저들은 지금 합병을 철회하지는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우리가 왜 여기 모여 있는지 보여 줘야 한다. 지금이 남행열차 부를 땐가?" 이 조합원의 질타는 다시 한번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제시할 조직된 소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올바른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쉴새없이 나왔지만 그것이 행동의 조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연결

나는 주택은행에 지지 방문을 간 동지들에게 밤 12시경 연락을 했다. 주택은행은 국민은행과 합병 대상이므로 둘의 상황을 동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주택은행도 국민은행처럼 조합원들이 본점 매장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상태였다.

원래는 7시경 고대를 출발한 25명의 국민은행 지지 방문자들이 주택은행도 가려 했지만 빠져 나오기가 여의치 않았다. 노동자들은 우리의 지지 방문에 환호했고, 우리의 지지 발언도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옳소", "맞아, 맞아" 하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은행 구조조정은 경제를 살리지 못한다.", "경제 관료들이야말로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는 등의 발언은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두 명의 조합원은 우리의 팻말을 들고 높이 흔들어 대며 환호했다. 분위기가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고, 빨리 협상 결과가 나오거나 파업 결정이 내려지기를 노동자들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나올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한 끝에 우리는 고려대에서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과 토론중이던 학생 당원 동지들에게 지원을 호소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10시가 넘은 상황이어서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5∼7명 정도만이라도 주택은행 지지 방문 자원자를 받아 달라고 연락했다. 뜻밖에도 그리고 정말로 뿌듯하게도 21명의 동지가 주택은행 지지 방문자로 자원했다. 11시경 우리 중 두 명이 주택은행으로 갔다. 고대에서 출발한 동지들과 만나 함께 주택은행을 방문할 수 있도록 국민은행 상황을 잘 아는 취재기자 1명과 사진기자 1명을 보낸 것이다.

12시경 주택은행으로부터 온 소식은 학생 그룹 동지들이 매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는 것과 3∼4백 명의 노동자들이 매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 분위기가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차 끊길 시간이 지나 국민은행에는 10명 정도의 동지만이 남아 있었는데, 이 동지들은 몇시간째 팻말과 배너를 들고 있어 지칠 만도 한 상황이었다. 나는 동지들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주택은행 소식을 알려 주고 다녔는데 국민은행 노동자들은 이 소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 가까이 와서 귀동냥해 듣기도 하고, 아예 나를 잡고 "주택은행은 어떤 상황이라더냐"고 물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걸어오기도 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모두 방문한 결과 매우 소수의 노동자들에게나마 투쟁 소식을 연결해 준 셈이었다.

끓는 분노

새벽 1시경, 다시 7층 상황에 대해 노조 지도부의 상황 발표가 있었다. 내용인즉, 조합원들이 은행장실 점거를 시도했으나 7층 상황이 매우 어렵고, 은행장은 '합병 논의 중단' 이상은 안 된다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듣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중계동 대의원 한 명이 뛰어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물벼락을 맞은 듯 웃옷이 전부 젖어 있었고 싸움이라도 한바탕 벌인 것처럼 옷 매무새가 엉망인 데다 녹초가 돼 있었다. 그는 매우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7층에서 조합원들이 은행장실을 점거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노조 간부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노조 간부들이 조합원들을 극구 말리더라. 이경수 위원장은 아무 능력도 없는 은행장을 왜 지금껏 붙들고 있는가? 어제도 은행장하고 협상하다가 날이 다 샜다. 어제와 같은 잘못을 오늘 왜 또 거듭하는가? 은행장은 합병 의지에 대해서는 아무 변화가 없다고 한다. 이제 노조 위원장은 은행장을 뿌리치고 1층에 내려와야 한다. 1층에 내려와 조합원들과 파업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위원장이 여기 내려와서 자신 있게 투지를 밝혀야 할 상황에서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이경수 집행부는 지금 당장 김상훈과의 대화를 중단하고 합병 반대를 위해 싸우겠다고 밝혀라."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사회자는 "미안하다. 7층에 있는 조합원들이 잘하길 바랄 뿐이다"며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애썼다.

또 다른 조합원은 손을 들고 일어나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은행장만의 문제도 아니고 금감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김대중 정부 자체가 문제다. 김대중이 노벨평화상 받고 귀국할 때 공항에 나가 항의를 해야 한다. 노조 간부들은 왜 이런 생각도 못하는가?"

노조 위원장이 다시 은행장실로 들어간 지 3시간이 흘렀지만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성였다. 새벽 1시 35분, 7층 상황에 대한 노조 지도부의 보고가 있었다. "지금 조합원들이 문을 부수려고 하는 상황이다. 7층은 폭발 직전의 분위기다." 이 때 "가자, 7층에 가자"는 고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또다시 일부 조합원들이 7층으로 올라갔다. 노조 집행부는 그야말로 무사안일이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며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인덕원 지점의 한 조합원은 "정부는 생산성만 따진다. 그러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노동자들은 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새벽 1시 30분이 넘어 주택은행 지지 방문을 갔던 동지들이 속속 도착했다. 남아 있던 10명과 합쳐 우리 대열은 금세 30명으로 불어났다. 우리 동지들은 율동을 하고 조합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농성장을 지켰다.

7층에서 막 내려온 한 조합원이 마이크를 잡고 얘기했다. "잠시 전에 노조 위원장이 인터뷰를 했다. 금감원과 주택은행과 연락이 돼야 하는데 연락이 안 돼서 기다린다고 한다. 이 얼마나 한심한 얘기인가. 7층에 올라가서 상황을 직접 봐라. 너무 답답하다. 벌써 2시가 넘었다."

새벽이 깊어지면서 뭔가 빨리 결정해야 한다는 다급함이 조합원들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여성 조합원은 "동트기 전에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며 "지금 노조 집행부가 그걸 못 하겠다면 비상대책위 같은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 동지들이 대열을 지어 팻말을 들고 1층 매장 농성장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7층 상황을 알아 보기 위해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지도부에 대한 욕설이 튀어 나오고 "지금 도대체 몇 시간째냐"는 항의가 빗발쳤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땀냄새가 뒤범벅인 7층은 곧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듯한 분위기였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1층 매장 농성장에 있는 동지들로부터 대구 지부장이 우리에게 나가라고 요구한다는 전화가 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1층에 내려 가야 했다.

책임 전가

우리는 열흘 전 전력 노조 지도부로부터 나가 달라는 요구를 받고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 경험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조금 달랐다.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조합원들의 분위기였다. 6시간 동안 농성장을 지켜 봤던 나는 우리를 내쫓으려는 노조 간부에 맞서 평조합원들이 우리를 방어하리라고 확신했다. 여러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김밥과 캔커피 등 음식을 챙겨 주었고 배너도 함께 들어 줬다. 게다가 지난 7월 금융파업의 인연도 있지 않은가. 이미 노조 간부들의 위신은 땅에 완전히 추락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 가는 동안 철수 요구에 항의하고 거절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1층 매장에서 대구 지부장과 얘기를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이 그와 얘기를 했는데 그는 매우 거칠게 나왔다. 그는 내 얼굴 10센티쯤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고개라도 숙일 줄 알았던 모양이다. 15분 가량 계속된 언쟁은 대강 이랬다.

a(대구 지부장): 누가 오라고 했나?

b(우리): 노조 부위원장에게 지지 방문 오겠다고 말했고 허락을 받았다. 연대하러 온 것은 좋은 일 아닌가?

a: 이렇게 팻말까지 만들어 올 줄은 몰랐다. 당신들 완전히 선전하러 온 거 아닌가?

b: 우리가 써 온 문구 가운데 노조원들이 반대하는 거 있나? 노조도 은행 합병 반대하는 거 아닌가? 잘못된 주장 있나?

a: 그래도 당신들은 외부 세력이다. 지지한다는 좋은 취지로 왔다면 가라고 할 때 가라. 당신들은 민주노동당인데 여기는 한나라당, 민주당 지지하는 조합원들도 있다.

b: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은행 합병 반대하던가?

a: 조합원들이 외부 세력 끌어들였다고 문제 제기한다. 당신들이 팻말을 만들어 오니까 조합은 팻말도 안 만들고 뭐 하냐는 소리도 나온다. 그런 준비도 안 하고 왜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느냐고 불평한다.

b; 조합원들이 노조 간부들에게 불만 갖는 게 우리 탓인가? 우리가 투쟁에 해를 끼쳤는가? 외부 세력이라고 문제삼은 조합원들이 누군가? 차장 이상 아닌가?

a: 그게 누구든 당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b: 조합원들에게 우리가 연대하러 온 것을 좋게 생각하는지 아닌지 여기서 직접 묻고 그에 따를까?

a: 좋은 뜻에서 연대하러 왔으면 가라고 할 때 갈 일이지 왜 고집을 피우고 그러나?

b: 마치 우리 행동이 이 투쟁과 조합원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연대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a: 지금 노조 위원장과 간부들에 대한 신뢰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조금 있다가는 욕설이 오가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외부에 보이기 싫다. 빨리 나가라.

이 때쯤 대구 지부장이 언성도 높이고 목에 핏대도 세우는 바람에 무슨 일인가 궁금한 조합원과 우리 동지들이 모여 들었다. 처음에 무슨 일인지 몰라 듣기만 했던 조합원들은 우리를 비난하는 얘기를 노조 간부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를 변호해 주기 시작했다.

한 조합원은 "당신 집행부 맞아?" 하면서 따지다가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고, 몇 사람은 우리를 도닥거려 줬다. "내가 대신 사과하겠다. 정말 미안하다. 자기 일도 아닌데 여기 와서 지지해 주는 게 너무 고마웠는데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대신 사과한다. 마음 쓰지 말아라."

대구 지부장은, 우리를 변호해 그와 싸운 조합원들과 실랭이를 벌이다 가 버렸다. 그는 주변 조합원들의 시선이 분명 우리에게 기울어 있음을 느끼고 밀려서 빠져 버린 것이다. 그는 노조 집행부에 대한 신뢰가 실추하고 상황이 매우 험악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고 희생양을 삼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조합원들의 반발로 좌절됐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농성장을 뜰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팻말과 배너를 들고 계속 농성장을 지키기로 했다.

이 때 7층 상황이 매우 다급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급하게 7층에 올라가 보니, 조합원들이 몸으로 밀어 은행장실 문을 부숴 놓았다. 분위기는 한층 고조돼 있었다. 조합원들은 노조 위원장에게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빨리 나와. 지금 몇 시간째냐, 정말", "맞아 죽을까 봐 무섭냐?", "안 때릴께. 빨리 나와." 사람 하나 죽일 듯한 분노가 7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때 대구 지부장이 우리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는 연락이 왔다. 1층에 내려가 보니, "나의 생각이 짧았다. 상황이 워낙 어려웠다.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우리와 조합원들이 강력하게 항의한 덕분에 우리는 쫓겨나기는커녕 사과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14일 저녁에 류현숙 부위원장이 학생 그룹에 전화를 걸어 "이경수 노조 위원장의 요구다.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말했다. 조합원들의 항의를 받고 일단 물리쳤지만 몇 시간 지난 뒤에 태도가 다시 돌변한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내 투쟁을 고무하는 우리의 활동이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태도는 학생 그룹 연대를 환영하는 현장 조합원의 정서와 사뭇 다른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가

일촉즉발의 7층 상황을 전하기 위해 한 조합원이 나와서 발언을 했다. 그는 나에게 주택은행 상황을 유심히 물으며 지금 상황에서 노조 지도부가 미온적인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던 서소문 지점의 한 조합원이었다. 그는 "나도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미루고 미루면서 앞장서는 걸 피해 왔는데 이제는 앞장 서야겠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1층 매장에 있던 농성자들은 모두 7층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노조 위원장이 곧 은행장실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져 다시 모두 1층 농성장으로 돌아갔다.

위원장이 내려와 결정을 발표하겠다고 하자 1층 농성장에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조합원들은 파업 명령이 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기보다는 파업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 눈치였다.

노조 간부 한 명이 노조 위원장이 내려와 얘기할 때 조용히 하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조용히 하라는 건 왜 자꾸 강조해?", "지금 파업 선언해!", "왜 또 안 나와? 나오기가 그렇게 힘들어?", "우리가 무섭냐?" 하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위원장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모호하게 말했다.

"합병을 백지화하는 내용을 끌어 내지는 못했다. 노조와 차장단이 반대할 경우 합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파업은 아까 이미 결정된 것이다. 파업 방침과 지침을 정해서 알리겠다."

이것뿐이었다. 5시간을 기다린 조합원들에게 그가 한 말은 정말 이것뿐이었다. 한 조합원의 말대로 "10시 발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다". 조합원들은 "나, 참", "기가 막혀"를 연발했다. "정확한 내용을 말해라. 어떻게 할 거냐", "지금부터 명동성당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웅성거렸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노조 위원장은 그 말만 하고 13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조합원들은 "노조 위원장, 다시 나와" 하고 소리쳤다.

사회자는 "이 시간 이후 행동지침을 말하기 위해 사무실에 올라갔다고 이해하고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곧 야유와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뭘 또 기다려, 개새끼야.

"여기서 기다린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이게 뭐야, 도대체. 어용 노조 아니야? 이거 따라갔다간 큰일 나는 거 아냐?

"위원장 나와!

"나올 필요 없어, 사퇴해!"

결국 조합원들은 3시 10분부터 또 노조 위원장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3시 23분경에 조합원 몇 명이 위원장을 데려오려고 올라갔다. 우리를 쫓아내려 했던 대구 지부장은 노조 간부들이 차장단과 논의중이라며 "지금 파업을 선언해서 집행부가 구속되면 지도의 공백이 빚어진다"며 노조 집행부를 두둔했다.

노조 위원장은 3시 45분이 돼서야 다시 내려와 얘기를 시작했다.

"파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할 것으로 안다. 합병 문제는 급작스레 진행됐고 지난 3일간 급진전됐다. 오늘 은행장은 각서와 육성으로 선언을 했다. 은행장이 자존심을 꺾어 가면서까지 이렇게 했다. 합병 논의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든 다시 일어날 우려는 도사리고있다. 파업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파업 지도부를 준비해야 한다. 불법 파업이므로 지도부가 구속되면 2선 지도부도 있어야 한다. 합병 논의가 재개되는 즉시 파업에 돌입하도록 하겠다. 파업 돌입시 전조합원이 동참하도록 준비해 달라."

노조 위원장의 말이 끝나자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하며 한 여성 조합원이 일어났다. 그녀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지만 또박또박 논쟁을 벌였다.

조합원 1: 아까는 즉시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노조 위원장: 지금 들어가면 소수만 하게 된다. 여기 있는 사람이 다 들어간다고 해도 적다. 파업을 어떻게 할지 충분히 생각을 해 봐야 한다.

[하지만 처음에 1층 매장을 가득 메우고도 자리가 모자라 로비와 건물 밖까지 조합원들이 가득찼을 때 파업을 선언하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었다.]

조합원 1: 언제까지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인가?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우선 전산실만 점거해도 효과가 충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노조위원장: 파업은 최후의 무기다.

조합원 1: 지금이 최후다. 우리가 다 잘린 다음에 파업해 봤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