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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은 미국 제국주의의 취약한 고리

파키스탄의 운동이 큰 승리를 일궜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확산되면서 파키스탄 접경지역의 불안정이 늘고 있다. 제프 브라운이 미국 제국주의의 취약한 고리인 파키스탄을 파헤쳐 본다.
파키스탄과 그 인접국들

이프티카르 초드리가 대법원장으로 복귀한다는 발표가 난 후에 파키스탄의 분위기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좋았다. 변호사들이 이끈 운동은 파키스탄 대통령 아시프 자르다리를 공포에 질리게 했고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사람들은 흥에 겨워했다.

자르다리는 2008년 무샤라프 군부독재의 종식 후 열린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했다. 파키스탄인민당(PPP)의 지도자이자 자르다리의 부인인 베나지르 부토는 선거 운동중에 초드리의 복직을 약속했다.

무샤라프는 2007년 3월에 대법원장에서 해임됐다가 변호사들의 거센 운동 덕분에 2007년 7월에 복직한 초드리를 2007년 11월에 다시 해임했다. 무샤라프가 ‘테러와의 전쟁’과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거치적거린다며 공격하는 데도 초드리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자진사퇴하지 않았다.

초드리가 해임된 후 변호사들은 경찰들의 곤봉 세례를 받으면서도 파키스탄 전역의 고등법원 건물 밖에서 매주 규탄 집회를 조직했다. 변호사들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향하며 PPP가 자르다리의 대선 공약[초드리의 복직]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대장정’을 벌이자고 호소했다. 자르다리는 수많은 변호사와 활동가를 체포했고 자신의 정적이자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의 지도자 나와즈 샤리프를 가택연금하고 탄압했다.

자르다리는 파키스탄 최대 주(州)인 펀자브의 주요 도로를 대형 운송용 컨테이너로 봉쇄했다. 3월 12일 새벽에 경찰은 카라치와 남부 도시 여러 곳에서 대장정을 시작하려던 변호사와 활동가 들을 공격했다.

모진 탄압을 뚫고 4천 명 이상이 재집결지인 라호르 시(市)의 고등법원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난무하는 최루탄, 경찰들의 곤봉 세례, 연행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웠다. 이 장면이 케이블 뉴스 방송에서 고스란히 보도됐다.

자르다리의 대책이 효과가 없자, 라호르 시의 고위 경찰관들이 사임하기 시작했고, 대장정이 연좌농성으로 바뀐 3월 16일 오전 5시, 총리 유수프 길라니는 초드리의 복직을 발표했다.

이 승리는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지배계급 내 분열을 모두 반영하는 것이었다. 지배계급 내 반목과 분열이 얼마나 컸던지 대법원이 파키스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중요한 주인 펀자브의 주총리 샤바즈 샤리프와 그의 형 나와즈의 공직 선거 출마를 가로막는 판결을 내릴 정도였다.

나와즈는 대법원장의 복직을 요구하는 운동에 힘을 보태며 이에 응수했다. 자르다리는 무샤라프가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에게 부여한 특별 권한을 초드리가 대법원장의 권한으로 폐지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력, 특히 민간원조로 매년 제공되는 15억 달러(약 2조 원)를 회수하겠다고 으르는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압박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초드리의 복직을 승인했다.

자르다리는 인기를 급속하게 잃었다. 자신의 처 베나지르 부토의 암살 때문에 동정표를 사 권좌에 앉긴 했지만, 부토가 총리를 두 번 역임하던 1990년대에 자르다리는 모든 국가계약에 마수를 뻗쳐 “미스터 10퍼센트”[국가계약에 개입해서 ‘수수료’ 명목으로 10퍼센트 씩 가로채 이런 별명이 붙었다]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탐욕스럽기로 유명했다.

초드리는 독특하고 모순적인 인물이다. 파키스탄에는 사법부 독립의 전통이 없다. 그는 대법원장의 권한으로 ‘실종 사건’을 조사하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보기관 요원들을 법정에 세워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초드리는 무샤라프의 죽마고우에게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팔린 파키스탄 철강회사의 민영화 결정을 뒤집기도 했다.

초드리는 ‘테러와의 전쟁’과 신자유주의를 전폭 지지하기를 바라는 미국에서 일정 정도 독립해야 한다는 PML-N 지도부를 포함한 파키스탄 지배계급 내 일부의 의견을 대변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대중 행동을 고무하는 모험도 감수할 준비가 돼 있다.

대법원장 초드리의 복직을 요구하는 대장정 ⓒ사진 출처 파키스탄 노동당

세계 최악의 빈곤과 불평등

파키스탄의 정치·경제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다. 파키스탄은 최근 몇 년간 연평균 7~8퍼센트 성장했다. 그러나 대부분 해외에서 들어온 핫머니, 은행의 고위험 대출 등 투기로 인한 성장이었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그렇듯이, 파키스탄 섬유 산업의 수출은 급감했고 주가는 폭락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70억 달러(약 9조 3천억 원)를 긴급 수혈해 줬지만 충분치 않은 듯하다. 믿기 힘들겠지만 투기꾼들이 지원금을 요청했고, IMF 수혈 자금 중 10억 달러가 주식 시장으로 흘러갔다.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은 탐욕의 끝을 모르는 뻔뻔하고 부패한 파키스탄 지배계급의 실체를 잘 보여 준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매년 발표하는 국제 부패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파키스탄보다 부패한 나라는 나이지리아밖에 없다. 노동자들에게는 노동권이 없고 경찰과 판사에게는 뇌물을 먹여야 하고 물과 같은 자원을 누군가 몰래 빼돌리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파키스탄은 산업혁명 초기의 영국과 비교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파키스탄의 빈곤과 불평등은 세계 최악이다. 1억 6천만 인구 가운데 3분의 1이 빈곤층이고 4분의 1은 5년 전보다 못 산다. 파키스탄의 의료·교육·주택·복지는 정체 상태다. 마드라사[이슬람 종교 학교]에서 교육받는 아이들이 많아졌지만, 이는 이슬람 정당들의 영향력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마드라사말고는 빈민의 자녀가 교육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체계적으로 탈세하기 때문에 출산 도중 산모 사망률이 매우 높고, 그나마 있는 자원도 권력기관, 특히 군대에 먼저 투입된다. 젊은이들은 파키스탄에서 절망만을 보고, 다른 나라로 갈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한다.

파키스탄은 영국 제국의 ‘분리 지배’ 정책의 산물

정치도 마찬가지다. 파키스탄은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를 이간질한 영국 제국의 ‘분리 지배’ 정책 때문에 1947년에 파키스탄이 탄생했다. 파키스탄의 건국은 자신만의 국가를 갖고 싶어하던 인도 북부에 기반한 극소수 지주와 지식인 무슬림 중간계급의 이해관계와 부합했다. 통일된 상태였다면 중국보다 인구가 더 많았을 인도아대륙의 분할은 강대국들, 특히 1950년대 초부터 파키스탄에서 패권적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에게 커다란 이익이었다.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원조, 그 중에서도 특히 군사원조를 통한 동맹 관계다. 그 결과 파키스탄에서 군대가 유력한 집단이 됐다. 지금까지 군부독재 정권이 네 번 집권했고, 파키스탄 역사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간이다. 군대는 힘으로 특권을 지켰고 역사의 분수령마다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번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 국무부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군부는 이번 위기에 공개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파키스탄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1970년대 민족주의자인 총리 줄피카르 부토 ― 베나지르 부토의 아버지이자 부토 가문의 수장 ― 는 핵무기 독자 보유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 계획은 당시 미국 대통령 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됐다. 오늘날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보유한 아홉 나라 중 하나다.

파키스탄 국가의 핵심을 이루는 군사 기구의 힘이 막강하지만 “과연 파키스탄이란 나라가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다. 건국 25년 만에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당시 이름은 동파키스탄]와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치렀고, 1971년에 방글리데시가 독립했다. 파키스탄에는 네 개 주(州)가 남았는데, 그 가운데 북서변경주(NWFP), 발로치스탄 주, 신디 주에는 분리 독립 운동이 존재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북서변경주와 국경지대의 연방직할부족지역(FATA)에서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영향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2002년부터 미군은 이 지역에서 알카에다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난온 탈레반을 제거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색출·사살한다는 명목으로 무인폭격기를 동원해 이 지역을 폭격했다.

이 때문에 많은 민간인이 죽었고 사람들은 무장 저항세력에 호감을 느끼게 됐다. 그러나 단지 미군의 군사 공격 때문에 저항세력에 대한 지지가 는 것은 아니었다. 파키스탄 군대도 민간인을 학살했고, 무능한 파키스탄 정부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적절한 경제·복지 혜택을 제공하지 못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사람들은 카라치 같은 대도시로 이주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동맹인 미국을 도와야 한다는 압력에 대응해, 또 미국의 군사 지원이 인도를 상대하는 데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파키스탄 군대는 최근 북서변경주과 연방직할부족지역에서 대테러 군사 작전을 강화했다. 그 결과 이 지역 주민과 심하게 충돌했고 파키스탄 군대 일부가 투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사실, 상당수의 파키스탄 군인은 이 군사 작전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이런 군사 작전은 2008년 8월에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차로 몇 시간밖에 안 걸리는, 아름다운 관광 도시 스와트 공격에서 절정에 달했다. 파키스탄인민당(PPP)과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의 지지를 받은 이 공격으로 몇 주 만에 난민 40만 명이 생겨났다. 난민들은 살 곳을 찾아 파키스탄의 최대 도시 카라치로 피난했지만 카라치 시장은 난민들이 탈레반을 유입한다며 그들을 공격했다. 최근 카라치에서 종족 간 분쟁이 많이 벌어졌다는 점을 볼 때, 이 공격으로 난민 대학살이 초래된 것은 당연하다. 수십 명이 살해됐고, 1천5백만 인구의 도시가 이틀 동안 폐쇄됐다.

군사 전략이 완전히 실패하면서 자르다리는 반란세력과 휴전을 합의하고 스와트 지역의 1백6십만 주민들에 대한 통치권을 탈레반이 주도하는 물라[이슬람의 학자·교사·율법학자]들에게 넘겨 줘야 했다. 지금 스와트 지역에서 샤리아 율법이 적용되면서 물라들이 사법부를 운영한다. 소녀들에게는 교육받을 권리가 제한되고, 여성들은 장보러 가지도 못하고 심지어 교외지역에서는 우물에서 물을 긷지도 못한다. 빈민들은 이런 푸대접을 받으려고 미국과 파키스탄 군대에 맞선 투쟁에서 탈레반의 주도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빈민들은 이제 탈레반에 분노한다.

“아프팍” 전쟁

미국과 파키스탄 합동 군사작전의 결과 오바마 정부 관리들이 편의상 “아프팍(AfPak)” 전쟁으로 부르는 전쟁이 발생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분쟁은 서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데이비드 밀리반드[영국 외교부장관]가 워싱턴 방문 후에 말했듯이, 파키스탄이 안정되지 않으면 아프가니스탄이 안정될 리가 없다. 양국 국경은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총독이 제멋대로 그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을 따라 독립된 파슈툰 국가를 세우고 싶어하는 파슈툰족들이나, 강제로 국경조약에 서명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이 국경선에 반대한다.

오바마는 이미 병력 수천 명을 아프가니스탄에 추가 배치했고, 이 수를 1만 7천 명으로 늘리려 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나토 정상회담에서는 동맹들에게 추가 파병을 강력히 요구했다. 오바마 정부의 말하는 방식이 조지 부시 때와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미국의 외교정책은 바뀐 것보다 유지되는 것이 더 많다. 미국이 실제로 비군사적 원조를 세 곱절로 늘리더라도 대중의 불만은 더 커질 것이다. 백악관이 파슈툰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안을 검토할 정도로 미국의 지위는 취약하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크지만 가장 가난하고 인구도 1천만 명으로 가장 적은 발로치스탄 주는 영국령 인도에 공식적으로는 속한 적이 없었다. 독립을 낙관하던 1947년에 파키스탄 군대가 이 지역을 침략해서 파키스탄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때부터 항쟁이 계속 일어났고 잔혹하게 진압됐다. 1970년대에는 시위대 수만 명을 진압하려고 파키스탄 군대 8만 명이 투입됐다. 그래도 저항은 계속됐다. 2005년에는 수이 가스전에서 나오는 가스 공급망을 공격해 카라치 주민들이 숯으로 요리해야 했다. 이 사건은 가스전 개발로 발로치스탄 주민들에게 돌아간 혜택이 전혀 없음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됐다. 이 와중에 발로치스탄 주민 수백 명이 정보기관과 접촉한 후 ‘실종’됐다.

파키스탄은 1947년부터 다섯 번째 주(州)인 카슈미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인도와 두 번 전쟁을 치렀고 모두 패배했다. 카슈미르는 여전히 인도―파키스탄 분쟁에서 주요 쟁점으로 남아 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은 카슈미르의 인도 점령 지역에서 싸우고 있는 이슬람주의 조직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댔다. 카슈미르 전쟁은 인도-파키스탄 간 대리전이었다.

1988년에 오늘날 통제선으로 불리는 인도 관리 지역 휴전선에서 반란이 있어났고, 이를 계기로 카슈미르 지역에서 폭력이 증가했다. 분쟁 때문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난민이 됐다. 파키스탄 국가는 카슈미르의 자결권을 부정한다. 한편 카슈미르에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지배적 세력이 됐고 많은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전사들]을 영입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원조를 받는 무슬림 단체 가운데 라슈카르-에-타이바(Lashkar-e-Taiba)가 가장 유명한데, 아마 이들이 2008년 11월 뭄바이 테러를 저질렀을 것이고, 3월 스리랑카 크리켓 팀에 대한 테러도 십중팔구 이들의 책임일 것이다.

이슬람주의 단체들에 대한 지원은 카슈미르 개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러시아 군대에 맞서 싸울 무자헤딘을 훈련하며 시작됐다. 이 계획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청년 실업가이던 오사마 빈 라덴이 양쪽에 다리를 놓아 주었다. 이 전쟁으로 난민 1백만 명이 파키스탄의 도시로 들어와 대규모 빈민촌을 형성하게 됐고, 칼라슈니코프[러시아의 자동 소총 AK-47의 통칭]와 헤로인이 대거 유입됐다.

초드리를 복직케 한 운동은 파키스탄이 나아갈 길을 보여 줬다. 경찰 폭력이나 체포에도 굴하지 않고 싸우는 변호사와 활동가 들뿐 아니라, 2007년에 초드리가 복직을 요구하며 싸울 때 이를 지지하며 자발적으로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2007년 7월 초드리가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1백만 명 이상의 환영 인파가 라호르에서 이슬라마바드에 이르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2006년 3월에 카라치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도 3만 명이 참가해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의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줬고 반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청중이 있음을 보여 줬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최근 역사에서 파키스탄 좌파가 약해졌지만, 1968년에 파키스탄의 첫 군부 독재자 아이웁 칸을 몰아낸 노동자와 학생 투쟁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았다. 파키스탄 지배자들의 사분오열을 본다면, 그런 운동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출처 영국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2009년 4월호

번역 차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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