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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노조 지도자들, 파업을 유산시키다

지난 12월 3일 자정, 전력 노조 지도부는 파업을 철회했다.

두 차례 파업 유보로 현장 조합원들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지만, 세번째 파업 전야제에 참가하기 위해 3천5백여 명이 서울 본사 강당에 모여 있던 참이었다.

전력 노조 오경호 위원장은 "국가 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 전력산업 구조개편 법안에 대한 여야간 합의 정신을 받아들여 노조의 파업을 전면 철회했다."고 밝혔다.

그는 11월 26일 서울역 집회에서 "더 이상 부패 관료의 노예가 아니다"고 강경하게 말했지만, 동요를 보여 오다 결국 정부에 굴복하고 말았다.

위협용

정부는 시종일관 매우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공·사기업을 불문하고 구조조정 전체에 심대한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으로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김대중이 직접 나서 전력 노조가 "암흑 세계를 만들겠다는 협박까지 한다"며 비난했다.

그런데도 오경호 위원장은 처음부터 현장 조합원들의 힘을 동원할 생각이 없었다. 파업은 그저 위협이었을 뿐이다. 3일 밤에 그는 이렇게 시인했다. "파업은 목적이 아니다. 정말 열심히 하면, 공갈치면 정부가 물러설 줄 알았다." 이 말은 두 번의 파업 유보가 "명분 쌓기"였고 그 덕분에 상황이 더 유리해졌다는 노조의 주장이 허황한 자기 합리화였음도 동시에 보여 주었다. 파업 유보는 김빼기 노릇만 했다. 3일 밤 강당에서 한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2번이나 연기해서 이것밖에 안 왔다. 지도부가 조합원한테 믿음을 못 줬다. 지도부는 조합원 의지의 반도 못 따라간다."

오경호 위원장이 더 관심을 기울이고 더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구조개편 법안에 대한 한나라당의 반대였던 듯하다. 하지만 민주당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가차없는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온 반노동자 세력인 한나라당이 전력산업 구조개편 법안에 일관되게 반대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경호 위원장은 한나라당이 구조개편 법안에 대해 찬성하고 나서자 비빌 언덕을 잃은 듯이 맥이 빠졌다. 3일 협상에서 그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법 제정을 기정사실화하고 3∼5년 유예해 줄 것을 협상안으로 내밀었으나 정부는 이것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3∼5년 유예 안은 현장 노동자들의 바람에는 턱없이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유예가 아니라 민영화 자체에 반대한다." 또 다른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용승계 강제규정도 없이 어떻게 하나? 삼미특수강처럼 법원에서 고용승계 판결 나도 어기는 판국이다."

오경호 위원장에게 3일 오후 강당에 모인 전력 노조 조합원들은 협상에서 좀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압력용에 불과했다. 과연 총력 집결시키려 최선을 다했는지도 의심스럽다. 현장 조합원들이 강당 진입에 성공하고 지방에서도 조합원들이 속속 도착했지만, 노조 집행부는 프로그램을 전혀 준비해 놓지 않았다. 또, 강당에 들어온 조합원들은 3천5백여 명이나 되는데 노조 집행부가 준비한 저녁 도시락은 고작 8백 개였다.

파업 철회에 분노한 노동자들

3일 오후 강당에 모인 조합원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특히, 민영화되면 절반 가까이 정리 해고될 운명인 화력 지부 조합원들의 결의는 대단해 보였다. 두번째 파업 유보 뒤 전원이 삭발한 지부도 더러 있었는데, 이런 지부의 노동자들은 다른 지부 조합원들에게 모자를 흔들어 경쾌하게 인사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조합원들은 회사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아예 아파트 단지를 나가지 못하게 막는 사측의 방해에 맞서야 했다. 한 노동자는 "경찰이 아파트를 봉쇄해 차를 하루 전에 밖에 빼두었다가 아파트 담을 넘어서 올라왔다"고 말했다. 영흥도 발전소는 조합원들이 상경하지 못하게끔 사측이 아예 배를 띄워 주지 않았다.

또, 울산 화력지부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왔는데, 슬프게도 상경 도중 교통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렵사리 서울에 모여든 노동자들은 7시가 넘어서면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노조 집행부가 도시락을 턱없이 부족하게 준비해 저녁을 밖에 나가 먹어야 했기 때문에 저녁 시간은 2시간 넘게 질질 끌었다. 파업을 철회했다는 보도가 뉴스에 나왔다는 소식이 10시경에 전해지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한 목소리로 "파업! 파업! 파업!" 이라고 외쳤다. 노조 집행부가 "뉴스 보도는 오보다" 하고 말하자 조합원들은 위원장이 직접 와서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11시경 오경호 위원장이 왔다. 아직 협상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공갈치면 정부가 물러설 줄 알았다. 정부는 공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에 맞서면] 조합원들이 피를 볼 것이다. 직선제 세워 투쟁하니까 언론에 계속 나왔다. 이제 시작이다. 여러분은 공직자다. 국민과 국가를 사랑해야 한다."며 횡설수설했다. 오경호 위원장이 발언하는 동안 조합원들은 계속 "결론만 말해! 결론부터 말하란 말야!" 하며 파업 철회 여부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조합원들은 오경호 위원장의 발언에 분개했다.

"피 볼 각오로 왔다. 사업소에서 새벽 6시에 경찰 바리케이드를 뚫고 도망나왔다. 이러면 안 된다. 한심하고 어이가 없다. 국민을 위해서라도 파업해야 한다."

"이번에 또 유보하면 끝이다. 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칼부림당할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직선제 쟁취해 현 집행부를 탄생시킨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해선 안 된다."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10시경 흘러나온 파업 철회 보도는 결코 오보가 아니었다. 이미 협상은 마무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집행부는 이 시각에 합의 내용을 발표하면 조합원들의 저항이 솟구쳐 오를 것이 두려워 노동자들이 제풀에 꺾여 해산한 뒤 소수만이 남았을 때 발표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전국 전력 노조 노동자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노동계에서는 "전국 전력 노조 지도부의 명동성당 농성은 검·경찰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난' 조합원들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그러니 노조 지도자들이 이런 잔꾀를 부릴 만도 했을 것이다.

오경호 위원장이 발언하고 간 바로 뒤에 상황은 명백히 달라지고 있었다. 본사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전경들이 즉시 철수했고 출입구를 지키던 사수대도 사라졌다. 오경호 위원장의 얘기를 듣고 파업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조합원 1천여 명은 실망에 젖어 강당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2천5백여 명이 파업에 돌입할 수도 있다는 한가닥 희망을 걸고 계속 자리를 지켰다. 12시 30분경 간부 한 사람이 나와 "합의서가 작성됐다. 집행부는 이 자리에서 모두 나가 버렸다."고 보고했다. 다시 1천5백여 명이 강당을 빠져 나갔다.

나머지 1천여 명은 꾹 참고 위원장을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새벽 2시가 다 돼서야 이강호 사무처장이 대신 왔다. 조합원들은 "오경호 나와!" 하고 소리쳤다. 조합원들의 거센 항의 때문에 이상호 사무처장은 합의문 읽기를 포기했고 대신 농성장에 있던 한 간부가 합의서와 기자회견문을 읽었다.

합의서를 듣고 조합원들은 코웃음을 쳤다. 기자회견문을 읽는 동안 대열 여기저기서 "정부 대변인 새끼들아, 얼마짜리 합의서냐?" 하는 야유가 터져나왔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조합원들은 야유와 함께 물통, 빵, 쓰레기 등을 연단 위의 노조 집행부에게 던졌다. 한 지부장은 마이크 대로 사무처장을 내리치려 했다. 한 조합원은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와 "오경호 일당의 야합에 놀아났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뾰족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발전 부문만이라도 파업에 들어가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준상 여수 화력지부장은 "전조합원 투표에 붙이고 반대 운동을 전개하자. 그만 해산하자"고 말했다. 직권으로 파업을 철회한 노조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은 가득했지만, 끝까지 남아 있던 조합원 1천여 명도 불가피하게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 지도자들은 왜 투쟁을 회피하나?

오경호 위원장은 "50년 간선의 틀을 깨고 직선으로 선출"됐음을 누누히 강조해 왔다. 하지만 그는 파업에 돌입해 정부와 사측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일자리를 지키고 싶어했던 노동자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는 노동자들 앞에서는 과격한 말로 호감을 샀지만 실제 행동은 말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끝까지 싸우겠다", "나를 믿고 따라 달라", "죽기를 각오했다" 등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즐겨 쓰는 말들은 경제 위기 시기에는 흔히 용두사미로 끝나고 만다. 적당한 순간에, 비록 조합원들의 바람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일지라도 타협하곤 하는 게 노동조합 투쟁의 흔한 패턴이다.

노조 지도자들은 흔히 투쟁보다 협상이 더 많은 것을 따내는 열쇠라고 믿는다. 오경호 위원장은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고 싸워서 이기는 것은 차선이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협상도 결국은 기 싸움이고, 협상장 밖의 힘 관계에 의존하는 법이다. 싸우지 않으려 한다면 협상에서도 결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오경호 위원장은 파업이나 농성, 또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충돌을 혼란스럽고 성가신 일로만 여긴다. "유리창 깨고 계란 던지고 하면 당장 기분은 좋을 것이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피를 볼 것이다." 오경호 위원장이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간신히 직선제로 만들어 놓은 노조 기구가 파괴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투쟁 열의를 외면하면서 건전하고 강력한 노조를 건설할 수는 없다.

오경호 위원장의 이런 태도를 그의 개인적 성품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런 태도는 정부/사장과 노동자 사이에서 노동력 상품을 놓고 협상해야 하는 그의 중개인적 지위에서 비롯한다. 오경호 위원장은 공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한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는 정부와 그냥 앉아서 일자리를 잃을 수는 없다는 노동자들 사이에 끼여 완전히 샌드위치 신세였다.

오경호 위원장이 정부/사측과 대결하고 싶어하지 않았음은 강당 안에서 전력 파업 결의를 지지하고 있던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들을 내쫓은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오경호 위원장은 협상장에서 강당에 있는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들을 내보내고 대자보와 현수막을 떼라고 지시했다. 정부와 사측이 "외부 세력"의 개입 운운하며 협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경호 위원장은 더 많은 "외부 세력"에게 연대를 호소함으로써 이에 맞서지 않고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들을 내보내는 쪽을 택했다.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들의 연대 활동이 "협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말이다.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이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피했다. 충돌을 빚으면서 남아 있을 수없었으므로 8시가 다 돼서 어쩔 수 없이 강당을 나왔다. 다만 현수막은 그대로 두고, 노동자들에게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이 돌아간 경위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 알아 본 결과 노동조합 지도부는 이 요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10시경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 두 동지가 우리가 먼저 가게 된 경위를 대자보로 써 가서 노동자들에게 알렸다.

12월 5일에는 노동조합이 이면합의를 했음이 보도됐다. 이것은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발상이다. 공식적으로는 '정부가 공기업의 기선을 제압했다'는 데 장단을 맞춰 주고 대신에 몇 가지 보장을 얻어낸 것이다. 물론 이런 이면 합의조차 농성장에 모인 노동자들의 투지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면 합의에 대해 "비용이 더 들어가는 구조조정은 해서 무엇하는가" 하고 비난했다. 정부도 "앞으로 이면계약을 철저히 단속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전력 노동자들은 얻은 것도 없는데 비난만 받고 있다. 전력 노동자들 자신도 노동조합의 이면합의에 매우 씁쓸해 하고 있다.

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들은 우리가 임금을 위해 싸운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투쟁의 정당성만 훼손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노조 지도자들이 투쟁을 회피하는 상황을 변화시킬 열쇠는 현장 노동자들(평조합원)이 쥐고 있다. 노조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을 대표해 잘 싸우는 한 ― 예컨대 지난 7월처럼 ― 그들을 적극 지지해야겠지만 투쟁을 회피한다면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어야 한다. 전국 전력 노동자들이 이렇게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4일 새벽에는 뾰족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발전 부분 연대회의'가 독자 행보를 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어떻게 구체화될지는 더 지켜 봐야 할 듯하다.

동투(冬鬪)는 무너지는가

정부는 전력 노조의 파업 철회로 동투(冬鬪)가 물 건너간 것처럼 말하며 환호한다. 기성 언론들도 내심 기뻐하며 이렇게 지적한다. "전력 노조가 파업을 포기한다면 구조조정에 맞서 두 노총의 이번 겨울 연대 투쟁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전력 노조가 동투의 최전선에 섰고 그것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전체 노동자 운동의 김을 빼놓았다. 그러나 경험 없는 전력 노조를 앞세운 채 연대 파업 등을 조직하지 못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사장들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은 아직 이르다. 아직 본격적인 투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투쟁의 성패는 예정돼 있지 않다. 그것은 객관적 정세의 변화와 현장 조합원 대중의 자신감과 사기에 달려 있다. 우리가 개입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