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쌍용차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보장 요구가 중요하다
〈노동자 연대〉 구독
쌍용차 사측과 정부가 77일간의 점거 파업에 대한 비열한 보복과 노조 파괴 공작에 나선 지금, 고용보장을 요구한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과 승리를 위한 연대가 왜 중요했는지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레프트21〉 편집부는 쌍용차에서 여전히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보장 요구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정종남 다함께 노동조합팀장의 글(이 글)과 쌍용차 투쟁을 상반기 정치 투쟁의 연장으로 보고 정치적으로 평가하는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의 글 등을 싣는다. 최일붕 운영위원의 글은 지난 8월 15일 ‘상반기 투쟁 평가’ 다함께 회원 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글로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발표 시점이 지나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교훈과 과제를 제시해 우리가 인상주의적 평가와 무력감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법정관리인들은 인력을 감축하고 나머지 노동자들을 철저히 쥐어짜고 노조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법원의 회생 결정을 받아내고 시장가치를 높여서 재매각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재매각되면 상하이차에 팔린 후 나타났던 비극과 재앙들이 고스란히 반복될 것이 뻔하다. 세계적 경제 위기와 자동차 시장의 과잉생산 속에 쌍용차는 살 길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고 다시 구조조정을 강요받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죽은 자’가 생길 것이고, ‘산 자’도 끔찍한 노동강도와 고용불안에 시달리다가 곧 ‘죽은 자’로 전락할 것이다. 이것은 전혀 대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쌍용차를 공기업화해서 정부가 고용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여전히 중요하다. 노동자 고통전가의 악순환을 멈추려면 쌍용차를 공기업화하고 친환경 대중교통 수단 등을 생산하는 데 쌍용차의 설비와 인력을 이용해야 한다.
쌍용차만이 아니라 경제 위기에 속출할 부도 기업의 노동자들은 이처럼 공기업화라는 행동강령을 제기하며 투쟁하고 연대할 수 있다.
이는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고 투쟁이 확대될 수 있는 초점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저들은 경제 위기에 따른 기업 부실과 부도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한다. 이에 반해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보장 요구는 정부가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이윤 추구를 최우선에 둔다는 점에서 기업주들과 정부 간에 차이가 없지만 대중은 정부에 최소한의 공적기능과 책임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보장 요구는 이 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런 투쟁이 확대되면 정부의 본질이 밝히 드러나고, 노동자들의 정치의식도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쌍용차 파업중 진보진영 일각에서 제기한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일시적 공기업화’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런 식의 국유화는 이번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일부 국가들도 시행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GM에 대해 14곳 공장 폐쇄와 2만여 명의 정리해고를 전제로 하고, 반년이나 1년 반쯤 후에 다시 매각하겠다는 오바마 식 국유화는 기업주와 투자자 들의 이윤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부도기업과 금융기관 부실의 피해가 시장 전체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부실기업의 재정을 국가가 메우고, 이어서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수익성을 확보하는 방식인 것이다.
한편, 투쟁에 필요한 정치적 대안 제시를 회피하고 해고 반대 투쟁만이 능사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일부 급진좌파의 관점도 문제다. 그러나 쌍용차 파업에서도 노동자들을 가장 괴롭힌 문제는 대안 부재였고, 이 때문에 거듭 노동자 양보론이 제기됐다.
이에 압력을 받은 일부 급진좌파들은 사회주의적 의미의 국유화를 대안으로 제기했다. 부도 기업 공기업화 요구가 반드시 노동자 산업 통제나 노동자 정부 수립 투쟁과 결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행동강령의 취지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행동강령은 아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자신감이 근본적 사회 변혁을 지향할 만큼 높지 않은 상황에서, 당면한 투쟁에 적합한 요구인 동시에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투쟁이 발전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공기업화 요구는 당장은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적 국유화와 같을 수가 없다. 행동강령의 의의는 현실 투쟁이 근본적 사회변혁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교 구실을 하는 데 있지, 그것의 최종적 형태나 원칙을 되뇌는 데 있지 않다. 현실의 구체적인 투쟁에 사회주의적 원칙 수준의 강령을 제시하면서 막상 개혁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공적자금 투입 요구에 안주하는 것은 정치적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다.